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선거구 재조정 결정 ‘비례대표 축소’로 불똥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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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정수 확대 국민들 정치혐오로 쉽잖아… 비례 의석수 줄여 지역구 늘리자는 주장 제기돼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엉뚱한 곳으로 튀고 있다. 10월 30일 헌재는 3대 1 이하로 되어 있는 현행 선거구별 인구 편차가 위헌이라며, 이 편차를 2대 1 이하로 줄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헌재의 결정에 따라 국회는 2016년 20대 총선 이전까지 선거구 획정을 다시 해야 한다. 헌재의 결정에 따라 현행 선거구 246곳 중 37곳은 인구가 넘쳐 분할해야 하고, 25곳은 인구가 부족해 통합해야 할 상황이다.

의원 정수를 늘린다면 현행 선거제도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팽배한 정치 불신을 감안하면 의원 수를 늘리자고 말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10월 30일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오른쪽)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입장하고 있다. 이날 헌재는 국회의원 선거구별 인구편차를 2대1 이하로 줄이도록 결정했다. | 정지윤 기자

10월 30일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오른쪽)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입장하고 있다. 이날 헌재는 국회의원 선거구별 인구편차를 2대1 이하로 줄이도록 결정했다. | 정지윤 기자

“지역구 의원보다 수준 떨어진다”
의원 정수를 늘리지 못한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비례대표 의석을 줄이고, 그 수만큼 지역구 의원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헌재의 날갯짓으로 비례대표에 태풍이 몰려오는 형국이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의 생각도 그렇다.

이 명예교수는 헌재 판결이 나기 전날 이현우 서강대 교수와 함께 문화일보 대담에 참석해 “비례대표 의석 수를 10석가량 줄이고, 인구가 많이 늘어난 수도권 주변의 지역구 의원을 늘리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라고 제안했다.

이 명예교수는 전화통화에서 “헌재 판결을 예상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면서도 “비례대표 의원들이 지역구보다 수준이 더 떨어진다. 여야 모두 강경파라며 돌출행동을 하는 의원 중 비례가 많았다. 19대 국회는 각 당 비례대표가 다 최악이었다”고 말했다.

이 명예교수는 새누리당 당원 시절 몇 차례 비례대표 제도 개선을 말한 바 있다. 비대위원 시절인 2012년 4월에는 비례대표의 일부를 공모를 통해 모집하자는 제안을 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정치쇄신특별위원 자격으로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권역별 비례대표 제도 도입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 명예교수는 “17대 국회만 해도 나경원, 진수희, 이주호 등 (보수 입장에선) 괜찮은 비례대표 의원이 많았는데 현재 각 당 지도부 모습을 보면… (기대가 안 된다)”며 “비례대표 의원들을 데리고 그 자리 어떻게 얻었느냐고 청문회를 하면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라고 말했다.

특히 비례대표 제도에 대해서는 보수층에서 비판적인 목소리가 높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의원들의 경우 취임 직후부터 지금까지 2년 넘게 종북 논란에 시달려 왔다. 정의당 비례 의원들은 사상 초유의 ‘셀프 제명’을 통해 당적을 옮겼다.

새누리당, 새정치연합의 여러 비례대표 의원들도 부적절한 발언이 여론의 도마에 오른 바 있다.

최근에는 새정치연합 조직강화특별위원이면서 동시에 지역위원장에 공모했던 장하나·남윤인순 의원(비례)으로 인해 “비례 의원들이 전문성을 살린다는 취지가 퇴색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헌재 선거구 재조정 결정 ‘비례대표 축소’로 불똥튀나

비례대표 의원들에겐 분명 눈에 거슬리는 부분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례대표를 줄이거나 없애버린다면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당장 여성·장애인 같은 소수자들의 국회 진입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다양한 계층, 세대, 직업군을 대표할 수 있는 기회도 축소될 공산이 크다.

비례대표 의원들이 지역구 의원에 비해 ‘국민의 대표’라는 측면에서 잘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 소속 전진영 박사는 올해 6월 18대 국회의원들의 법안 발의 내역을 분석한 논문 ‘국회의원의 대표 유형에 따른 정책적 관심과 영향력의 차이 분석’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지역구 의원들은 국토개발, 조세정책 등에 관심이 많은 반면 비례대표 의원들은 노동, 여성가족, 보건복지 등의 정책에 관심이 많았다. 전 박사는 지역구 의원들이 선호하는 분야를 “업적 자랑을 할 수 있는 정책분야”, 이들이 발의한 법안은 “선심 정치를 대표하는 법안”이라고 평가했다.

득표수-의석수 불일치 해소가 더 중요
반면 비례대표 의원들의 법안에 대해서 전 박사는 “광범위한 인구집단을 정책대상으로 하며, 복지정책적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때문에 비례대표제도 자체를 약화시킬 게 아니라, 좋은 자질을 가진 비례 의원들을 골라낼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손정욱 정치발전소 기획위원은 “비례대표 명단 선출과정에서 당원과 국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방식도 있고, 유권자들이 직접 비례 순번을 정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손 위원이 말한 후자의 방식은 네덜란드의 선거제도를 말한 것이다. 네덜란드는 주요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정당 득표율과 의석 비율의 격차가 가장 작은 나라다.

정당명부 비례대표 제도를 통해 국회의원을 뽑는 네덜란드의 유권자들은 투표장에서 정당 비례대표의 명단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 개인에게 투표한다. 많은 선택을 받은 후보일수록 비례대표 당선 확률이 높아진다.

황종섭 비례대표포럼 청년위원은 비례대표 자질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비례대표를 대폭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위원은 “현행 선거제도에서는 비례대표의 비중이 너무 낮기 때문에 언론과 유권자들의 관심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 만약 비례대표 비율이 전체 의원의 50%가량으로 올라간다면 지역구 의원만큼 많은 검증의 시선을 받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의 정치학자 아렌트 레이파르트는 2012년 발표한 <민주주의의 양식> 제2판에서 36개 주요 민주주의 국가의 역대 총선 결과를 토대로 각 국가 선거제도의 불비례성을 표로 제시했다. 불비례성이란 각 정당의 득표율과 실제 의석 비율의 차이 중 최대값을 말하는데, 불비례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민의가 선거 결과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비례대표제의 역사가 긴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은 민심과 선거 결과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식 선거제도의 대안으로 떠오른 독일식 비례대표제(지역구와 정당명부제 혼합방식) 역시 표심과 그 결과의 차이가 3%도 나지 않았다.

반면 미국, 프랑스, 한국 등은 하위권에 들었다. 이들은 비례대표가 거의 없으며, 대통령제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레이파르트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65년간 한국의 표심과 실제 결과는 21.97%나 차이가 났다.

전문가들은 한국 선거제도의 지나친 불비례성을 고치는 것이야말로 헌재 판결의 취지와도 어울린다고 말했다. 황종섭 위원은 “헌재는 표의 등가성을 말했다. 유권자들의 표와 국회 의석 수가 차이나는 것 역시 표의 등가성에 크게 위배된 것”이라며 “정치 불신 분위기가 있다곤 하나 이번 판결을 계기로 전체 의석수를 늘리는 논의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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