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라이트노벨’ 소설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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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노벨은 대개 문고본 판형으로 표지에 만화적이거나 애니메이션적인 일러스트가 더해진, 중·고생을 주요 독자층으로 하는 일본만의 독자적인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극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기대는 없었다. ‘그래도 톰 아저씨가 나오니까 평타는 치겠지’라는 정도. 영화보다는 같이 간 미인을 어떻게 유혹하느냐에 더 관심이 있었던 탓이기도 하겠다. 한데 두 시간 내내 유혹이고 나발이고 까맣게 잊었을 만큼 영화는 졸, 아니 무척 재미있었다. 특히 그 설정이. 하여, 찾아보면 도처에 널려 있을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줄거리를 굳이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일본의 라이트노벨 <올 유 니드 이즈 킬(All you need is kill)>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

일본의 라이트노벨 <올 유 니드 이즈 킬(All you need is kill)>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

영화의 배경은 근미래이고 오늘 지구는 미믹이라 불리는 외계인들의 침공을 받아 고전하는 중이다. 와중에 전투에 나가지 않으려고 비전투병과의 장교가 된 빌 케이지(톰 크루즈)는 한순간 실수로 상사의 눈 밖에 나서 전장으로 내몰릴 지경에 처하게 된다. 그는 눈앞의 상황을 모면하고자 탈영을 감행하지만 쫓아온 헌병들의 테이저건(전기충격기)에 맞아 기절한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케이지는 자신이 눈을 뜬 곳이 최전선 부대의 막사 앞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다음날 다짜고짜 실전에 투입된다. 무기 조작법은커녕 안전장치 푸는 법도 모르는 채로. 결과는?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엉겁결에 외계인 한 명을 사살함과 동시에 장렬히 전사. 본격적인 스토리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다음 순간 케이지가 눈을 떠보니 ‘어제’ 헌병들의 테이저건을 맞고 기절했다가 깨어난 막사 앞에 자신이 널브러져 있는 게 아닌가. 꿈을 꾸는 건가 싶었는데 ‘다음날 실제 전투에 투입→곧장 개죽음→눈을 뜨니 막사 앞’이라는 상황이 계속된다. 한두 번 반복되는 게 아니라 몇 번이고 이어지는 것이다. 어제(오늘)와 오늘(내일)을 무한루프하는 사이(‘엣지 오브 투모로우’는 ‘오늘과 내일의 경계’라는 뜻이다), 그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는 ‘끝없이 반복되는 오늘과 내일’의 고리를 끊으려면 자신의 힘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복되는 전투경험이 그대로 자신의 몸에 축적되어 간다는 것이다. 즉 전투를 치를수록 케이지의 신체는 레벨업된다. 평범한 타임트래블 에스에프인 줄 알았던 스토리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치게 만든다.

일본의 라이트노벨 <올 유 니드 이즈 킬(All you need is kill)>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

일본의 라이트노벨 <올 유 니드 이즈 킬(All you need is kill)>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원작
일반적인 에스에프의 논리에 따른다면, <사랑의 블랙홀>처럼 의식(기억)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지만, 오늘 전투력이 레벨업되었더라도 어제로 타임슬립하는 순간 몸의 기능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다. 그런데 케이지는 ‘다음날 전장에 투입→같은 전투 반복→개죽음→눈을 뜨니 막사 앞→같은 전투를 반복하지만 어제 싸운 경험을 바탕으로 더 강해져 있음→그래도 개죽음→눈을 뜨니 또 막사 앞’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전투를 반복하지만 어제 싸운 경험을 바탕으로 더 강해져 있음’은 에스에프를 접하지 않은 관객이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에스에프를 계속해서 접해 온 관객이 보기에는 어딘가 모순적인, 혹은 에스에프로 규정하기엔 과학적이지 않은 설정이다. 이에 대한 설명 내지는 해명이 어딘가에 있을까 싶어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지다가, 나는 이 영화가 이라는 일본의 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삼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혹시 라이트노벨에 대해 아시는지. <주간경향>을 읽을 정도의 수준 높은 독자라면 아마 대부분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 들어본 사람도 있을 테고. 그래서 이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데, ‘헤비노벨’(물론 말장난이다)을 읽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마당에 라이트노벨 따위를 알아볼 여유가 어디 있어?라며 조소하고 넘어갈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해 보자는 차원에서 상당히 있어 보이는 일본의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겠다.

