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생법안 기회는 이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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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처리 요청 민생법안에 논란되고 있는 다수 법안들 슬쩍 끼워넣어

8월 26일 오전 9시.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 섰다.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윤상직 산업통상부 장관,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등 5개 경제부처 장관을 대동하고서다.

최 부총리는 “우리 경제의 맥박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며 “이번 회기에 민생 관련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경제회복의 불씨를 살리지 못한다면 우리 경제는 길을 잃고 회복하기 힘들게 될 것”이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남은 8월 국회가 민생국회로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며 경제위기론을 강조했다. 그는 “올 2월 국민들에게 충격과 비통함을 안겨주었던 송파 세 모녀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초생활보장법 등 30여개 법안을 임시국회에서 통과시켜 달라”고 말했다.

이날 담화문 발표는 전날 밤 늦게 결정돼 5개 부처 장관들에게 통보됐다. 주요 관계자를 대동해 오전 긴급담화를 발표하는 것은 정치권이 즐겨쓰는 발표 형태다. 오전에 발표된 내용은 하루종일 확대재생산되면서 어젠다를 선점하는 효과가 있다.

최 부총리가 치고 나가자 보수언론들은 동조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지지부진해지자 국회 밖으로 나간 야당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장 세종관가에서는 ‘역시 정치인 출신’이라는 호평(?)이 쏟아졌다. 세종시의 한 관료는 “부총리가 경제장관들을 대동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것은 내 기억에 거의 처음 같다”며 “국회를 저런 식으로 압박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은 흉내낼 수 없는 최경환 부총리의 힘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반민생법안 기회는 이때다?

기초생활보장법은 야당에서 반대
최 부총리는 7월 15일 임명된 이후 청와대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어김없이 앞에 나섰다. 세월호 참사로 여당이 수세에 몰렸던 7·30 재·보궐선거를 앞둔 7월 24일에는 하반기부터 내년까지 41조원의 돈을 풀어 내수경기를 살리겠다는 내용의 ‘새 경제팀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했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완화 등 부동산 부양에 초점을 맞췄던 이 대책은 여론의 강한 지지를 받았다. 재·보선에서 여당이 압승하자 최 부총리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7·30 재·보선 대승의 숨은 공로자가 최경환 경제부총리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며 “경제팀이 41조원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내놓고 부동산경기 살리기에 올인하는 모습을 보여준 게 선거전에서 효과로 작용했다는 것”이라며 기사를 링크했다. 자신의 정책이 선거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를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8월 6일에는 세법개편안을 발표하며 세월호 정국 타개에 나섰고, 야당이 장외로 나가며 압박하자 이날 직접 기자회견을 자처하면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최 부총리는 이날 9개의 법안을 우선 통과 법안으로 제안했다. 앞에 국민들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법안을 배치하고, 뒤에 논란이 되는 법안들을 배치했다. 송파 세 모녀 사건을 거론하며 맨 앞에는 기초생활보장법을 내세웠다. 이 법이 통과가 안 되면 이미 편성된 2300억원의 예산 집행이 불가능하고, 40만명의 국민들이 송파 세 모녀와 같은 비극적인 처지에 놓인다고도 했다. 이어 국가재정법을 언급했다. 그는 “골목골목마다 들어서 있는 중국집과 치킨집 유리창에 폐업 안내문이 붙어 있고, 시장 한편에는 나물을 다듬고 있는 우리네 어머님들의 고단한 모습이 보인다”며 “국가재정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300만명의 소상공인을 지원하기 위한 소상공인시장진흥기금을 설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세 번째로 조세특례제한법을 내세우면서 “만일 법안이 통과된다면 월세의 10%에 대해 공제가 이뤄져 연간 1개월치 이상의 월세를 지원받아 가계부담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논란이 되는 법은 일곱 번째 가서야 언급됐다. 의료영리화 전초단계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었다. 이어 학교 옆에 관광호텔을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관광진흥법, 의료단체들이 반대한 원격의료진료가 가능한 의료법 개정 등이 언급됐다. 최 부총리의 담화문을 생방송으로 중계하던 방송들은 다섯 번째 법안이 넘어가는 시점에 대부분 방송을 중단했다. 최 부총리로서는 담화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이들 9개 법안을 포함, 정부가 시급히 처리해야 한다는 30개 법안을 찬찬히 뜯어보면 착한 민생법안으로 보기 어려운 법안들이 많다. 심지어는 최 부총리가 원내대표 시절 때부터 풀지 못했던 법들도 슬쩍 끼워넣었다. 의지가 있었다면 원내대표 시절에 왜 통과를 못 시켰느냐는 반박이 나온다.

송파 세 모녀법으로 불리는 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은 야당이 반대하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은 8월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여당안은 ‘송파 세 모녀’와 같은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없는 법안”이라며 “현재 법으로 보장된 기초생활보호 자격 기준을 행정부 임의대로 변경할 수 있어 보장 혜택이 축소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관광진흥법, 의료법 개정은 야당과 시민단체가 ‘서민 죽이기 법’이라며 반대하는 법들이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외국인의 의료관광비자 발급을 쉽게 해주고, 해외 환자 유치업체 업무범위에 ‘숙박 알선’ 등이 포함돼 있다. 야당은 아예 ‘의료영리화꼼수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8월 26일 최경환 경제부총리(가운데)가 정부서울청사에서 경제 부처 장관들을 대동하고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8월 26일 최경환 경제부총리(가운데)가 정부서울청사에서 경제 부처 장관들을 대동하고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광진흥법·의료법 개정도 논란
관광진흥법은 교육계가 반대하고 있다.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야당은 아예 ‘학교 옆 호텔 건립법’으로 부른다. 특히 이 법은 대한항공이 지으려는 7성급 호텔을 겨냥한 것이어서 재벌특혜법 혹은 재벌민원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2012년 발의된 이후 아직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하고 있다. 원격의료를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안은 동네의원의 몰락을 우려하는 의료인들이 반대하고 있다. 시민사회도 의료사고의 위험성 등을 들어 법 개정에 부정적이다.

그밖에 분양가 상한제 폐지를 담은 주택법개정안과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도 폐지를 담은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 개정안, 수도권 과밀억제권역에서 재건축할 때 소유 주택수만큼 신규주택을 분양받을 수 있도록 한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 등은 부동산 투기를 조장할 우려가 있어 시민사회단체가 반대하고 있다. 카지노 확대법들도 있다. 카지노 설립 허가를 쉽게 해주는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 선상 카지노를 허가해주는 크루즈산업육성법 제정안 등이다.

참여연대는 “최 부총리가 국회 처리를 압박하는 주요 법안은 민생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를 활성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내수 침체라는 문제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반민생, 반서민 법안들”이라고 밝혔다. 국회가 정상화되더라도 짧은 시간 내 통과가 어렵다는 얘기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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