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온존히 보존된 선유도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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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공원은 옛 정수장의 기억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시간까지도 저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추억도 차곡차곡 저장되고 있다. 오래된 건물, 함포처럼 건재한 기계들, 어린이 미끄럼틀과 일체가 되어 버린 옛 구조물들. 그렇게 선유도공원은 기억을 응축한다. 응축된 기억은 과거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투사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장소의 탄생전’을 보았다. 서울과 수도권의 근대 건축물이 역사적 사건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생성, 변형, 멸실되었는지를 살피는 전시회다. 12월 14일까지 열린다.

전시회는 다섯 개의 섹션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사라진 기억>은 조선총독부, 화신백화점, 국도극장, 스카라극장 등 한때 서울의 랜드마크였으나 이제는 사라진 건물을 다루고 있다. <풍경의 재현>은 주로 일제시대에 건립된(일본 건축가들을 통해 1차 번역된) 유럽의 양식주의 건축물 중에서 파사드, 즉 전면부는 그대로 유지하되 그 기능이 미술관, 극장, 도서관 등으로 바뀐 곳을 다루고 있다. 문화역서울 284(경성역), 서울도서관(경성부청), 서울시립미술관(대법원), 명동예술극장(명치좌) 등이다. <주체의 귀환>은 공간사옥, 선유정수장, 우남도서관처럼 건축가의 획기적인 사유로 인하여 다시 태어난 장소를 다룬다. <권력의 이양>은 국군 기무사령부 등의 권력 상징물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연결된 미래>는 김수근의 세운상가, 김중업의 삼일빌딩 등 지금까지도 한국 현대 건축의 고통스러운 질문과 대답을 끝없이 제기하는 문제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해 리모델링한 선유도공원.

지난해 리모델링한 선유도공원.

조성룡 석좌교수가 10여 년 공들인 작품
이를 둘러보면서, 나는 공간과 장소가 끝없이 회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물론 그 회전은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도는 게 아니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의 외관처럼, 나선형으로 상승하면서 회전하는 것을 뜻한다. 궤적은 동일하되 그 층위가 달라지고 폭이 달라지면서, 공간과 장소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이를 다시 건축적으로 실천하는 행위 또한 달라진다.

이를테면 2014년 8월에 발표된 마포구 매봉산의 ‘석유비축기지’ 설계 공모가 그렇다. 개발도상국으로서 박차를 가하던 70년대에 두 차례의 오일쇼크가 터지자 당시 정부는 석유비축 정책 차원에서 매봉산에 대형 석유탱크 5개를 세웠다. 높이 15m, 지름 15∼38m의 탱크로 131만 배럴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다. 이 탱크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체 부지가 서울광장의 약 11배가 되는 크기다. 2002 한·일 월드컵경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석유기지가 테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정부는 이 석유기지를 폐쇄하였고, 14년이 넘도록 거대한 탱크가 20세기 산업화의 추념비처럼 서 있었다.

이를 서울시가 문화공간으로 재생키로 하고 그 설계 공모를 가진 것이다.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일본의 이토 도요와 조성룡 성균관대 석좌교수 등이 심사를 한 끝에 ‘땅(石)으로부터 읽어낸 시간’이 1등작으로 선정됐다. 조성룡 교수는 “마포 석유비축기지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유일한 기획안이었다. 탱크 등 기존 설치물에 가장 손을 덜 대 보존하고, 과거 기지를 어떻게 지금의 시각으로 해석할지를 담고 있다”고 심사평을 했다. 공간과 장소가 재해석되면서, 어떤 궤적 위를 상동성으로 회전하는 것임을 압축한 심사평이다.

바로 그 조성룡이 10여년 전에 작업한 공간이 매봉산 맞은편의 양화대교 옆 선유도공원이다. 선유도, 말 그대로 신선이 노닌다는 ‘선유’(仙遊)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섬을 둘러싼 한강 하류의 풍경은 수려하다. 당대의 풍류가였던 양녕대군이 이곳에 영복정(榮福亭)을 짓기도 했다. 양천 현감을 지낸 겸재 정선은 개화산, 가양동, 염창, 양화진, 선유도 일대를 한적한 소요유의 풍으로 그렸다. 그러했으나 일제 강점기에 대홍수를 겪고 그 이후에는 여의도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가까운 선유도의 돌과 모래와 나무들을 함부로 옮겨가버린 탓에 꽤 오랫동안 선유도는 섬 아닌 섬으로 남아 있었다. 사실 신생독립국이면서 개발도상국이었던 시절에 선유도 풍취를 즐길 만한 시대적 여유는 전혀 없었다.

12월 2일 선유도공원의 모습. | 정윤수

12월 2일 선유도공원의 모습. | 정윤수

응축된 기억은 아픔 존중하고 상처 치유
그 자리에 정수장이 있었다. 1978년에 완공되어 2000년 12월까지 수돗물을 공급하는 공장으로 기능한 곳이 선유도였다. 이 정수장 시설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2년여의 작업을 거쳐 2002년 4월에 문화공원으로 거듭났으며, 그렇게 10년쯤 운영하다가 작년에 상당한 공을 들여 리모델링을 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이 10여년의 과정을 설계하고 진행한 사람이 조성룡 석좌교수다. 화력발전소를 탈바꿈시킨 런던의 테이트모던 갤러리, 독일 에센 탄광지대의 공연장과 미술관 등 20세기 산업 문화유산을 21세기에 맞게 해석하는 작업이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거니와 조성룡은 이곳 선유도공원과 광진구 능동의 어린이대공원 관리사무소 건물을 리모델링한 꿈마루로 인하여 이러한 작업의 의미와 실천을 주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선유도공원은 옛 정수장의 기억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시간까지도 저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 일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추억도 차곡차곡 저장되고 있다. 오래된 건물들, 함포처럼 건재해 있는 거대한 기계들, 어린이 미끄럼틀과 일체가 되어 버린 옛 구조물들. 그렇게 선유도공원은 기억을 응축한다. 그렇게 응축된 기억은 과거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투사한다. 기억이 왜곡되고 상처받고 멸실되는 것이 아니라 온존히 보존되고 그 아픔이 존중되고 그 상처가 치유되는 삶, 그러한 미래를 선유도공원의 응결된 기억들이 말해준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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