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토야마의 구상’에 대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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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하토야마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 발표 직후에 불쾌감과 당혹감을 느꼈다. 하토야마가 미국의 아시아 패권체제의 중추인 주일미군의 재배치 문제에 대해서 담대한 주장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2009년 9월 정권을 쟁취한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가 일본의 제93대 총리에 취임했다. 이른바 ‘55년 체제’로 일컬어지는 자민당 주도의 보수연립정권의 장기집권이 붕괴했다. 이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의 한국 대통령은 이명박, 중국의 국가주석은 후진타오, 핵무기 개발 문제로 한반도에 긴장을 드리웠던 김정일이 아직까지는 건재하던 때였다. 미국의 대통령은 경선부터 폭발적인 기세로 승리해 결국 당선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였다.

2009년 시점은 미국이 ‘리먼 쇼크’의 충격으로 경제적 불안정성이 극대화되던 시점이었던 반면, 중국은 고도성장을 통해 세계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영향력도 확장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일본은 20여년에 이르는 장기침체로 침잠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내에서 중국 패권의 부상에 모종의 불안을 느끼던 시점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이전의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격하시켰고, 특히 대북관계에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근거로 강경한 대결적 자세를 높여가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아마도 동아시아의 역내 질서에 가장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중시’ 정책이었을 것이다. 오바마 정권이 등장한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아시아로의 회귀와 재균형 전략’을 뚜렷이 했다. 세계사적 차원에서 중국 패권의 부상을 차단하는 한편, 동아시아 경제의 풍부한 성장 잠재성에 대한 기대가 이러한 전환을 더욱 촉진했다. 그러나 오바마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의 이명박을 제외한 중국의 후진타오나 일본의 하토야마는 가히 부담스런 존재였다.

특히 하토야마의 존재는 미국의 자존심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패권을 교란시킬 수도 있는 대담한 제안을 제시하기도 해 곤혹스러웠던 것 같다. 하토야마는 취임 직후부터 메이지 유신 이후의 ‘탈아입구’(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사회를 지향한다)의 자세에서 벗어나 ‘아시아 중시외교’를 진행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런 차원에서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더욱 확대하고, 동북·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협력한다는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일본은 중국과 미국의 ‘균형추’ 역할을 하면서, 동아시아인들에 의한 동아시아의 선린 우호협력을 실현해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어쩌면 한국의 노무현과 비슷한 구상이었던 셈이다.

‘오키나와 미군 기지 국외 이전’ 공약
한국의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불쾌감을 피력했던 미국은 하토야마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 발표 직후에도 똑같은 불쾌감과 당혹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에서 ‘미국은 배제한다’ ‘일본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밸런스를 조율한다’와 같은 견해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하토야마는 미국의 아시아 패권체제의 중추인 주일미군의 재배치 문제에 대해서도 담대한 주장을 피력했다. 바로 미군기지의 75%가 밀집되어 있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에 대해, 특히 북부의 나고시 헤노코로 이전할 계획이었던 후텐마 기지의 이전문제에 대해 “최소한 현외(縣外) 이전, 궁극적으로는 국외 이전”이라는 공약을 현실화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미국의 군사식민지의 고통을 오랫동안 감수해 왔던 오키나와인들은 하토야마의 등장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오키나와의 자치와 자립을 위해서는 이 악몽 같은 ‘기지부담’이라는 문제를 탈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북한 핵개발 등의 문제로 동아시아 역내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고조되고, 특히 중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이 센카쿠제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화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오키나와인들에게 제2의 오키나와 전쟁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문제는 오키나와인의 염원과 무관하게 오바마는 바로 그런 정황이야말로 미군기지를 오키나와에 지속적으로 배치해야 할 필요성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 있다. 오키나와를 군사적·지정학적으로 바라보면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중동의 ‘분쟁의 활’ 지역을 군사적으로 통제하고, 일단 유사시 전력을 신속하게 전개시킬 수 있는 요충지라는 생각이야말로 1945년 이후 일관된 미국의 오키나와 관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지구본 정치’의 한 사례다. 지구본을 바라보며 대외전략을 고민하는 측에서는 자잘한 점으로 이어진 류큐제도의 지형만 보이지, 그곳에 자신과 동일한 피와 감정을 소유한 사람은 보지 못한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이런 ‘지구본 정치’를 일본 본도의 정치세력과 오키나와를 변방의 먼 촌동네 정도로 생각하는 일본 본도인들 역시 동일하게 해왔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눈앞에 전폭기의 폭음이 들리지 않으면, 핵발전소가 없다면 그것은 남의 문제라는 외면이 거기에는 존재한다.

하토야마는 일시적으로 오키나와인들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다. 어떤 차원에서는 자민당의 장기집권에 질려버린 일본 본도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체험이었지만, 미·일 안보협정에 의존해 왔던 자민당 및 보수관료 세력들에게는 무모하고, 철없고, 위험한 행동으로 보였다.

하토야마에 대해 “그의 정치적 입장은 어리석었다. 북한 사람들이 그것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주었다”고 쓴 것은 오바마의 동아시아 보좌관이었던 제프리 A 베이더였다. 그는 <오바마와 중국>(2013)이라는 책에서 한국에서 벌어진 ‘천안함 사건’이 결국 하토야마를 패배시켰고, 미국의 의도대로 아시아 정책을 끌고 가게 만드는 기회를 다시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다수의 일본인들은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하토야마 비전의 비현실성을 자각했고, 확장하는 중국의 패권에 경각심을 회복했으며, 저 알 수 없는 북한의 군사적 맹동주의를 혐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바마 ‘지구본 정치’의 희생양
이것은 하토야마에게는 물론이지만 오키나와인에게도 전후 최초로 ‘평화의 섬’을 구축할 수 있었던 역사적 기회의 상실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하토야마는 후텐마 기지의 “최소 현외 이전, 최대 국외 이전”이라는 자신의 공약을 스스로 부정하고 폐기했다. 그런 상황에 중국의 해군함선 9척이 오키나와 영해를 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갑자기 일본 본도의 사람들은 오키나와가 아니라 ‘일본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일·미동맹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기 시작했다. 오바마의 참모인 베이더는 하토야마의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구상에 대해 “스스로 묘혈을 판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인상기를 마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스스로 묘혈을 판 것이라고 격하되어도 좋은 것일까. 오키나와인의 입장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를 갈망하는 평범한 시민들 입장에서는 하토야마의 구상이 1년도 안 돼서 실패하긴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계승되고 지속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창칼이 평화를 지키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나라를 지키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지키지 못한다. 이것이 오키나와인들이 체험적으로 깨달은 전후체험의 본질이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racan@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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