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클레망 5세의 와인 ‘샤토 파프 클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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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망 5세는 프랑스 필립왕의 세속적인 권력에 굴복하여 로마에 부임하지 않고 아비뇽에 새로운 교황청을 만든 장본인이었지만 와인산업에서는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보르도 시 남쪽 가론강 좌안은 오메독에 못지 않은 명품 와인 생산지다. 특히 보르도 시에 인접해 있는 그라브 지역의 페삭과 레오냥은 레드 와인의 중심지이며, 건조한 모래와 자갈이 뒤섞여 있는 토양으로 예부터 소나무 숲으로 유명하다.

필자는 아침 일찍 클레망 5세가 교황이 되기 전 보르도의 대주교 시절에 와인을 재배했던 ‘샤토 파프 클레망’을 방문하기 위해 페삭을 가로지르는 아르카숑 옛 가도를 달렸다. 옛날에는 한가로운 교외였으나 보르도 시의 일부가 된 지금도 익어가는 포도밭 너머에 펼쳐져 있는 짙푸른 소나무 숲은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가는 길에 잠시 메독의 그랑크뤼 1등급 5대 샤토 중 하나인 ‘샤토 오브리옹’에 들렀다. 아침부터 중년층의 일본 단체관광객이 버스에서 내려 기념촬영에 열심이었다. 이제 일본의 관광 트렌드가 단순한 방문지여행에서 테마관광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855년 메독 이외 지역에서 유일하게 1등급 그랑크뤼로 분류된 그라브 페삭 지역의 ‘샤토 오브리옹’.

1855년 메독 이외 지역에서 유일하게 1등급 그랑크뤼로 분류된 그라브 페삭 지역의 ‘샤토 오브리옹’.

보르도 와인 또 하나의 자랑 오브리옹
오브리옹은 1855년 그랑크뤼 등급제도를 도입할 때 메독 이외의 지역에서 유일하게 1등급 그랑크뤼에 선정된 곳이다. 그 이유는 메독이 와인산지로 유명해지기 훨씬 전인 14세기 때부터 이곳은 이미 보르도를 대표하는 명품 와인산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브리옹은 오메독 지역의 그랑크뤼 와인 맛과는 구별된다. 향이 강하지는 않지만 균형이 잡혀 있으면서도 힘과 농후함을 느낄 수 있는 야성적인 와인이다. 길 건너편에 있는 ‘샤토 라미숑 오브리옹’도 오브리옹에 비견되는 그랑크뤼 와인이다. 이밖에 ‘르 카르므 오브리옹’이나 ‘피크 카이유’는 AOC 등급이지만 그랑크뤼에 버금가는 와인을 생산한다.

전호에서 설명했던 그랑크뤼, 크뤼 부르주아 등급체계와 함께 오늘날 세계 와인산업에서 프랑스 와인이 높은 위상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원산지통제명칭(AOC) 제도의 도입이라 할 수 있다. 1935년에 도입해 4개 등급으로 이루어진 AOC 제도는 생산지역, 포도품종, 수령, 식재밀도, 수확량, 알코올도수, 양조방법 등이 생산지역 및 정해진 법규에 따라 결정된다.

보르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의 하나인 그라브 페삭 지역의 그랑크뤼 ‘샤토 파프 클레망’. 14세기에는 교황 클레망 5세의 소유였다.

보르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의 하나인 그라브 페삭 지역의 그랑크뤼 ‘샤토 파프 클레망’. 14세기에는 교황 클레망 5세의 소유였다.

4개 등급은 최고 등급인 AOC부터 VDQS(우수품질범위제한 와인), Vins de Pays(지방명칭 와인), Vins de Table(테이블 와인)로 구분되지만, 일부 낮은 등급의 와인 중에는 크뤼 등급과 마찬가지로 AOC급을 능가하는 훌륭한 와인도 많이 있다. 그것은 관련 법규와 승인 과정이 복잡하고 일부 와인메이커는 자신만의 개성 있는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AOC 등급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주요 AOC 생산지역은 지롱드강 하류 좌안 북쪽에서부터 메독 북부, 생테스테프, 포이약, 생줄리앙과 마고가 있는 오메독, 보르도 시 남쪽 페삭-레오냥을 포함한 그라브, 가론강 동쪽에 있는 앙트르 뒤 메르, 스위트 와인의 대명사인 소테른, 바르삭, 그리고 지롱드강 상류 도르도뉴강 우안에 자리한 생테밀리옹과 포므롤이다.

보르도 와인은 약 12만ha에서 1년에 약 9억6000만병을 생산하며 현재 AOC 등급은 60여개로 전문가도 보르도 와인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보르도의 그랑크뤼 등급제도는 바로 이 AOC 와인들 중에서 별도로 최고 와인을 다시 한 번 분류한 것이다.

마을 밖을 벗어나자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가을 단풍과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고색창연한 샤토의 모습이 나타났다. 교황 클레망 5세가 대주교 시절 포도를 재배했던 ‘샤토 파프 클레망’이다.

로마시대에 심어진 ‘샤토 파프 클레망’의 수령 1800년이 넘은 올리브나무.  스페인에서 이식해 왔다.

