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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난통신망 구축사업 급하다고… 무모한 속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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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후 박 대통령 담화 나오자마자 2조원 넘는 대형국책사업 몰아붙여…

검증도 안 된 통신방식 강행, 예비타당성 조사도 않고 예산 편성 등 주먹구구

총 사업비만 2조원 이상이 들어가는 대형 국책사업인 국가재난안전통신망 사업이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국가재난안전통신망 사업은 대규모 재난 상황에서 경찰·소방관들이 신속히 대응하고 효과적으로 재난관리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통신망 구축사업이다.

하지만 정부는 충분한 검증 없이 지난 7월 재난통신망을 PS LTE(공공안전 롱텀에볼류션) 통신기술 방식으로 결정한 데 이어, 내년에 실시하는 강원도 시범사업에 500억원의 예산을 편성해 자칫 어마어마한 예산낭비만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소방관들이 인천의 한 화재 현장에서 화재 진압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

소방관들이 인천의 한 화재 현장에서 화재 진압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

정부 “2017년까지 사업 완료” 호언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재난통신망 사업의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통합된 재난통신망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경찰·소방방재청 등 재난대응기관들은 각각 다른 시스템을 도입해 무선통신을 해왔다. 경찰은 TRS(디지털 주파수공용통신) 방식의 테트라 단말기를 사용하고 있다. 소방관들의 경우 화재 진압을 할 때는 아날로그 방식인 UHF·VHF 방식의 무전기를 지니고 출동한다. 각 재난기관들이 서로 다른 시스템의 단말기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재난 현장에서 일사불란하게 지휘를 받을 수 없고, 제대로 소통할 수 없는 등 많은 문제점이 노출됐다. 정부는 10여년 전부터 TRS망을 활용하는 테트라 방식으로 일원화된 재난통신망을 구축하려 했다. 하지만 감사원 감사에서 일부 업체에 대한 특혜와 투자비 과다 등의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사업이 멈췄다.

표류하던 재난통신망 사업에 다시 속도가 붙은 것은 세월호 참사 이후 발표한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계기가 됐다. 박 대통령은 5월 19일 담화에서 “11년째 진전이 없는 국가재난안전통신망 구축사업도 조속히 결론을 내서 재난대응 조직이 모두 하나의 통신망 안에서 대응하고 견고한 공조체제를 갖추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의 담화 직후부터 재난통신망 사업은 속도전을 방불케 했다. 기획재정부·안전행정부·미래창조과학부 등이 중심이 돼서 재난통신망 구축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그리고 통신기술 방식 공모→통신기술 방식 선정(PS LTE 방식)→PS LTE 구축사업 관련 공개·비공개 토론회→정보화전략계획(ISP) 설계자 발주 등 5개월 동안 숨가쁜 일정을 이어갔다.

정부가 제시한 일정에 따르면 내년에 평창군·정선군·강릉시 등 2018년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강원도 일원에서 시범사업을 실시한다. 이어 2016년에 충청·전라·경상·제주도 등 8개 시·도에서 본사업이 추진되며, 2017년에는 서울 등 수도권 지역과 5대 광역시에 PS LTE 망을 구축해 전체 사업을 마무리하게 된다.

9·11 악몽 미국은 ‘2020년 목표’ 신중
하지만 정부가 국민의 안전 및 생명과 직결되는 재난통신망 구축계획을 신중한 검토 없이 발표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기술검증도 되지 않은 PS LTE 방식을 국가재난통신망으로 결정한 것과 관련해 졸속으로 이뤄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정부는 불쑥 PS LTE 망을 구축하겠다고 대내외에 이미 약속했다. 만약 기술검증이 늦어져서 국제 표준화 작업이 지연되면 빼도 박도 못한다. 어마어마한 예산을 낭비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PS LTE 방식은 재난통신망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단말기 간 직접통신’(무선통신), ‘기지국 중계기능’, ‘단독 기지국 운용모드’ 등에서 아직 국제 표준화가 끝나지 않았다.

