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내년 경영계획 ‘썼다 지웠다’ 하며 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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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여건 예년보다 훨씬 악화 전망… 투자와 채용 규모도 줄 듯

“내년 경영계획을 벌써 세 번째 다시 짜고 있습니다. 올 2분기 실적이 안 좋았는데 3분기에는 더 나빠져 경영진들이 내년 계획을 전면적으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어요. 게다가 환율이나 유가 같은 메가톤급 경제 변수들이 한꺼번에 불거져 내년은 경영계획 짜기가 어느 해보다 어렵습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내년도 경영계획에 대한 질문에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현대중공업’ 하면 항상 흑자를 내는 안정적인 기업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는데 세계 조선경기가 꺼지면서 이제 그런 믿음이 무너졌다”면서 “내년 경영계획은 확정돼봐야 알겠지만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를 넘어 혁신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들 시장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내년에도 세계 경기가 저성장 기조를 이어가면서 조선업을 비롯한 국내 주력 산업계가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환율과 유가, 중국의 성장세 완화 등 메가톤급 경제 변수들이 한꺼번에 불거지면서 기업들이 내년 경영계획을 짜는 데 애를 먹고 있다. | 연합뉴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내년에도 세계 경기가 저성장 기조를 이어가면서 조선업을 비롯한 국내 주력 산업계가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환율과 유가, 중국의 성장세 완화 등 메가톤급 경제 변수들이 한꺼번에 불거지면서 기업들이 내년 경영계획을 짜는 데 애를 먹고 있다. | 연합뉴스

달러 강세로 수출기업 체산성 악화
현대중공업은 올해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지난해 4분기부터 올 3분기 말 현재 누적적자가 3조2000억원을 넘어섰다. 급기야 인력 구조조정까지 진행 중이다.

문제는 무너진 실적 위에서 길을 잃어버린 기업들이 현대중공업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내 주요 기업들이 내년 경영계획 방향을 잡는 데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통상 10월 중·하순부터 초안을 잡기 시작하는 내년 경영계획을 수차례 손질하는 건 이제 대수롭지도 않을 정도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기업 현장에는 한숨과 탄식이 난무하는 상황이다. 내년 한 해 국내외 경제여건이 예년에 비해 예상보다 훨씬 좋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달러 강세로 수출기업의 채산성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엔저 현상으로 일본 기업들과 경쟁하는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이 크게 약화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또 중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국내 기업들의 매출 감소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8% 이상 고성장을 유지해 왔던 중국 경제가 내년에 7%대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급격한 유가 하락도 무시할 수 없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강중구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업들이 보통 10월에 나온 경제지표를 보고 내년도 경영계획을 세우는데 올해는 이런 지표의 변동성이 유난히 크게, 또 안 좋게 나타나고 있다”면서 “외환위기 때나 세계 경제위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기업들이 내년 경영계획을 세우기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삼성그룹은 계열사별 경영계획 확정이 늦어지고 있다.

삼성그룹은 통상 12월 초 발표되는 사장단 인사 전까지 내년 경영계획을 대략적으로라도 만들었다. 신임 사장단 인사가 발표되면 이들이 검토를 거쳐 내년 경영계획을 확정지어 왔다. 올해처럼 사장단 인사 시점까지 초안이 나오지 않은 것은 이례적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특히 삼성그룹은 내년도 경영계획을 짜기가 다른 기업에 비해 더욱 어려운 상황이다. 한 해 경영의 밑그림을 제시하고 경영화두를 제시해 왔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5월 10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아직까지 회복이 안 돼 사실상 경영에서 물러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경영권 승계와 맞물려 그룹 계열사의 사업 구조조정과 조직개편이 진행 중에 있고, 삼성전자 실적을 떠받쳐 왔던 정보통신·모바일 부문의 세계 시장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기업이 가장 싫어하는 불확실성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만큼 삼성그룹이 처한 어려움을 말해준다.

삼성그룹은 공식적으로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내년 경영계획과 맞물려 최대한 긴축경영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내년 경영계획은 급변하는 경제 변수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향으로 초점이 맞춰지지 않겠느냐”면서 “광고를 포함한 마케팅 비용을 줄이는 것과 동시에 내부적으로 경비 지출이 부풀어 있는 부분을 찾아내 합리적으로 지출을 줄여나갈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경비 줄이고 생존을 걱정해야 할 때”
SK그룹 사정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룹 총수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구속 중인 데다 그룹 주력인 에너지와 정보통신 부문 계열사들이 크게 고전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SK그룹은 10월 말 경기 용인시 SK아카데미에서 CEO 세미나를 열고 내년 경영 목표로 전략적 혁신을 통한 위기극복을 제시했다. CEO 세미나에서 큰 틀을 제시했을 뿐 계열사별로 아직 경영계획을 못 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SK그룹 관계자는 “원유가격 하락으로 국내 정유업체들은 100원에 사갖고 와서 60원에 팔아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에너지 관련 계열사들이 내년도 전략을 어떻게 짜나갈지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업계에서는 통신분야도 시장 포화로 사양산업이라고 하는 말까지 나오는 걸 보면 그룹 주력인 에너지·통신이 최대 위기를 맞는 셈이다. 하나 남은 것은 하이닉스 반도체인데, 반도체 시장도 주기로 보아 앞으로 2년 정도는 업황이 괜찮겠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GS그룹도 분위기가 어둡다. 내년 경영계획 방향은 ‘생존’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룹 매출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GS칼텍스가 유가 하락의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세계 경기침체로 원유 소비량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와중에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지난달 말 감산 합의에 실패함으로써 유가는 앞으로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GS칼텍스 관계자는 “지금으로서는 유가가 얼마가 될 것인가를 예상하고 내년도 경영계획을 짜고 말고 할 단계가 아니라 그야말로 생존을 걱정해야 할 때”라면서 “내년에는 마른 수건을 다시 짜는 심정으로 모든 경비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른 업종에 비해 비교적 좋은 실적을 낸 현대차도 달러 강세와 엔저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대차는 일단 내년에는 내실경영에 치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는 세계 시장에 자동차 몇 대를 파느냐는 전략이었다면 내년에는 품질이나 브랜드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미국 달러 가치가 어느 정도 오를지에 가장 관심이 크다. 달러값이 오르면 같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차를 팔아야 한다”면서 “국내 시장에서는 내수 점유율을 유지하고, 수입차 도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관건이다”라고 말했다.

내수 의존도가 높은 유통산업도 비상이 걸리기는 마찬가지다.

롯데그룹은 국내 소비자들의 소비성향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내년 경영계획을 아직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수출뿐 아니라 내수도 그에 못지않게 위축될 게 확실하다”면서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보다는 하고 있는 사업에서 최대 실적을 올리는 관점에서 경영계획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국내 주요 기업들의 내년 경영계획이 이처럼 불투명한 상황에서 투자와 채용규모 등도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전경련 관계자는 “예년 같으면 기업들은 원·달러 환율만 신경쓰면 그만이었지만 최근에는 원·달러, 원·엔 환율뿐 아니라 유가, 중국 시장 같은 초대형 복합변수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기업들이 투자와 채용 등에서 보수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최병태 선임기자 cbta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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