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해외자원개발

MB 성과주의가 낳은 ‘재앙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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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지경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안에 석유공사를 다섯 배로 키우라”고 지시한다. MB정부의 무모한 해외자원개발의 서막을 알리는 말이었다. 쏟아부은 41조원 중 회수된 건 고작 5조원, 8조원은 이미 허공에 날렸다. 앞으로 31조원이 더 들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명박 정부는 해외자원개발에 무려 41조원이나 투입했다. 새정치민주연합 ‘MB정부 국부유출 자원외교 진상조사위원회’에 따르면 41조원의 투자금액 중 지금까지 5조원만 회수했고 8조원을 허공에 날렸다. 나머지 28조원 중에서도 얼마나 회수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 들어갈 돈도 만만치 않다. 사들인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31조원이 더 든다.

캐나다 석유기업 하베스트 유전. | 경향신문 자료

캐나다 석유기업 하베스트 유전. | 경향신문 자료

여야가 사활을 걸고 싸우고 있는 이른바 무상복지 예산은 이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전국의 모든 초·중학생들에게 1년 동안 공짜로 밥을 먹이는 돈은 1조9619억원(무상급식 예산)이며, 박근혜 정부가 반대하고 있는 유치원 학비와 어린이집 보육료 등 무상보육 예산은 2조1174억원이다.

이명박 정부 당시 야심차게 추진했던 해외자원개발이 천문학적인 혈세를 낭비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초기 서슬 퍼렇던 최고권력 앞에서 어느 누구도 해외자원개발 사업을 “안 된다”며 막은 사람은 없었다.

MB, 황당한 불도저식 정책 추진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3월 지식경제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한국석유공사를 임기 안에 다섯 배로 키우라”고 지시했다.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이 대통령의 ‘불도저식 정책’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대통령의 이 한 마디는 정부와 에너지 공기업의 가이드라인이 됐다. 당시 정부는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우선 덩치를 키우라”고 공기업에 주문했다. 한국석유공사·한국가스공사·한국자원광물공사 등 공기업들은 앞다퉈 대형화 계획을 쏟아냈다.

하루 5만 배럴 규모의 원유(세계 93위)를 생산하는 석유공사를 5년 안에 30만 배럴(세계 60위)까지 끌어올리겠다는 황당한 계획도 이때 나왔다.

석유공사는 목표 달성을 위해 기존의 탐사위주 사업에서 해외기업을 적극적으로 인수·합병(M&A)하는 전략으로 바꿨다. 석유공사 관계자는 “당시에 석유공사는 중국 회사와의 원유개발업체 인수 경쟁에서 번번이 패했다”며 “위기의식을 느낀 석유공사는 국제시장에 매물로 나온 기업들을 충분한 검토 없이 인수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다른 공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진상조사위 전순옥 의원에 따르면 성과에 집착한 김신종 광물자원공사 사장은 호주의 와이옹 탄광개발권을 확보하기 위해 무허가 로비스트를 앞세워 호주 유력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불법적인 로비활동을 벌이다 호주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국제적인 망신을 겪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12월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지식경제부 업무보고에서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 연합뉴스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12월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지식경제부 업무보고에서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 연합뉴스

이명박 정부는 또 공기업에 에너지 자주개발률 목표치를 부여했다. 자주개발률이란 국내 공기업·민간기업이 해외에서 개발하는 원유·가스 등 생산량을 국내 소비량으로 나눈 값으로, 한 나라의 에너지 자립도를 측정하는 지표다.

정부는 2010년 12월 ‘제4차 해외자원개발 기본계획’을 통해 2009년 9.0%인 원유·가스 자주개발률을 2019년까지 3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자주개발률은 공기업 사장들에게는 족쇄나 다름없었다. 자주개발률이 기획재정부가 매년 평가하는 공공기관장과 공공기관 평가의 핵심 지표가 됐기 때문이다.

공기업 사장 자기사람 심어 맹목적 충성 강요
이에 따라 공기업 사장들은 해외자원개발을 통한 자주개발률 높이기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기관장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으면 자리를 내놓을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직원들도 자주개발률 높이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기관평가 성적에 따라 직원들에게 지급되는 인센티브가 0∼250%까지 차이가 났다.

한 공기업 노조 관계자는 “당시 공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주개발률을 높이는 것이 지상과제였다”며 “이런 과정에서 노조도 경영진의 무리한 해외투자 결정에 대해 제대로 견제를 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더구나 이명박 대통령은 에너지 공기업 사장들을 모두 자기 사람으로 앉힘으로써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했다.

‘이명박 대통령 집사’로 불리는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이 2012년 11월 3일 서울 서초동의 내곡동 특별검사팀 사무실로 출석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이명박 대통령 집사’로 불리는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이 2012년 11월 3일 서울 서초동의 내곡동 특별검사팀 사무실로 출석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당시 석유공사의 강영원 사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로 있었던 소망교회 인맥이었다. 주강수 가스공사 사장은 현대종합상사, 현대자원개발 대표를 지내는 등 ‘현대맨’으로 이명박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웠다. 김신종 광물자원공사 사장은 TK(경북 안동, 경북고) 출신으로 이 대통령과 고려대 선후배 사이였다.

