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 하락, 중국·러시아 ‘희비 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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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유가 시대의 승자로 꼽히는 나라는 중국과 인도다. 반면에 국가 수입의 70%를 에너지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는 유가가 배럴당 1달러 떨어질 때마다 20억 달러씩 수입이 줄어든다.

최근 호주를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의 전략비축유 보유분을 단계적으로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유사시에 대비해 쌓아두는 전략비축유는 어느 나라나 갖고 있으며 국제에너지기구(IEA) 등은 이런 통계들을 바탕으로 세계 에너지 수급을 추산한다. 하지만 중국이 비축유 규모를 밝힌 적은 없었다.

중국 국가통계국은 시 주석이 약속한 대로 11월 27일 비축유 규모를 공개했다.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중국 내 4곳의 비축고에 1243만톤, 9100만 배럴 분량의 석유가 보관돼 있다. 중국 정부가 당초 목표로 했던 것보다 비축유 규모가 근래 크게 늘어난 것이라고 로이터통신 등은 보도했다. 중국 정부는 ‘15일간 쓸 수 있는 규모’의 비축유를 두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어느샌가 30일치로 늘었다는 것이다. 중국은 향후 2~3년 안에 비축유 규모를 90일분으로 늘릴 것으로 로이터는 내다봤다.

11월 27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린 OPEC 회의 직전 알 나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이 기자들에게 말을 하고 있다. | 빈/AP연합뉴스

11월 27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린 OPEC 회의 직전 알 나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이 기자들에게 말을 하고 있다. | 빈/AP연합뉴스

중국이 비축유 규모를 늘릴 수 있었던 것은 저유가 덕분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10월 중국이 월 수입량으로는 최대 분량의 원유를 사들였다고 보도했다. 경제성장률이 조금씩 둔화되고 있는데도 중국은 계속 기름을 사들이고 있다. 기름값이 쌀 때 비축유를 쟁여놓기 위해서다. 지난 6월 이후 국제유가는 30% 이상 떨어졌다.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세계가 차츰 벗어나고는 있으나, 회복세가 그리 빠르지는 않다. 심지어 유럽은 2009년 이후 세 번째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걱정마저 나온다. 미국은 실직자 수가 줄며 회복으로 향하고 있으나 셰일가스 붐 덕에 석유 수입을 줄이고 있다. 기름값이 계속 떨어지는 것은 이런 요인들이 합쳐져서다.

저유가 시대의 승자와 패자를 놓고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온다. 이견 없이 승자로 꼽히는 나라는 중국과 인도다. 전략비축유 외에도 중국의 거대 에너지기업들은 저유가를 틈타 막대한 원유를 사들이고 있다. 국영 석유회사인 중국석유가스공사(CNPC)는 랴오닝(遼寧)성 진저우(錦州)에 원유를 쟁이고 있는데, 2016년까지 1890만 배럴 규모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CNPC의 석유거래 부문 계열사 차이나오일은 지난 10월 중동 원유 2400만 배럴을 사들였다. 인도는 석유 소비량의 75%를 수입해 쓰고 있으며, 석유 수입이 재정적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해왔다. 저유가가 계속되면 올 연말까지 인도 정부는 서민·빈민들에게 주는 연료보조금을 25억 달러 정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비축유 등 막대한 원유 사재기
러시아는 국가 수입의 70%를 에너지 수출에 의존한다. BBC방송에 따르면 러시아는 유가가 배럴당 1달러 떨어질 때마다 20억 달러씩 수입이 줄어든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10월 러시아의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을 0.5%로 낮췄다. 이전 전망치는 1.5%였는데, 우크라이나 사태 뒤 서방의 경제제재와 유가 하락이 맞물려서 하향조정된 것이다. BBC는 “러시아는 심한 압박을 받고 있지만 간신히 균형을 맞춰나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러시아는 4540억 달러 규모의 여유자금을 쌓아두고 있어, 당분간은 유가 하락의 쿠션(완충장치)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중동 산유국들의 기상도는 엇갈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유가 하락세로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바레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이 재정적자에 직면하게 됐다고 지난 25일 전했다. 이들 국가는 석유 수출 외에는 별다른 산업이나 수입원이 없다. 자원을 팔아 번 돈으로 권위주의적인 왕정이 국민들에게 식량과 보조금 등을 지급해온 나라들이다. 기름값이 낮은 상태가 이어지면 정부 수입이 줄고 국민들에게 베풀었던 ‘시혜’도 줄여야 한다. 오만이나 바레인 같은 작은 나라들에서는 이 때문에 ‘제2의 아랍의 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온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내에서는 산유량을 줄여 기름값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지만 사우디가 버티고 있다. 사우디는 유가를 올렸다가 자칫 셰일가스에 시장 지분을 빼앗길까 두려워한다. OPEC는 회원국들의 산유량을 쿼터로 정해 규제한다. 카타르나 쿠웨이트처럼 걸프 산유국들 중 예비자금이 충분한 나라들 역시 저유가 타격을 피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반면 이란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자원 매장량은 많지만, 서방의 제재로 원유 수출량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기름값에 발목 잡힌 이란이 향후 핵 협상에 더욱 절박하게 매달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비잔 남다르 장가네 이란 석유장관은 26일 OPEC 각료회의 참석차 오스트리아의 빈을 찾았을 때 “모든 전문가들은 석유가 시장에 초과공급되고 있다고 본다”며 감산을 적극 주장했다. 베네수엘라와 멕시코도 산유량을 줄이자는 쪽이었다. 베네수엘라는 지난해 이미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17%에 이르렀다.

10월 14일 바레인의 유전에서 석유 펌프가 석유를 뽑아내고 있다. | 사키르/AP연합뉴스

10월 14일 바레인의 유전에서 석유 펌프가 석유를 뽑아내고 있다. | 사키르/AP연합뉴스

생산량 감축, 중동 산유국 찬반 갈려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저유가의 최대 승자는 세계 경제 자체”라고 평가했다. 기름값이 10% 떨어지면 세계 전체의 GDP가 0.2% 올라가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유가가 낮아지면 물가가 덜 오르고,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는 세계의 극빈층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될 수 있다. 연료보조금 때문에 재정압박을 받는 나라의 정부들에는 기름값이 싸지는 것만큼 반가운 일이 없다. IEA는 전 세계에서 연료보조금으로 나가는 돈이 저유가 덕에 연간 5500억 달러에서 4000억 달러로 감소할 것으로 내다본다.

에너지를 주로 수입해 쓰는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들에도 유가 하락이 희소식일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은 2009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의 여파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했고, 디플레 기운마저 감돌고 있다. 에너지 기업들의 주가가 떨어지면서 증시가 흔들리는 현상이 벌써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유가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알 수 없다. 유가는 석유소비량에다 ‘안보 프리미엄’이 더해져서 결정된다. 유전지대를 둘러싼 리비아의 내전, 지지부진한 이란 핵 협상, 이라크·시리아 극단조직 이슬람국가(IS)의 세력 확대 같은 불안요인들이 언제라도 유가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다. 미국 자산관리회사 얼라이언스번스타인의 에너지분석가 제러미 테일러는 비즈니스인사이더 27일자 기고에서 향후 몇 달 안에 사우디도 감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면서 “그렇게 되면 북해산 브렌트유 값도 덩달아 올라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구정은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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