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서 뿌리내린 ‘오키나와 아이덴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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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계인 오키나와계 이민자 3세가 하와이 주지사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하와이의 주류사회에서 오키나와인들의 상징적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지난 11월 초 ‘해외 한국학 대회’ 참석차 하와이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논문 발표가 주목적이었지만, 호놀룰루행 비행기 안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하와이에 깃든 오키나와의 기억이었다. 하와이에는 현재 5만여명의 오키나와 이민자 후손들이 살고 있다. 당연히 그곳에서 오키나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2차대전 말기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조선인 포로수용소에 대한 취재도 해보리라 하는 의욕이 있었다. 오키나와 전쟁 과정에서 미군에 의해 포로가 된 조선인들은 하와이의 포로수용소를 거쳐 조선으로 귀환했다. 그렇다면, 하와이를 매개로 해서 오키나와와 조선의 문제를 탐구해보는 것은 나 자신이 얼마간 관심을 피력했던 ‘오키나와의 조선인 문제’를 해명하는 데도 중요한 계기로 간주되었다.

‘하와이의 오키나와인’ 문제에 대해서는 장소를 답사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얼마간 갈증을 해소했다. ‘하와이의 조선인’ 문제에 대해서도 언젠가 조사연구의 결과를 피력할 때가 올 것 같다.

오키나와계 3세로 미국 하와이 주지사에 당선된 데이빗 이게 주지사가 12월 1일 호놀룰루에 있는 주 의회 의사당에서 첫 연설을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오키나와계 3세로 미국 하와이 주지사에 당선된 데이빗 이게 주지사가 12월 1일 호놀룰루에 있는 주 의회 의사당에서 첫 연설을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일본인 이주민들과는 다른 공동체 이뤄
내가 하와이에 도착했던 당시는 미국의 중간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시점이었다. 시민들이 도로변에 나란히 한 줄로 서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후보에 대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선거의 투·개표는 한국 날짜로 11월 6일에 진행되었는데, 선거 결과를 보던 나의 눈이 커졌다. 민주당 주지사 후보로 선거에 출마한 오키나와계 3세인 데이빗 이게 상원의원이 하와이 주지사로 당선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와이에서 오키나와의 흔적을 찾아보겠다고 생각했지만, 주지사 당선자가 오키나와 3세라는 점은 뜻밖의 우연으로 내게 받아들여졌다. 아무리 이민자 국가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하와이라고 해도, 이민자 후손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일본계다. 그 뒤를 중국계가 뒤따르고 있다. 오키나와계는 5만여명이 존재해 4만여명의 한국계와 함께 비교적 소수의 이민자 사회를 이루고 있다.

소수계인 오키나와계 이민자 3세가 하와이 주지사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하와이의 주류사회에서 오키나와인들의 상징적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오키나와계 이민자가 하와이에서 주지사로 당선되었다는 소식은 즉시 오키나와의 양대 지역 언론에 보도되었다. 오키나와 언론은 당선자인 데이빗 이게의 부친이 2차대전 중 일본인으로 조직된 육군 442부대에 소속돼 미국에의 충성을 보여주기 위해 용감하게 싸워 무공훈장을 받았던 경력을 소개해서 눈길을 끌었다.

이 부분에서 나는 다시 하와이의 오키나와인 문제로 생각을 돌렸다. 존 F 맥더머트의 <하와이의 사람과 문화>에 따르면, 하와이에 오키나와인들이 최초로 노동이민을 시작한 것은 1900년이었다. 이들은 파인애플 농장에서 고강도 저임노동에 종사했다. 초기의 이주노동자들은 단신으로 하와이로 건너와 일정 기간이 끝나면 저축한 급여를 들고 오키나와로 돌아갔지만, 러일전쟁 이후에는 가족단위로 집단이주를 해 하와이 현지에서 삶의 터전을 잡아간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와이에 집단적으로 이주해 온 오키나와인들은 일본인 이주민들과는 다른 문화 속에서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와이에는 일본계 이민자들이 일찍부터 다수를 이루고 있었지만, 오키나와인들은 일본계 이민자들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다. 일본의 이주노동자들에 비해 오키나와계 이민자들은 상대적으로 하와이의 아열대 문화에 잘 적응했다. 오키나와 출신 이민자에게는 하와이의 아열대 기후가 익숙했다.

외국에서 자부심으로 독자문화 보존
하와이에서 일본인들이 일본적 가부장문화와 불교문화를 보존하면서 일본인 공동체를 유지했듯, 오키나와인들 역시 그들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오키나와 공동체를 유지해 나갔다. 하와이에 이주한 오키나와 노동자들은 오키나와 특유의 공동체 의식인 ‘유이마루’ 정신을 견지하면서 상호부조의 정신을 실천했다. 저임금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 장시간 노동하면서도 ‘여성은 신녀’(神女)라는 오키나와 특유의 샤머니즘적 무의식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저임금의 고통에 시달렸지만 한국식으로 ‘계’에 해당하는 ‘모아이’를 통해 공동의 자금을 마련했고, 큰 자금이 필요하면 이 곗돈을 수령해 은행의 기능을 대행했다.

하와이의 오키나와인들은 오키나와 본도에 있을 때보다 더 강하고 독립적인 오키나와 아이덴티티를 견지했다. 하와이 안에서도 일본인과 오키나와인 사이에는 어떤 민족적 동화논리와 반감이 모순적으로 공존했겠지만, 미국의 행정권 아래 있다는 사실이 일본의 시정권 아래 있을 때보다 더욱 독자적인 ‘오키나와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원격지 내셔널리즘’으로 명명할 수 있을 ‘류큐 내셔널리즘’이 오히려 외국인 하와이에서 더 강렬하게 형성된 것이다.

2차대전 말기에 일본계 이민자들이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미군에 자원입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키나와계 이민자들도 다수가 미군에 자원입대했다. 오키나와를 점령하기 위해 미군은 일찍부터 하와이에 체류하고 있는 오키나와인들을 훈련시켰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직후 미 국방성은 군정학교를 개설해 오키나와 점령 시에 필요한 군정장교를 체계적으로 육성했다. 군에 자원입대한 오키나와계 하와이 이민자들의 경우 오키나와 점령작전 시 동원됐으며, 오키나와 점령 후에는 오키나와 주민들과의 통역 및 대민작업에 적극 활용됐다. 전쟁 당시 미군 당국은 일본인과 오키나와인을 전혀 별도의 민족으로 간주했다. 미군이 건설한 포로수용소가 일본인·오키나와인·조선인 식으로 민족별로 분류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오늘의 하와이에서 일본계와 오키나와계 미국인들은 명백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 두 문화의 상호소통은 대단히 활발하다. 하와이 사회가 이민자 사회 특유의 개방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2차대전 이후에는 민족간 통혼이 상당히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계 미국인들은 오키나와 문화의 독자성과 전통에 대한 강한 열망과 자부심을 보존하고 있다. 사멸해가는 오키나와어를 보존하기 위한 운동도 활발하고, 하와이와 오키나와 간 학생들의 교환교육 프로그램 역시 활발하며, 오키나와의 산신과 하와이의 훌라춤이 각각의 섬에서 활발하게 연주된다.

데이빗 이게가 하와이 주지사에 당선되던 날, 오키나와 현지 언론은 후텐마 기지의 ‘현외 이전문제’에 대해 오키나와 주지사가 의견교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예측이 실현될지 더 지켜볼 시점이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racan@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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