공기업의 경우 해외에 투자할 때 이사회가 최종 의사결정기구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사회 의장은 사장이 겸임했기 때문에 이사회는 사장의 거수기나 다름없었다. 일부 이사들은 투자 결정과정에서 이의를 제기했지만 이미 결정된 사안을 갖고 형식적인 이사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공기업 사장들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새정치연합 등 야당은 이명박 정부의 해외자원개발을 권력형 비리로 인한 국부유출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회의 국정조사가 꼭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국정조사를 통해 천문학적인 규모의 국민 혈세를 낭비하고, 에너지 공기업을 ‘빚더미’로 몰아넣은 책임자와 경위를 반드시 밝히겠다는 것이다.
진상조사위는 해외자원개발 과정에서 당시 실세들과 정치인·관료들이 일정한 역할을 했고, 자원 브로커 등 비선라인도 개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야당이 국정조사에서 겨냥하는 자원외교 실패의 ‘핵심 5인방’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상득 전 의원, 박영준 전 지직경제부 제2차관, 최경환 경제부총리,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다.

진상조사위에서는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자원외교를 총괄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반드시 증언대에 서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볼리비아, 나미비아 등을 방문하며 자원외교를 주도했던 또 다른 ‘몸통’인 이상득 전 의원, 지식경제부 차관과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으로 재직하면서 자원외교의 행동대장 역할을 했던 박영준 전 차관의 책임도 크다고 보고 있다.

진상조사위에 따르면 박 전 차관은 국무차장 당시에 공기업 임원들을 직접 불러 비공식 회의를 열고 자원개발 성과를 점검했다. 진상조사위 관계자는 “당시 박영준 국무차장은 평상시에는 격주로, 이명박 대통령이 자원외교차 외국으로 순방할 때는 매주 토요일마다 공기업 임원들을 불러 모임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며 “박 차장이 비록 사적으로 모임을 주도했지만 참석하는 인사들은 정부가 주도하는 모임으로 알고 참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당시 자원개발사업 담당부서인 지식경제부 장관을 지냈던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청와대와 정부를 연결하는 청와대 지식경제비서관을 지냈던 윤상직 산업부 장관도 공직자로서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다.
공기업이 해외자원개발사업에 참여할 때는 반드시 사전에 정부에 보고하고,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은 후에 사업에 착수한다. 해외자원개발사업법에도 이 같은 조항이 명시돼 있다.

지경부서 수시로 실적 점검 압박감
당시 공기업 관계자들은 지경부 실무진이 수시로 공기업과 연락하며 실적을 점검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겉으로는 해외자원개발사업을 공사가 단독으로 결정하도록 돼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연말로 갈수록 정부의 공기업에 대한 실적 압박이 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진상조사위는 공기업의 해외자원개발 승인과정에서 당시 지경부 장관이었던 최경환 부총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혀야 한다는 입장이다.

진상조사위는 ‘이명박 대통령의 집사’라고 불렸던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개입했는지를 밝히는 데도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해외자원개발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히는 것이 석유공사의 캐나다 유전 개발업체인 하베스트와 자회사 인수다. 최근 석유공사는 정유를 담당했던 하베스트 자회사인‘날’(NARL)을 매각했다. 석유공사는 2009년 12월 인수할 당시부터 지금까지 약 2조원의 거액을 투입했다. 하지만 석유공사에 들어온 돈은 200억원으로 투자금액의 1%밖에 건지지 못했다.

당시 석유공사는 부실 덩어리인 ‘날’을 47%의 프리미엄까지 얹어주고 샀다. 원래 석유공사는 정관상 정유사업을 하지 못하게 돼있었는데도 하베스트와 함께 일주일 만에 ‘날’의 매입을 결정했다.

석유공사는 하베스트 등 4건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투자자문사인 메릴린치로부터 투자자문을 받았다. 하지만 석유공사의 자문사 선정이 석연치 않다. 하베스트 인수 자문사 선정과정에서 메릴린치는 1·2차에 걸친 계량평가에서는 각각 5위(10개사 참가)와 3위(4개사 참가)를 했다. 하지만 석유공사 내부인사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평가하는 비계량평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자문사로 선정됐다. 메릴린치의 서울지점에는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아들인 김형찬씨가 있었다. 메릴린치는 4건의 자문료로 총 248억원을 챙겼다. 진상조사위 부좌현 의원은 “메릴린치가 석유공사에 제출한 자문제안서에 상무 직함으로 김형찬(Peter Kim)씨가 명시돼 있었다”며 “김형찬씨가 메릴린치에 입사한 후 석유공사의 자문사 선정에서 특혜의혹이 있었는지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진상조사위는 다급해진 공기업들이 현지 브로커의 감언이설에 속아 투자한 곳도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진상조사위 관계자는 “해외 현지에 있던 기업인들은 우리 정부가 자원외교 성과 내기에 급급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며 “이들이 우리 해외공관이나 공기업 지점을 찾아가서 브로커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야당의 요구대로 국정조사로 이어질지는 불분명하다. 새누리당은 이와 관련해 검찰 조사와 감사원 감사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먼저 지켜보고, 결과가 미흡하면 그때 가서 논의하자는 입장이다.

공기업 내부에서는 해외자원개발을 지금과 같이 무차별적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터져나오고 있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세계적인 메이저 회사들도 자원개발사업을 할 때 성공할 확률은 20% 미만”이라며 “민간기업이 아닌 공기업으로서 어느 정도 실패를 감수하고 국가를 위해 자원개발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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