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탐정소설가 노버트 데이비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1943년에 데이비스의 첫 장편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가 출간되었을 때 미스터리 비평가인 존 아포스톨루는 이 작품에 대해 “이제까지 쓰인 가장 웃긴 탐정소설이자 데이비스가 정점을 찍은 우스꽝스러운 모험담”이라고 평했다.

“몇 년 전에 노버트 데이비스라는 작가의 탐정소설을 아주 재밌게 읽었네. 그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두 명의 친구들에게도 빌려주었고 모두 내 의견에 동조했지.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수백 권의 소설을 읽었고 또 읽는 것을 좋아했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훌륭한 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마 두 권일 거야. 그 중 하나가 데이비스의 책이라네.” 비트겐슈타인이 제자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추리소설의 광팬이었다는 것은 <비트겐슈타인 평전>이나 제자인 노먼 맬컴의 회상록 <비트겐슈타인의 추억>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스트리트 앤 스미스’에서 발행한 펄프 잡지 <디텍티브 스토리 매거진>을 즐겨 읽었으며 이 잡지로부터 “꽤 많은 지혜를 얻었다”는 얘기를 종종 했다. 평전에 따르면, (모든 분야를 통틀어)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높이 평가한 작가는 노버트 데이비스였다고 한다. 아아 철학계의 슈퍼스타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던 탐정소설가라니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대관절 노버트 데이비스는 누구인가. 나는 인터넷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펄프 작가의 프로필>이라는 글을 통해 그의 생애에 관해 얻어들을 수 있었다.

아랫줄 오른쪽 끝이 노버트 데이비스, 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레이먼드 챈들러 | www.thrillingdetective.com

아랫줄 오른쪽 끝이 노버트 데이비스, 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레이먼드 챈들러 | www.thrillingdetective.com

학비를 벌기 위해 탐정소설 쓰기 시작노버트 해리슨 데이비스는 1909년 4월 18일, 일리노이 모리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버트 데이비스였고 그의 가문에 로버트란 이름을 가진 남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노버트의 부모는 전통에서 약간 벗어난 이름을 아들에게 붙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데이비스는 자신의 이름을 싫어했다. “계집애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친구들은 ‘버트’라고 불렀다. 스탠퍼드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틈틈이 데이비스는 탐정소설을 썼다. 가난한 농촌마을 출신의 법대생은 어떤 계기로 탐정소설을 쓰기 시작했을까. 대공황 직후였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데이비스는 법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잔디를 깎고 차를 닦고 모래를 퍼서 날라보았지만 성실히 노동하는 삶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내 타자기로.” 이 글에 따르면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탐정소설을 쓰기 시작한 듯하다. 1932년 6월, 데이비스는 펄프 잡지 <블랙마스크>에 첫 작품을 발표한다. 이듬해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그는 이미 <다임 디텍티브>, <디텍티브 픽션 위클리> 등에 작품을 팔아 원고료를 받는 작가였다. 탐정소설을 쓰는 것만으로도 벌이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그는 변호사 시험을 포기하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데이비스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작품을 쓰며 여러 펄프 잡지 작가들과 교류했다. 이들의 모임은 ‘픽셔니어즈’(The Fictioneers)라는 이름이었고 스물다섯 명 정도가 이 그룹에 속해 있었다. 데이비스와 같은 동네에 살았던 레이먼드 챈들러도 모임에 나왔다고 한다. 그는 데이비스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챈들러의 얘기를 들어보자. “나는 <블랙마스크>에 발표한 첫 작품을 쓰기 전 펄프 픽션에 대해 연구하던 시절에 노버트 데이비스의 초기 작품을 읽었습니다. 무척 마음에 들더군요. <레드 구스>는 내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훗날 제임스 샌도가 앤솔로지를 만들 때 데이비스의 <캔자스시티 플래쉬>를 넣으라고 추천하기도 했지요. 이 소설은 <블랙마스크>에 실린 여러 소설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는 작품입니다.” 챈들러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노버트 데이비스의 소설에 주목했다. 1943년에 그의 첫 장편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가 출간되었을 때 미스터리 비평가인 존 아포스톨루는 이 작품에 대해 “이제까지 쓰인 가장 웃긴 탐정소설이자 데이비스가 정점을 찍은 우스꽝스러운 모험담”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서점의 추리소설 코너. | 홍도은 기자

서점의 추리소설 코너. | 홍도은 기자

챈들러와 아포스톨루가 말한 것처럼 데이비스의 작품에는 늘 ‘<블랙마스크>가 지향하는 터프함+스크루볼 코미디’가 어우러져 있었다. 그가 작품에서 구사하는 유머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과 챈들러를 사로잡은 매력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유머 때문에 데이비스는 ‘팔리지 않는 작가’로 분류되었다. 이 세계의 전설이었던 <블랙마스크>의 편집장 조셉 T 쇼는 “액션으로 질주하는 내 잡지에 데이비스의 유머러스한 작품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겨우 다섯 편을 제외한 다른 소설은 일절 잡지에 싣지 않았다. 그 시절의 하드보일드 작가들은 “터프가이 픽션의 성서인 <블랙마스크>에 작품을 싣기를 원한다면 유머러스한 요소를 죽여야 한다”는 조언을 듣곤 했다. 챈들러가 보여준 재치와 달리 엉뚱하고(whimsy) 우스꽝스러웠던 데이비스 식의 유머가 통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동료 작가들로부터 하드보일드 소설의 최고 전문가로 여겨졌음에도 대중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고독과 좌절로 인해 마흔살에 자살
1949년 7월 28일, 데이비스는 자동차 배기관에 호스를 연결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마흔 살의 일이다. 유언은 남기지 않았다. 죽기 직전 그는 암에 걸린 상태였고 아내는 유산했고 생활비가 없어 챈들러를 비롯한 동료 작가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녀야 했고 작가로서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한마디로 고독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당대에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만큼 좌절감도 컸다. 만약 데이비스가 살아생전에 비트겐슈타인의 찬사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제자 노먼에게 그의 주소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데이비스의 작품이 얼마나 뛰어난지 말해주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노먼은 끝내 데이비스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비트겐슈타인 평전>의 저자 레이 몽크는 노버트 데이비스가 죽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 천재가 자신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을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죽고 나서 진가를 인정받은 작가가 어디 노버트 데이비스뿐이겠냐만, 그렇더라도 이런 뒷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역시 마음이 아프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가 쓴 이런 글(에 실려 있다)을 인용해 주고 싶은 것이다. “그는 탐정소설 작가들 중에서도 이상한 중간지대에 위치해 있다. 작품은 아주 소수만이 접해 볼 수 있으며 펄프 잡지 비평가들에게는 극구 칭찬받고 있다는 상황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운 좋게 어디선가 데이비스의 작품을 만난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그리고 소문을 퍼뜨리는 거다.

<김홍민의 문화의 발견>은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그동안 <김홍민의 문화의 발견>을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북스피어 대표>

김홍민의 문화의 발견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