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이순신과 광화문 이순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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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은 “무릇 장수의 도리는 충을 좇는 것이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시대적 감각과 정서와 생각이 녹아 있다. 그러나 이 참담한 현실에서는 영화 속 이순신을 닮은 인물도 발견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절규하는 이 시대에, 저 거대한 동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오스트리아 빈, 베토벤플라츠. 세계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빈의 역사를 품고 있는 슈테판 성당에서 남쪽으로 얼마쯤 떨어진 곳인데, 원래는 빈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의 바깥 지역이었다. 1865년, 오래된 도시 빈을 완전히 개조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성곽이 철거되고 그 넓은 원형 공간이 ‘링 슈트라세’, 즉 근대적인 가로와 건물이 들어서는 것으로 변모하면서 베토벤플라츠도 빈 시내로 흡수되었다. 1880년에 베토벤 동상이 건립되고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면서 1904년에 베토벤플라츠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음악 애호가는 물론이고 일반 관광객들도 이 광장에 서서 베토벤 동상을 올려다본다. 그런데, 그냥 올려다보고, 기념사진 찍고, 돌아서면 안 된다. 왜 이 동상을 만들었을까? 왜 1880년에 만들었을까? 이 동상은 정녕 베토벤을 추모하고 그의 음악세계를 기념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패망해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문화적 민족주의가 투영된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19세기 민족주의 조형물의 대가인 카스파 폰 춤부슈의 작품이다. 그는 인간 베토벤을 신적인 경지로 드높이기 위하여 하늘에서 굽어보는 자세로 조형했다. 그 아래로 프로메테우스도 있고 니케도 있다. 그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선율로 왕정복고 이후 예술가의 내적 망명을 시도한 베토벤의 고통스런 자의식과는 거리가 먼 형상이다. 춤부슈와 오스트리아 당국은 음악가 베토벤이 아니라 민족주의 아이콘으로서의 베토벤을 형상화했다.

2008년 5월 29일 촛불 시위 때의 이순신 장군 동상 | 정윤수

2008년 5월 29일 촛불 시위 때의 이순신 장군 동상 | 정윤수

민족주의 아이콘으로 세운 베토벤 동상
그들이 만든 또 하나의 민족주의 조형물은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이다. 오스트리아 전성기를 이끈 황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군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밀라노, 네덜란드, 파르마 등의 통치자였다. 이 군주를 끝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으로 축소된다.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강력한 프로이센에 의하여 중부 유럽의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고 급기야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치욕스런 패전 끝에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1887년에 높이 19m에 달하는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을 세웠다. 베토벤의 동상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동상은 몰락해가는 오스트리아의 민족주의, ‘정신 승리’라도 해야만 하는 그들의 정치적 동기를 보여주는 기념상이다.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바라본다. 1968년 4월 27일 건립되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공식적으로는 정부 산하단체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주관하여 세웠는데, 다만 그뿐일까. 높이 17m(동상 6.5m, 기단 10.5m)의 이 거대한 청동 입상은 ‘군인이 나라를 지킨다’고 하는 단순한 의무를 군사정권의 전시 통치 소재로 삼은 것이다.

이 조형물은 서로 다른 시대의 서로 다른 정념을 보여준다. 예컨대 그 무렵 성행했던 위인전 속의 이순신과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맥락상 다른 인물이다. 김진규 주연의 <난중일기>(1977년)와 최민식 주연의 <명량>의 이순신 또한 서로 다른 인물이다. 앞의 이순신이 국가주의 시대의 성웅이라면 뒤의 이순신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을 견뎌내야만 하는 시대의 고뇌가 담겨 있다. 김훈은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는데, 그 수상 소감에서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는 없는 생명의 운명”을 언급했다. 영화 <명량>의 이미지 또한 이와 그리 멀지 않다.

그렇다면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동상은 무엇인가.

역사적 인물 이순신의 업적과는 별개로 이 조형물은 3선 개헌과 유신통치로 착착 진행되는 국가주의적 전시 통치의 상징물이다. 오랫동안 그러한 이미지로 강건하게 서 있었다. 자동차가 횡행하는 수도 서울의 한복판이었기에 그 동상을 가까이 가서 보기도 어려웠다. 동상 바로 앞이 유턴 지점이라서 어쩌다 그곳에서 신호대기하다가 힐끗 올려다 본 게 전부다.

2008년 9월, 보수 작업 중인 이순신 동상 | 정윤수

2008년 9월, 보수 작업 중인 이순신 동상 | 정윤수

바라보면 유신시대가 겹쳐 보이는 상징
마침내 2005년 4월 19일, 광화문 네거리에 건널목이 생겼다. 남북으로 길이 60m가량의 건널목 2개와 동서 방향으로 45m의 건널목 2개가 마련되었다. 그 전에는 무조건 지하보도로 기어들어가야만 했다. 나는 공사 완공 소식을 듣자마자 그곳에 가서 건널목 사이의 교통섬에 서서 이순신 동상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오직 그게 보고 싶었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저 동상은 무엇인가. 보고 또 보았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새마을 노래’와 ‘국민교육헌장’이 겹쳐서 보였다.

그리고 지금 다시 이순신 동상을 생각한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은 “무릇 장수된 자의 도리는 충(忠)을 좇는 것이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실제 인물 이순신 장군의 생각과 다를 바 없지만, 당연히 오늘날의 시대적 감각과 정서와 생각이 녹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생각을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 참담한 현실에서는 실제 인물 이순신을 찾기도 어렵고, 영화 속의 이순신과 흡사한 인물도 발견하기 어렵다. 세월호 참사 이후 모든 것을 다 바꾸겠다고 했으나 그 안이하고 무책임한 대응 때문에 사실상 경질되었던 국무총리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바꾼다고 하면서 데려온 인물들이 하나같이 낙마해버렸다. 각료회의 때 대통령 눈밖에 나버린 문화부 장관만 경질됐을 뿐이다. 여야는 야합 수준의 출구전략까지 구사했다. 게다가 군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인권유린 사태가 곳곳에서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이순신 동상은 무엇인가. 그 아래에서 고통스런 단식을 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차라리 아이들한테 가겠다”고 절규하는 이 시대에, 저 거대한 동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고 있는 것인가. 누가 견디고 있는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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