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화’로 결집한 신기지 건설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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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오키나와’라는 구호는 ‘섬 전체 투쟁’의 과정에서 확인된 오키나와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단지 대항적 차원에서의 항의나 요구가 아니라 주체적 차원에서의 ‘저항’과 ‘자기결정권’의 문제로 전환하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11월 16일의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서 무소속 시민후보인 오나가 다케시 후보가 승리했다. 10만표 차가 넘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개표가 진행된 직후인 오후 8시에 오키나와의 양대 지역언론인 <류큐신보>와 <오키나와타임스>는 오나가 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하는 호외를 내보냈다.

현지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동영상 링크에서는 상기된 표정으로 당선의 변을 말하고 있는 오나가 후보와 대조되는 침통한 표정의 나카이마 히로카즈 지사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이날 하루는 오키나와인들이 마음 놓고 전통주인 아와모리를 마시면서 밤새도록 자축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나가 후보의 당선은 무엇보다도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오키나와의 압도적인 여론에 기반한 것이지만, ‘올 오키나와’라는 선거전략도 주효했다고 판단된다. 보수와 혁신, 여당과 야당이라는 종래의 정치적 진영논리를 해체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번 선거에서 연립여당인 공명당이 자유투표 원칙을 천명한 이유 역시 ‘올 오키나와’라는 오나가 진영의 선거전략에 공감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추측된다.

‘섬 전체 투쟁’과 비슷하면서도 달라
‘올 오키나와’라는 구호는 이전부터 오키나와적 항쟁의 중요한 개념이었던 ‘섬 전체 투쟁’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올 오키나와’나 ‘섬 전체 투쟁’이 오키나와 현민들의 대동단결과 집단적인 문제제기를 담고 있는 것은 동일하지만, 어떤 개념에는 역사성이 드리우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미세하면서도 강력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섬 전체 투쟁’이 명확한 사회운동의 개념으로 등장한 것은 미국이 행정권을 장악했던 점령기와 1972년 이전의 류큐민정부 시기의 토지투쟁에서 찾을 수 있다. 2차대전 과정에서 오키나와를 점령·지배한 미군은 오키나와 현민들의 토지를 총칼과 불도저로 강제수용해 기지를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오키나와인들이 조상 전래의 토지와 거주지를 상실하였으며, 이 강제적인 토지 수용에 반대해 토지 반환을 요구하는 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했는데, 이것이 ‘섬 전체 투쟁’의 시작이었다.

미국의 통치가 오키나와인들의 인권과 생존권을 강하게 제약하던 상황에서, 일본 열도와 분리된 오키나와인들은 이른바 ‘조국 복귀운동’을 강력하게 전개시킨 역사를 갖고 있는데, 이 역시 ‘섬 전체 투쟁’의 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한 국외자의 시선 속에서 나는 왜 오키나와가 1972년에 일본으로의 복귀를 선택했는지 의문이 이는 경우가 사실 많았다. 특히 당시 혁신계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오키나와적 상황에서 왜 교원노조를 중심으로 대다수의 오키나와인들이 ‘일본 복귀’를 추진했는지 의문스러웠다.

이러한 일본으로의 복귀 또는 자발적 재귀속에 대해 그간 오키나와 지식인들과 시민들은 평화헌법으로 상징되는 전후 일본 체제를 신뢰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헌법의 제9조에 명시되어 있는 군대 보유의 금지, 영구적인 전쟁의 포기라는 조항을 말 그대로 신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일본 복귀’에 대한 충분한 명분이 된다. 하지만 평화헌법의 조항은 오키나와가 일본으로의 복귀를 열망하던 그 시점 이전부터 사실상 균열되어 있었다. 일본은 한국전쟁 직후 자위대를 창설해 냉전에 대항하기 위한 군비를 일찍부터 강화했고, 복귀운동이 벌어지던 시점 자체가 베트남전쟁의 수렁으로 미국이 빠져들고 있던 시점이었다. 일본이 배후에서 이 전쟁을 후방지원하고 있었음을 오키나와인이라 해서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의 지식인과 교원노조를 포함한 사회운동 세력이 일본 복귀를 한 치의 회의 없이 밀고 나갔다는 것은 이제는 경제대국이 된 ‘야마토’에 대한 환상이 끈질겼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불어 오키나와의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교사집단의 문제까지 거론될 수 있다. 오키나와의 교사집단은 오키나와 전쟁 당시 황민화 교육에 앞장서 그 어느 집단보다 일본에 대한 충성심과 향수가 높은 집단이었다. 역사의 정의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황민화 교육에 앞장선 이들 교사집단은 교육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미국의 류큐민정부 당국은 전후 오키나와 복구과정에서 이들이 계속 교육계에 남아 있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때는 바야흐로 냉전기로 접어들었기에 ‘일제 잔재의 청산’보다는 냉전에 대항하는 반공주의의 구축이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구가 아닌 자기결정권 문제로 전환
일본 복귀운동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60년대 후반에 이르면 이들 교사집단을 포함한 오키나와의 지식인들은 원로급의 리더로 성장했다. 일본 본토의 혁신계 운동에 영향을 받은 젊은 교사집단도 형성되었지만, 이들 원로급의 구 황민화 교육 주체들의 발언권과 영향력을 인위적으로 축소시킬 수는 없었다. 강한 애국주의와 일본적 민족주의의 잔재를 처리할 수 없었던 교사집단에 일본으로의 복귀는 본래적 ‘조국’에의 복귀라는 어떤 해방적 이미지로 비쳐졌을 것이며, 이것이 대중들의 ‘평화헌법’의 명목적 가치에 대한 비현실적인 선망과 상승작용했다. 그리고 결국 ‘일본 복귀론’은 현실이 되었다.

진정으로 오키나와인들이 ‘우치난추’로서의 자기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본토의 ‘야마톤추’와의 차이를 자각한 것은 1995년 미군에 의한 소녀 폭행사태 이후에 전개된 사회운동의 확산 이후일 것이다. 일본 복귀 후 기지문제가 상당 부분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던 오키나와인들은 거꾸로 본토의 기지가 오히려 오키나와로 대거 이전되는 기묘한 현실을 목도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전전의 오키나와 차별이 전후의 구조적 차별과 연동되어 있음을 역시 자각하게 되었다. 가령 교과서 기술에서 일본군에 의한 ‘강제집단사’ 문제를 삭제하라는 문부성의 방침 등에서 그들은 ‘야마토’ 일본과 ‘우치나’ 오키나와의 명백한 차이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사안들에 대해 오키나와인들은 또다시 ‘섬 전체 투쟁’의 형태를 띤 ‘현민대회’ 등으로 가파르게 맞섰다.

‘올 오키나와’라는 구호는 ‘섬 전체 투쟁’의 과정에서 확인된 오키나와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단지 대항적 차원에서의 항의나 요구가 아니라 주체적 차원에서의 ‘저항’과 ‘자기결정권’의 문제로 전환하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올 오키나와라는 구호는 단일하지만, 거기에는 ‘자치’, ‘자립’, ‘독립’이라는 층위가 다른 ‘주체화’의 요구가 혼재되어 있다. 오키나와의 ‘자기결정권’의 행로가 ‘자치’로 귀결될 것인지, 아니면 ‘독립’으로 급진화될 것인가의 여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racan@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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