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멍 때린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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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줄 놓고 머릿속 비우기… 정신과 의사도 추천하는 효과적 힐링방법

점심을 먹고 일터로 돌아왔는데 막상 일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또는 매일같이 겪고 있을 상황이다. 3시간짜리 연강에 지쳐 칠판도 교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대학생이건, 집안일 마치고 겨우 한숨 돌리고 있는 주부건, 뜻하지 않게 ‘멍 때리는’ 순간은 때때로 찾아온다. 멍하니 정신줄 놓고 머릿속을 비우는 시간,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의식하지도 않았던 이 ‘멍 때리기’가 느닷없이 각광을 받고 있다.

멍 때리기 트렌드의 최전선에는 ‘컬러링북’이 있다. 이름 그대로 ‘색칠하는 책’을 뜻하는 컬러링북은 연말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어린이들의 ‘색칠공부’ 그림책처럼 흰 바탕에 밑그림만 그려져있을 뿐, 컬러도 글자도 없는 단순한 책들이기에 그 효과는 단순하다. 부제에 ‘안티 스트레스’(스트레스 해소)라고 쓰여 있을 정도로 그저 ‘멍 때리기’에는 더없이 좋은 도구로 쓰이는 셈이다.

10월 27일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제1회 멍 때리기 대회 참가자들이 멍 때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 서울시 제공

10월 27일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제1회 멍 때리기 대회 참가자들이 멍 때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 서울시 제공

색칠하는 책, 베스트셀러 1위에 
“그게 어떤 느낌이냐 하면, 되게 집중은 하고 있는데, 그런데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한 거예요. 뭘 떠올리고 계산하고 하는 그런 활동이 없으니까 머릿속이 투명해지는 느낌?” 스스로 컬러링북에 ‘사로잡힌 것 같다’고 표현하는 직장인 남은영씨(29)는 요즘 퇴근 후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컬러링북을 펴는 일이다. 옷도 채 벗지 않고 컬러링북의 아무 쪽이나 편 뒤 책상에 놓여 있는 색연필을 집어든다. 그러고는 그저 내키는 대로 이곳저곳 칠해 나가는 것이 전부다. 다른 색깔의 색연필로 바꿔 집어드는 일만 있을 뿐, 한장의 그림을 다 그리는 동안은 침도 삼키지 않고 멍한 상태에 집중한다. “굳이 말하자면 ‘건강한 일탈’ 같은 느낌이려나. 집에서나마 옷 갈아입은 뒤 화장 지우고 씻고 그러는 정해진 일과를 벗어나 자유롭게 놓아버리는 시
간이 생기니 좋더라고요.”

컬러링북에 빠진 많은 20~30대 여성들처럼 남씨 역시 친구가 예쁘게 색칠한 컬러링북 그림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것을 보고 알게 됐다. 그 친구인 서연희씨(29)는 “처음엔 예쁘게 색칠하는 데에만 신경썼는데, 하다 보니 결과물인 그림보다는 그리는 과정이 더 도움이 많이 되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종일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니터에 질려 하면서도 주말이면 침대나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눈앞에서 떼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진저리가 쳐지던 참에 우연히 컬러링북을 발견했다. ‘힐링’의 방법을 찾아 여러 권 책을 주문해 봤지만 정작 힐링의 효과는 무심결에 같이 주문한 컬러링북에 있었다. “그 짤방(이미지를 가리키는 인터넷 속어) 아세요?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적혀 있는…. 색칠할 때 딱 그 상태가 되는데
그게 저한테는 ‘힐링’이에요.”

컬러링북 가운데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비밀의 정원>은 12월 둘째 주 베스트셀러 순위에서도 1위를 차지하며 3주째 1위를 지키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 주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따르면 9월 첫째 주 20위로 순위에 오른 이 책은 매주 거침없이 순위가 올라 10월 넷째 주에는 1위에까지 올랐다. 3주간 1위를 고수한 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만화 <미생>에 잠시 1위 자리를 내줬지만 이내 1위 자리를 탈환해 20만부가 넘는 판매량을 올리고 있다.

