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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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동안 벌어졌던 축구와 야구 같은 빅 스포츠가 마무리로 치닫고 있다. 이때, 저 드넓은 그라운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일상의 피로를 푸는 공간임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과연 그곳은 억압된 감정을 분출할 만한 공간인가, 아니면 여전히 억압적인 상황에 있는 선수들의 시지포스적 열망이 터져나오는 공간인가.

베버의 ‘탈주술화’에 대한 공세적 연구, 즉 어떻게 근대적 계몽이 히틀러 파시즘과 같은 악령을 낳았는가를 논구하면서 아도르노는 ‘대중의 총체적 기만’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문명 속의 야만, 즉 대규모 전쟁을 일으킨 유럽의 전쟁 상태만이 아니라 망명지 미국에서 목격한 놀라운 광경, 즉 대중문화 산업의 압도적인 영향까지 확인한 아도르노는 스포츠를 비롯한 대중문화 일반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는 “스포츠 행사야말로 전체주의적 대중집회의 모델이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사회적으로 묵인되는 난폭성으로서, 잔인성과 공격의 계기를 권위주의적이고 훈련된 경기규칙 엄수와 결합시킨다”고 분석하였다. “스포츠에는 단지 폭력을 가하려는 열망만이 아니라 스스로 복종하고 감수하려는 열망도 포함”되어 있다고 아도르노는 말하면서 결국 “스포츠는 신체를 기계 자체와 유사하게 만드는 경향을 띤다. 그래서 스포츠는 어디서 조직되든 간에 부자유의 영역에 속한다”고 결론을 맺는다. 전쟁 기계, 욕망의 기계, 도시적 삶 전체가 거대한 기계처럼 변해가는 국면을 아도르노는 스포츠를 통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현대의 국가와 대기업, 미디어는 스포츠 경기장에서 분출되는 감정을 정교하게 통제하거나 극단적으로 부풀려 ‘국민 동원’과 ‘자발적 소비자’의 생산을 노렸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 즉 문화적 속성을 강력한 낙인으로 삼아 국가와 국민을 결정짓는 작용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2003년 9월 이승엽 선수의 홈런 신기록 공을 잡기 위해 팬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경기장을 찾았다. | 정윤수

2003년 9월 이승엽 선수의 홈런 신기록 공을 잡기 위해 팬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경기장을 찾았다. | 정윤수

스포츠가 가진 폭력과 복종의 열망
우리의 경우도 그렇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철저히 조련된 엘리트주의 스포츠 정책으로 시민들의 민족주의 정서를 통치 기반의 자산으로 삼았으며 이는 ‘대한건아’, ‘태극마크’, ‘국위선양’, ‘태릉선수촌’,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등의 수사로 여전히 한국 스포츠의 압도적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때, 스포츠는 국가의 전유물이었다.

여기에 88올림픽과 2002월드컵을 거치면서 자본과 미디어까지 결합하였다. 대규모 대회 때마다 민족주의라는 깃발이 펄럭이고 그 아래에서 자본과 미디어는 팬들을 ‘호갱’으로 만들어버리는 애국 상업주의 전략을 구사한다. 부실한 운영에 더하여 지역경제의 파탄까지 현실화되고 있는 2014인천아시안게임이 그러하거니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해 무려 64조원의 경제유발효과가 가능하다고 발표한 현대경제연구원의 경악할 만한 숫자도 스포츠 국가주의가 여전히 우리의 스포츠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 중요한 것은 스포츠가 일종의 신체 통치의 규율 권력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개인의 몸을 개별적으로 훈련시키고 그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어 길들인 후 효율적인 통제시스템에 통합하는 힘이 곧 규율 권력이다. 미셀 푸코는 <감옥의 탄생>에서 습관, 규칙, 명령 등에 의해 규율화되어 순종적인 몸이 되어 자동적으로 순응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푸코는 ‘자기 감시’(self-surveillance), 즉 이 신체 통치가 외부 압력에 의한 것임에도 당사자는 매우 자발적으로 규율을 내면화한다고 보았다.

현대 스포츠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로써 발생한다. 선수들의 신체는 ‘통제된 몸’이자 사회가 요구하고 강요하는 ‘사회적 몸’으로 재현된다. 기술적 차원에서 보면 현장 지도자들이 선수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 있어 다양한 감시방법이 동원되는데, 그 중 가장 효율적인 것이 선수들 스스로 자신의 몸을 자기 감시체계 안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최근 롯데 구단 파문에서 드러났듯이, 훈련과정에서 몸이 ‘훈육’되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선수들의 사생활까지 직접적으로 ‘감시’해버리는 사태가 버젓이 발생하고 있다.

2013년 3월에 열린 브라질 월드컵 최종예선 한국 대 카타르 경기 당시 관중석. | 정윤수

2013년 3월에 열린 브라질 월드컵 최종예선 한국 대 카타르 경기 당시 관중석. | 정윤수

사생활까지 감시한 롯데구단 파문
이 원리는 단지 스포츠선수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현대 도시의 거의 모든 삶에서 일반적으로 관철된다. 사진작가 오형근은 군인, 중년 남녀, 여고생 등의 전면 입상 사진을 지속적으로 찍으면서 어떻게 특정한 신체 패턴이 개인의 몸에 각인되는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이 같은 싸늘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대 스포츠는 그리고 경기장은 수많은 감정이 넘실대는 거대한 범선과 같다. 리처드 호가트, 레이먼드 윌리엄스, 스튜어트 홀 같은 영국 버밍엄대학교의 학자들이 기존의 영국 문화계를 지배한 ‘고급문화/대중문화’라는 이분법을 부정하고 하위 계급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분석하고 옹호하는 과정에서, 스포츠는 전혀 다른 평가를 얻기도 했다. 고대의 주술이나 중세의 풍년을 염원하는 행위 이상으로 현대의 스포츠 행위에는 억압된 감정의 격렬한 표출에 의한 상징적 저항, 문화적 해방, 집합적 열정이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나 사회학자 에릭 더닝도 이 관점에서 마가릿 대처 같은 우파 정치인들이 ‘문명의 수치’라고 비난한 하위 계급의 열혈 축구팬, 즉 훌리건을 분석하고 옹호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지금 배구와 농구 같은 실내경기가 작렬하는 가운데, 야외에서 한 해 동안 벌어졌던 축구와 야구 같은 빅 스포츠가 마무리로 치닫고 있다. 이때, 그 화려한 경기장과 드넓은 그라운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일상의 피로를 푸는 공간임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과연 그곳이 억압된 감정을 분출할 만한 공간인지, 아니면 여전히 억압적인 상황에 있는 선수들의 시지포스적 열망이 터져나오는 공간인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각 야구단의 사태를 보면서 두 번 세 번 생각하게 된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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