로마시대에 심어진 ‘샤토 파프 클레망’의 수령 1800년이 넘은 올리브나무. 스페인에서 이식해 왔다.

로마로 안 가고 ‘아비뇽 유수’ 시대 열어
클레망 5세는 프랑스 필립왕의 세속적인 권력에 굴복하여 로마에 부임하지 않고 아비뇽에 새로운 교황청을 만든 장본인이었지만 와인산업에서는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명품 와인으로 떠오르고 있는 남부 론의 ‘샤토네프 뒤 파프’ 와인이 바로 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1305년부터 70년 동안 계속되었던 아비뇽 시대를 후세 사가들은 고대 유대인이 바빌론에 강제 이주된 고사에 비유하여 ‘아비뇽 유수’라고 한다. 개발사업 담당이사인 어거스틴 드샹의 친절한 안내로 교황 클레망의 관이 전시되어 있는 오래된 지하 셀러와 로마제국 시대의 수령 1800년이 넘은 올리브나무들이 있는 정원을 구경하였다.

샤토 클레망은 1252년 최초로 포도를 수확한 이후 교회와 프랑스 정부를 거쳐 현재는 열정적인 미국인 와인사업가 베르나르 마그레의 소유가 되었다. 전 세계에 40개가 넘는 샤토를 소유하고 있는 그는 보르도에만 ‘샤토 파프 클레망’을 포함하여 ‘샤토 라 투르 카르네’, ‘퐁 브로쥬’, ‘클로 오 페라게’ 등 4개의 그랑크뤼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다.

그랑크뤼 와인 ‘샤토 파프 클레망’의 지하셀러에 저장되어 있는 오래된 와인들.

그랑크뤼 와인 ‘샤토 파프 클레망’의 지하셀러에 저장되어 있는 오래된 와인들.

과일향의 완벽한 하모니, 화이트 와인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샤토를 바라볼 수 있는 예술적인 현대 건물에서 2007년산 레드 와인과 2009년산 화이트 와인을 시음하였다. 1959년에 그라브의 그랑크뤼 와인으로 분류된 레드 와인은 1985년 빈티지부터 매년 최고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메독에 비해 멜롯의 배합비율이 다소 높지만 풀바디에 깊고 풍부한 질감과 오랜 잔향이 이곳 와인의 스타일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에게 인상적이었던 와인은 오히려 소량 생산하고 있는 화이트 와인 2009년산이었다. 소비뇽 블랑 40%, 세미용 35%, 소비뇽 그리 16%에 뮈스카델 9%를 배합한 이 와인은 허니듀, 벌꿀, 레몬껍질 향과 신선하면서도 잘 익은 과일향의 복합적인 하모니가 완벽함을 자랑하였다. 이런 와인이 아직 그랑크뤼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필자가 이 와인에 크게 감동하자 드샹 이사는 이곳에서 약 1시간 거리로 유럽 최대의 사구(모래언덕)인 ‘필라 쉬르 메르’에 있는 ‘라 코니스’에서 굴과 함께 이 와인을 마셔볼 것을 권하였다. 지금 막 굴 시즌이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친절하게 직접 예약까지 해주었다. 그곳은 필자가 Wine MBA 시절 방문한 적이 있는 보르도 인근의 관광명소다. 계획에 없었지만 석양에 물든 사구의 풍경, 싱싱한 대서양의 굴과 향기로운 와인을 상상하면서 아르카숑 만을 거쳐 대서양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80㎞를 달려 도착하였다.

힘들게 주차를 하고 언덕에 오르니 막 석양에 물든 대서양을 배경으로 원시상태의 광활한 모래사장과 그 높이가 무려 110m에 달하는 모래언덕인 ‘뒨 뒤 필라’가 500m 폭으로 2.7㎞ 뻗어 있는 대장관을 연출하였다.

유럽 최대의 사구(모래언덕)인 보르도 인근 대서양 연안 Pylar-Sur-Mer의 석양.

유럽 최대의 사구(모래언덕)인 보르도 인근 대서양 연안 Pylar-Sur-Mer의 석양.

레스토랑 ‘라 코니스’는 호텔과 함께 사구의 끝자락에 위치해 이 아름다운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레스토랑 출입구 바닥에는 사람보다 큰 체스 판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운동장만큼이나 큰 규모의 테라스에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차 있는 손님들과 그 너머로 펼쳐진 석양의 풍경이 다시 한 번 필자를 압도하였다. 필자도 그들의 일부가 되어 이곳 특산물인 굴과 각종 어패류에 ‘샤토 파프 클레망 2009’년산 화이트 한 병을 주문하였다. 비릿하지만 기분 좋은 바다냄새를 풍기는 ‘신선한 굴’과 ‘파프 클레망’ 그리고 저물어가는 이곳 ‘사구의 풍경’이 완벽한 하나의 페어링(궁합)이 되었다.

교황 클레망 5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명품 와인 ‘샤토네프 뒤 파프’와 ‘샤토 클레망’이 아직도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지는 밤이었다.

<글·사진 송점종 우리자산관리 대표·Wine MBA j-j-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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