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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 국가대표 강수일 ‘태극기 휘날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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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일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았다. “실력이 모자란 내가 가진 건 의지와 배고픔, 절실함밖에 없다”며 이를 악물었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희망’ 강수일은 분명 아름다운 도전 중이다.

내년 1월 호주 아시안컵을 대비해 12월 15일부터 21일까지 한국축구대표팀 전지훈련이 열린 제주 서귀포시민구장. 모히칸 헤어 스타일에 이국적인 외모의 한 선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문화가정 축구선수 강수일(27·포항 스틸러스)이었다. 12월 제주는 칼바람이 불고 눈발이 흩날렸다. 대표팀 선수 28명 중 강수일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강수일은 연령별 대표를 통틀어 이번에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한국 축구에서 혼혈 선수가 태극마크를 단 건 두 번째다. 백인 혼혈 장대일(39)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다.

한국축구대표팀이 12월 16일 서귀포 시민축구장에서 진행한 전지훈련 중 강수일이 공을 드리블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축구대표팀이 12월 16일 서귀포 시민축구장에서 진행한 전지훈련 중 강수일이 공을 드리블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강수일이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움직이게 한다)다. 강수일은 “내 작은 움직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약점 극복하고 8년 만에 빛난 흑진주
강수일(姜修一)은 서울 강씨 시조다. 사진으로만 얼굴을 본 주한미군 아버지와 어머니 강순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사무소에 호적 신고를 서울 강씨로 했다. 강수일은 어릴 적 싸움꾼이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깜둥이’라고 놀리는 이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옆학교에 싸움하러 갔다가 우연히 축구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유년 시절 미국으로 홀연히 떠났다. 홀어머니는 노인 병수발까지 하며 아들을 키웠다. 하지만 어머니가 허리를 다쳐 강수일은 대학교 1학년 때 가장이 됐다. 강수일은 모친을 생각하며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 입단테스트에 도전했다. 동두천에서 인천까지 왕복 6시간을 기차와 전철을 갈아타며 축구에 매진했다. 마침내 2007년 연봉 1200만원의 번외 지명으로 인천에 입단했다.

강수일은 한인 혼혈 출신 미국 프로풋볼리그(NFL) 스타 하인스 워드(38)가 방한했을 때 가수 인순이와 함께 만났다. 워드처럼 최고 선수가 되고,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강수일은 2008년 2군리그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하지만 갑작스런 스포트라이트는 오히려 독이 됐다. 인천에서 4시즌간 9골에 그쳤다. 2011년 제주로 이적해 3시즌간 7골에 머물렀다. 남들보다 팔다리가 긴 타고난 체격(184㎝·74㎏)과 달리 골결정력이 부족했다. 제주 시절 별명이 ‘여명’이었다. 여명은 경기장 골대 옆에 배치된 광고판에 적힌 프로축구연맹 공식 스폰서 숙취해소 음료명이다. 강수일이 골대 밖의 광고판만 맞출 만큼 골결정력이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강수일은 8년 만에 흑진주처럼 빛났다. 올 시즌 포항으로 임대된 강수일은 아시아 최고 스트라이커 출신 황선홍 감독(46)을 만나서 물이 올랐다. 올 시즌 6골·3도움을 기록한 강수일에 대해 황 감독은 “수일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골을 넣는다. 간절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고 말했다.

강수일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았다. 고향 경기 동두천에는 김두현(수원), 김동진(무앙통)에 이어 세 번째 대표선수가 된 강수일 축하 현수막이 내걸렸다. 강수일은 휴대폰 카카오톡 사진을 태극기, 프로필명을 ‘태극기 휘날리며’로 바꿨다. 강수일은 “늘 꿈꿔왔던 순간이다.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수일아 고맙다’고 하셨다”고 감격스러워했다.

봉사로 나눔 실천하는 K리그 앙리
제주 전지훈련 명단 28명 중 강수일처럼 첫 태극마크를 단 선수는 14명에 달한다. 손흥민(22·레버쿠젠), 기성용(25·스완지시티), 조영철(25·카타르SC) 등 유럽파와 중동파가 소속팀 일정으로 인해 전지훈련에 참가하지 못했다. 국내파와 일본 J리그, 중국 슈퍼리그 선수들만 참가했다.

하지만 울리 슈틸리케 감독(60·독일)은 대표팀 문을 누구에게나 열어뒀다. 슈틸리케 감독은 “우리팀에는 배고픈 선수가 필요하다. 열정이 있는 선수라면 나이·경험에 관계없이 발탁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수일은 “실력이 모자란 내가 가진 건 의지와 배고픔, 절실함밖에 없다”며 “대표팀 유니폼을 처음 입어봤다. 잘 어울리더라. 이 옷을 쉽게 벗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강수일은 인천에서 입단테스트를 받던 시절처럼 도전자 자세로 임했다. 박이천 전 인천 유나이티드 부단장은 “수일이만큼 배고픈 녀석은 없을 것”이라고 응원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22일 아시안컵 최종엔트리 23명을 발표한다. 공격수 김신욱(27·울산)과 이동국(35·전북)이 부상으로 재활 중이고, 박주영(29·알샤밥)과 이근호(29·엘자이시) 등은 이번 전지훈련에 뽑히지 않았다. 이종호(22·전남), 이용재(23·나가사키), 이정협(23·상주) 황의조(22·성남) 등과도 경쟁해야 한다. 강수일의 아시안컵 최종엔트리 포함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만약 탈락하더라도 8월 동아시안컵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희망’ 강수일은 분명 아름다운 도전 중이다. 강수일 에이전트인 윤중호 듀즈 실장은 “수일이는 ‘1’을 받으면 ‘2’로 갚는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라고 말했다. 대표팀 명단이 발표되는 순간 강수일은 자신의 경차로 경찰청 축구단에 입단하는 정혁(28·전북)을 데려다주고 있었다.

강수일은 자신을 있게 해준 축구공으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지난 7월 K리그 올스타전에서는 특별한 세리머니를 펼쳤다. 그의 유니폼 안의 티셔츠에는 ‘다(같이 사는 사회), 문(화가 있는 사회), 화(합하는 우리들), 우리는 하나입니다’라는 삼행시가 적혀 있었다.

강수일은 인천 전·현직 동료들과 만든 ‘아미띠에’(Amitie·프랑스어로 우정)란 봉사단체 회원이다. 8일 다문화가정 어린이를 돕는 드림컵에 참가했다. 강수일은 “나를 보고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더 큰 희망을 품을 것 같다. 난 대표팀 소속으로 인터뷰도 하고 있다”며 “아이들이 편견 없는 세상에서 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수일의 롤모델은 티에리 앙리(37·프랑스)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과 2004년 아스널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무패 우승 등을 이끈 앙리는 지난 16일 현역에서 은퇴했다. 강수일의 별명도 ‘K리그 앙리’다. 앙리처럼 빠른 스피드와 탄력 넘치는 플레이를 한다. 골을 넣고 귀에 손을 갖다 대 관중의 함성을 듣는 앙리의 골 세리머니를 따라하기도 했다. 강수일은 “앙리의 골결정력을 닮고 싶다. 무엇보다도 앙리의 환한 미소가 좋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K리그 앙리’ 강수일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어한다.

<박린 일간스포츠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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