지난 7월 29일 정보화진흥원에서 열린 국가재난안전통신망 공개토론회. | 미래창조과학부 제공

지난 7월 29일 정보화진흥원에서 열린 국가재난안전통신망 공개토론회. | 미래창조과학부 제공

업계와 국제 표준화 협력업체인 3GPP에서는 표준화를 2016년 상반기까지 완료하겠다는 추진일정을 제시하고 있다. 3GPP는 한국·미국·일본 등 6개 기관과 삼성전자·퀄컴 등 총 401개 업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 방식의 국제 표준화가 2016년 안에 끝난다 하더라도 단말기 제조까지는 그 이후에 최소 12개월 이상 걸릴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표준화가 끝난다 하더라도 성능시험 등을 거쳐서 제품화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밝힌 일정대로 기술을 개발하고 기술의 신뢰성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며 “PS LTE 방식의 국제 표준이 나온다 해도 필수 기능이 탑재된 단말기는 일러야 2017년 이후에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만약 단말기가 제때에 공급되지 않는다면 PS LTE망은 당분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마치 고속도로를 깔아놨는데 고속도로 위를 달릴 자동차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정부가 국민의 안전보다는 업계의 말에 휘둘려 무리하게 사업일정을 잡은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한 전문가는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업계에서 재난통신망 구축사업을 좋은 비즈니스로 생각한 것 같다”며 “이 사업이 시작될 경우 이 분야에 노하우가 있는 기존의 통신사와 통신장비 업체들이 수혜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PS LTE 방식을 추진하고 있는 미국, 유럽 등도 선제적으로 나오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지난 9·11사태 때 재난통신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던 미국은 연방정부 차원에서 PS LTE망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총 사업비 7조 달러 중 1조5000억 달러만 확보하는 등 사업이 굼뜨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PS LTE망 구축사업 종료시점을 2020년으로 잡고 있다.

강원도 시범사업도 주먹구구식이다.

이 사업에는 예산을 추산할 수 있는 기본설계도(정보화전략계획)도 없이 500억원의 예산이 편성됐다. 정부는 교환장비 구축 300억원, 기지국 설립 120억원, 단말기 구입 50억원 등을 잡아놓고 있다.

재난통신망 같은 대규모 정보통신망 구축사업은 정보화전략계획(ISP)을 통해 권역별 기지국 설치 수, 구매할 단말기 수와 같은 물량뿐만 아니라 망 구축에 들어가는 구체적인 사업비를 산출해 연차적인 구축계획과 총사업비를 산출하도록 돼 있다. 기획재정부의 ‘2015년도 예산안 편성지침’에도 정보시스템의 구축은 원칙적으로 정보화전략계획 수립 이후에 예산을 요구하도록 돼 있다.

망 표준화 대비 단말기 연구개발부터
그러나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IT업체로부터 받은 정보제공요청서를 토대로 예산을 편성했다. 안행부는 ISP를 지난 10월에 발주했으며, 내년 3월쯤 나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119 구급차에서 국가재난안전통신망을 실험하고 있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

119 구급차에서 국가재난안전통신망을 실험하고 있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

이에 대해 국회 예산정책처는 “안행부가 시범사업비로 편성한 500억원은 정부의 예산안 편성 지침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국가재난안전통신망 사업이 아무리 시급하더라도 총사업비가 2조원 이상 드는 대규모 사업이라는 점으로 볼 때 추진과정에서 면밀한 계획 하에 예산이 편성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예비타당성 조사도 면제받았다. 일반적으로 500억원 규모 이상의 사업을 하기 전에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사회·경제적으로 시급한 추진이 필요한 경우 예비타당성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국가재정법상 예외조항을 적용해 빠져나갔다.

정부 관계자는 “국민의 생명이 달린 사업에 대해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해 경제성을 분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만약 예타를 했으면 과거 테트라 방식이 부적격 판정을 받았듯이 이번에도 예타를 통과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시범사업이 끝날 때까지 전용 단말기를 공급할 수 없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일반용 휴대폰 단말기와 멀티모드 단말기를 사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방안도 보안문제 등 기술적 검증이 필요한 사항이다.

국가재난안전통신망 총사업비가 정부가 추산하는 2조원보다 훨씬 더 많이 들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재난통신망은 인적이 드문 산간, 해안 등 전국 어디에서나 잘 터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이동통신회사들이 세운 상업용 기지국보다 훨씬 많은 기지국을 세워야 한다. 여기에 재난망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단말기·교환기 등 장비에 대한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 일각에서는 PS LTE 구축사업비로 총 5조원 이상이 소요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통신업계 전문가는 “상식적으로 봐도 강원도 3개 지역만 구축하는 비용이 500억원이 드는데, 전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2조원을 훨씬 초과할 수밖에 없다”며 “지금은 2조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지만 앞으로 계속 예산을 증액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차세대 재난통신망 기술방식으로 PS LTE 방식이 국제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검증도 안 된 상태에서 국민혈세를 들여 망부터 깔아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고 있다.

한 전문가는 “정부가 당장 PS LTE 방식으로 국가재난안전통신망을 구축하겠다는 것은 굉장히 무모한 발상”이라며 “이런 계획보다는 3년 동안 단말기 개발 등 연구개발에 우선 집중하고 PS LTE 망 구축사업은 기술이 검증된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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