꽃이나 나무, 풍경 등의 그림 위주인 <비밀의 정원> 외에도 명화나 인물 그림 등 다양한 종류의 컬러링북이 인기를 끄는 현상은 한국만의 것은 아니다. 처음 출간된 영국에서 10만부, 프랑스에서 50만부가 나갈 정도로 컬러링북의 인기는 세계적이다. 스마트 기기가 보편화되면서 디지털 자극이 과도해진 시대에 아날로그적 예술활동이 주는 ‘안티스트레스’ 효과가 인기의 배경으로 꼽힌다.

독자가 직접 색칠한 컬러링북 그림 | 독자 제공

독자가 직접 색칠한 컬러링북 그림 | 독자 제공

멍 때리기 대회, 예상 밖 호응 얻어
컬러링북이 알려지던 시기와 맞물려 대놓고 ‘멍 때리기’ 고수를 뽑는 대회도 열린 바있다. 아예 색연필조차 들면 안 될 정도로 급진적인 멍 때리기다. 지난 10월 27일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제1회 멍 때리기 대회’는 나름 ‘세계 최초’임이 알려지며 이목을 끌었다. 잠을 자선 안 되고, 그렇다고 딴짓을 해서도 안 되는 이 대회의 우승자는 초등학교 2학년 김지명양(8)이 차지했다. 당초 50명에게만 주어지는 참가자격을 놓고 약 3대 1의 경쟁률을 뚫었던 참가자들은 도심 한복판 광장에 멍하니 앉아 ‘무위’의 극단을 시위했다.

흥미를 끄는 1회성 이벤트로 사라질 법도 했지만 예상보다 멍 때리기 대회에 대한 호응은 컸다. 11월 18일에는 중국의 청두시에서 중국 최초의 멍 때리기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서울 대회가 끝난 뒤에는 전국에서 대회개최 요구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2회 대회부터는 시기를 앞당겨 전국 각지를 돌며 대회를 열기로 했다. 멍 때리기 대회를 주최한 프로젝트 기획자 ‘웁쓰양’(38)은 끊임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강박에 맞서고 싶었다.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면 안 되고, 뭔가를 해나가야 한다는 불안이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멍때리는 걸 가치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한테 새로운 기준을 보여주려고 도전한 기획입니다.”

멍 때리기가 얼핏 시간 낭비처럼 여겨지지만, 끊임없는 자극이 뇌에 밀려드는 시대에‘멍 때리기’는 정신과 의사들도 추천하는 효과적인 휴식 방법이다. <멍 때려라>의 저자인 신동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멍 때리기가 가장 효율적인 뇌의 재정비 수단이라고 말한다. 특히 전달되는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 오히려 그 내용을 일관성 있게 배열해 자신에게 유익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멍 때리기가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신 교수는 “뇌는 휴식을 통해 정보와 경험을 정리하고 불필요한 정보는 과감하게 삭제하여 새로운 생각을 채울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데, 현대인의 머리는 휴식할 시간이 없다”면서 “신경증적인 불안감이 24시간 SNS에 접속하게 하는 등 무언가를 찾아 헤매게 만들고 있지만 정작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하는 데 필수적인 재정비의 시간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뉴턴이 사과나무 아래서,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만유인력과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던 것도 아무 생각없이 ‘멍 때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기사의 독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사를 다 읽었다면 대략 3000자 정도를 읽었다. 회사 사무실에서 오고가는 흔한 보고서로 따지면 2~3쪽, 단행본 책으로 따지면 2쪽 반 가량의 자극을 뇌에 전달한 것이다. 상사가 당신을 노려보고 있지만 않다면 잠깐 눈을 떼고 멍 한 번 때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회의시간이라면 들고 있는 필기구로 남 몰래 당신만의 컬러링북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여 멍하다고 핀잔 좀 들으면 어떠랴. 멍 때리고 나면 개운하게 잊을 수 있을 테니까.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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