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탄소차 협력금제, 결국 ‘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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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월 시행 사실상 무산… 국내재계 반발과 미 통상압력 영향

저탄소차 협력금제의 내년 1월 시행이 사실상 무산됐다. 이 제도는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차량 구매자에게 부담금을 부과하고, 이산화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차량 구매자에게는 보조금을 주는 것이다. 중대형차 위주의 국내 자동차 소비문화를 바꾸고 전기차, 하이브리드차 등 친환경차 보급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2009년 7월 도입이 확정된 저탄소차 협력금제는 당초 지난해 7월 시행 예정이었다. 환경부는 이를 위해 1515억원의 예산까지 마련해뒀다. 하지만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통상압력과 국내 완성차업계의 반대로 지난해 초 시행시기가 2015년 1월로 연기됐다.

8월 27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정문 앞 한국환경회의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환경운동가들이 최근 당·정·청 협의를 통해 오는 2015년에서 2021년으로 시행이 연기된 저탄소차협력금제의 즉각 시행을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 연합뉴스

8월 27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정문 앞 한국환경회의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환경운동가들이 최근 당·정·청 협의를 통해 오는 2015년에서 2021년으로 시행이 연기된 저탄소차협력금제의 즉각 시행을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배출권거래제와 동시 시행 어렵다”
첫 번째 연기 당시에도 저탄소차 협력금제가 2015년 1월에도 시행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았다. 이 관측은 최근 열린 당·정·청 협의에서 기정사실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시행을 연기하되, 어느 정도 뒤로 미룰 것인지에 대한 의사결정만 남아 있는 셈이다. 재계와 미국이라는 ‘강적’에 둘러싸인 저탄소차 협력금제는 향후 몇 년간 빛을 보지 못할 운명에 처했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윤성규 환경부 장관 등은 8월 14일 비공개 회동을 갖고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를 내년 1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다만 저탄소차 협력금제 시행시기를 둘러싸고는 의견을 모으지 못했다. 환경부는 계획대로 내년 1월에 시행하자는 입장인 반면 기재부, 산업부는 시행을 유보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부처간 협의에서 저탄소차 협력금제에 대한 합의가 도출되지 않으면서 공은 당·정·청 정책협의회로 넘어갔다. 정무적인 판단이 필요한 상황이 된 셈이다. 정책협의회 논의는 시행 연기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관계자는 “내년 1월부터 배출권 거래제와 저탄소차 협력금제를 동시에 시행할 경우 국내 산업계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가 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말했다.

배출권 거래제는 이산화탄소와 같은 온실가스를 배출할 권리를 기업마다 할당한 뒤 남거나 부족한 배출권을 주식이나 채권처럼 사고팔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할당량을 초과한 기업은 적게 배출하는 기업에서 배출권을 구매할 수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배출권 거래제가 시행되면 제조업 분야에서 연 매출 감소액이 최대 29조6000억원에 달하는 등 손실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계의 이 같은 반발 때문에 정부는 예정대로 내년 1월에 이 제도를 시행하되, 배출권 총량을 더 늘리거나 기업 과징금을 낮춰주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재계는 배출권 거래제도 부담인데 저탄소차 협력금제까지 시행되면 타격이 크다며 배수진을 치고 있다. 여기에다 박근혜 정부 2기 경제팀 수장인 최경환 부총리가 ‘경제 살리기’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까지 맞물렸다. 국내 산업계 목소리만 저탄소차 협력금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통상압력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 무역대표부는 2012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저탄소차 협력금제 시행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가 지난해 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에 대한 관심 표명을 한 뒤부터는 ‘TPP 입장료’로 저탄소차 협력금제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이 TPP에 들어가려면 미국 승인이 필요한데, 이 점을 노려 한국 정부의 친환경 정책 시행을 좌초시키려는 것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대형차를 주로 수출하는 미국 완성차업체는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환경단체들은 또다시 제도 시행이 늦춰진 것은 사실상 제도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환경정의는 8월 27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미 시민, 기업, 정부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 약속하고 법까지 개정한 사항이었지만 당·정·청 정책협의회의 이름으로 이 약속을 저버리려 하고 있다”며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런 협의에 당사자인 환경부는 빠져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번 결정은 이미 유럽 등 국제적인 자동차 온실가스 규제에 오래 전부터 대응해왔고 해당 국가의 규제를 만족하는 자동차를 주력 차종으로 수출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국내 자동차 소비구조를 유지해 기업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내외 완성차 업계 희비 엇갈려
저탄소차 협력금제 시행 연기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외 완성차업계의 희비는 엇갈리고 있다. “독일·일본차 업계에 유리하다”며 반발해온 현대·기아차, 쌍용차, 한국지엠 등은 다행이라는 반응이다. 반면 국내 완성차업계 중 유일하게 저탄소차 협력금제에 긍정적인 입장이던 르노삼성자동차는 아쉬운 표정이다.

하이브리드차 강자인 도요타, 뛰어난 연비가 강점인 푸조 등은 기대를 접어야 할 상황이다. 지난 6월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열린 ‘저탄소차 협력금제 도입방안’ 공청회에서 공개된 시나리오에 따르면 소비자가 하이브리드차를 구매할 경우 200만원의 보조금을 받게 된다. 하이브리드차 판매업체로서는 제도 시행 시 저절로 200만원 가격할인 효과를 볼 수 있는 셈이다. 국내 디젤엔진 열풍이 사그라지고 하이브리드 열풍이 찾아오길 고대하던 도요타로선 저탄소차 협력금제 시행 연기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조세재정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푸조의 경우 내년 이 제도가 시행되면 2015년 판매량이 72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연비가 좋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어 ‘클린 디젤’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차량을 판매하는 독일차 업체들도 다소 아쉬운 눈치다. 반면 미국 업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국내 완성차업계가 조기에 저탄소차 협력금제라는 ‘채찍’을 맞으면서 친환경 기술 경쟁력을 키워야 하는 상황인데 근시안적으로만 접근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지환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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