일본의 라이트노벨 <올 유 니드 이즈 킬(All you need is kill)>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

일본의 라이트노벨 <올 유 니드 이즈 킬(All you need is kill)>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

한국 문학 비평계의 문제아……라기보다 ‘문제적 인물’인 조영일에 따르면, 아즈마 히로키는 스물셋의 나이에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에 관한 연구서를 써서 화려하게 데뷔한 잘나가던 사상가이자 비평가였다. 한국에서도 가라타니 고진의 뒤를 잇는 후계자로 인식될 만큼 적지 않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사나이가 자기 앞에 펼쳐진 탄탄대로를 ‘포기’하고 난데없이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오타쿠 문화(서브컬처)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많은 사람들의 실망과 의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내가 데리다에 관한 책을 낸 것은 사상 연구가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서브컬처 비평가로서 활동하는 데에 필요한 지명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연구가나 비평가들은 오늘날 엄청나게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는 특정 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서구 사상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얻은 몇몇 개념들을 그럴 듯하게 자국 상황과 짜맞추는 데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런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프레시안 books> ‘미소녀 게임, 문학의 심장을 찌르다!’에서 재인용)

일본의 라이트노벨 <올 유 니드 이즈 킬(All you need is kill)>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

일본의 라이트노벨 <올 유 니드 이즈 킬(All you need is kill)>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

글로 옮겨진 만화, 애니메이션
아아 이런 기개라니, 어떤가. 이 사람이 썼다는 책을 막 읽어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나. 안 들면 할 수 없지만, 나는 조영일의 글을 읽고 그가 썼다는 서브컬처 연구서들이 몹시 궁금해졌다. 양질의 라이트노벨이 다수 등장한 1990년이 일본 문학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 짐작한 아즈마 히로키는 그 작품 세계를 기존 비평의 틀로 규정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따라 라이트노벨에 대한 이론화를 시도한다. 그 결과물이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전작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다. “어떤 의미에서 라이트노벨은 아즈마 히로키라는 이론가를 얻음으로써 비로소 그에 합당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조영일의 평가에 동의하며, 자, 그럼 다시, 라이트노벨이란 무엇인가.

라이트노벨은 대개 문고본 판형으로 표지에 만화적이거나 애니메이션적인 일러스트가 더해진, 중·고생을 주요 독자층으로 하는 일본만의 독자적인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미스터리, 판타지, 로맨스, 에스에프가 혼재되어 있지만 ‘장르소설’로 분류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미스터리와 에스에프 등이 성립하는 것과 같은 일정한 기준(예를 들어 “이것은 미스터리(에프에프)가 맞네, 아니네” 할 때의 그 기준)이 라이트노벨에는 없기 때문이다. 하여 라이트노벨의 범위는 매우 넓고 때로는 장르소설과 순문학까지 포함한다. 다만 표지의 꾸밈이 암시하듯, 글로 옮겨진 만화, 글로 옮겨진 애니메이션이라고 보면 무방할 듯하다. 되풀이하자면 라이트노벨은 가상(만화적, 애니메이션적) 현실을 바탕으로 쓴 소설인 것이다.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이냐……라고 반문하시려는 분들께는 송구하지만 다음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이어갈 수밖에 없겠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모두,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소설―가령 제가 얼마 전에 만든 미야베 미유키의 <피리술사>라든가―도 좀 거들떠보면서 뜻 깊게 보내시길.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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