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풀뿌리’ 어떻게 해야 힘이 세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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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운동은 주민들의 민중권력이 지방권력과 대등해지는 삶 지향… 주체의 성장과 다양성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 계속 점검해야

6·4 지방선거가 끝났다. 여기저기서 관전·분석평이 나온다. 대부분의 평들은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양당구조가 세월호 참사라는 큰 사건에도 불구하고 고착되었고, 여러 진보정당들이 기존의 성과조차 지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만큼 풀뿌리민주주의도 위축되었다고 본다. 결과만 놓고 보면 실제로 그렇다. 전국의 단체장과 광역의원 거의 대다수가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이고, 기초의회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의 색깔을 떠나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할 정치가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친환경무상급식 국민연대 회원들이 2013년 8월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방자치를 흔드는 시도를 멈추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정지윤기자

친환경무상급식 국민연대 회원들이 2013년 8월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방자치를 흔드는 시도를 멈추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정지윤기자

선거에 참여했던 풀뿌리운동의 결과도 좋지 않다. 지역 풀뿌리의 연계조직을 자처했던 녹색당은 한 명의 의원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마을공동체로 유명한 서울시 마포구에서는 ‘마포파티’라는 지역당을 표방했던 후보 4명 모두가 낙선했다. 그렇지만 경기도 과천시에서는 풀뿌리로 시작한 무소속 후보 2명 모두가 당선되어 총 7명인 의회(새누리 3, 새정치 2)에서 의미 있는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희비가 엇갈리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풀뿌리민주주의보다 풀뿌리보수주의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는 한국 상황에서 풀뿌리는 어떤 정치의 가능성을 가질까?

특정지역 뛰어 넘는 다양한 삶 반영을
보통 풀뿌리운동은 특정 지역을 근거로 삼는 운동으로 이해되지만 그건 절반의 진실이다. 풀뿌리운동은 수동적인 주민을 능동적인 주체로 성장시키려는 목적을 가진다. 그래서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더라도 주민이 직접 의제를 만들고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을 주도하지 못한다면 풀뿌리운동이라 보기 어렵다. 풀뿌리운동은 운동과정에서 발전된 주민들의 리더십이 지역을 재구성하는 정치적인 힘이 되고, 주민들의 민중권력이 지방권력과 대등해지는 삶을 지향한다. 군사독재 시기와 비교하면 운동의 뿌리가 제법 넓어졌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지역들도 생겼지만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왜냐하면 지역도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풀뿌리운동의 주체들도 인간이기에 다양한 경로를 걷기 때문이다. 뉴타운·산업단지와 같은 개발사업들이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고, 각종 사건이나 죽음이 주체들의 힘을 뺐다 늘렸다 한다. 그래서 풀뿌리운동은 어떤 하나의 모델을 따라가기 어렵다. 사람이 중심인 운동인지라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과 삶이 반영되어야 하고, 지역이 중심인 운동이라 중심보다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

그렇기에 풀뿌리운동은 주체의 성장과 다양성이라는 강점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를 계속 점검한다. 주민 구성이 특정 아파트나 마을을 넘어 다양해지고 넓어지고 있다면, 생활과 노동의 장이 조금씩 통합되고 있다면, 그러면서 지역과 사람의 독특성을 드러내며 단단한 관계망을 만들고 있다면 그 힘은 강하다. 사실 풀뿌리운동의 정치적인 힘은 관계망을 통해 구성된 신뢰이고, 생활로 단련된 지혜이다. 신뢰는 일방적인 믿음보다 자신의 힘에 대한 자각과 서로에 대한 약속을 뜻하고, 지혜는 표준화된 지식보다 가슴과 몸으로 느끼는 경험과 함께 나누는 삶을 뜻한다.

서로를 믿고, 돌보고, 물건을 나누고, 같이 밥 먹고, 수다를 떨며 공부하는 과정은 생활정치의 동력이고 자치를 가능케 하는 토대이다. 주민 스스로가 이 과정을 기획할 수 있기에 운동은 즐겁기도 하다. 함께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이 풀뿌리운동의 강점이다. 이런 삶이 단단해지면 기성 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삶이, 그리고 지역이 지속될 수 있다.

그렇지만 풀뿌리운동이 현실의 역동성을 반영하려면 지속적인 ‘공부’와 ‘수련’이 필요하다. 공부를 해야 그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과 공간이 눈에 들어오고, 수련을 해야 사람과 지역에 대한 감각과 의식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한국처럼 제왕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단체장이 있는 중앙집권형 사회에서 풀뿌리의 힘이 강해지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다양한 지역 연결 ‘연방주의 전략’ 필요
자치가 되려면 지역이 실질적인 권한을 가져야 하는데 한국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정부가 지역에 핵시설이나 필요한 시설들을 강제로 세운다. 이런 경향을 막으려면 다양한 지역‘들’이 섬처럼 고립되지 말고 서로 이어져야 한다. 중앙을 견제하고 압박할 수 있는 소연방이나 연방주의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 전략이 없기에 동네를 압도하는 중앙정치나 사건의 바람은 뿌리를 약하게 만든다.

그리고 좋은 마을이 뉴타운 앞에서 무기력해지듯이 생활정치도 때때로 제도정치 앞에서 모욕을 당한다. 그래서 정당활동을 하고 때로는 선거에 직접 나서기도 한다. 시민후보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선거에 참여하는 비중은 매우 높아졌다. 이번 선거에서 통합진보당은 광역과 기초를 합해 430명, 정의당은 136명, 노동당은 108명, 녹색당은 22명의 후보를 냈다. 양적인 규모로 보면 엄청난 성장이다. 하지만 그것이 질적 도약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갈수록 다양해지는데, 기득권은 개발·발전이라는 말 하나로 자기 전략을 설득할 수 있지만, 풀뿌리운동은 통일되지 않은, 통일될 수 없는 언어로 주민들을 만나야 한다. 운동에서는 그나마 만남이 가능할 수 있지만 선거에서는 그것이 어렵다.(선거과정조차 불리하다) 따라서 개발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언어로 만들어진 비전이 사회 전체의 변화와 연계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해관계와 변화의 비전을 연계시켜야 한다. 정치에 관한 정보를 나누는 통로도 다양해져야 한다. 생활정치의 힘이 강해져도 그 힘이 체제를 압박하지 못한다면, 두 사회가 분리된다면 삶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특히 행정 주도의 마을 만들기나 사회적 경제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자원배분에 더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누가 자원을 더 많이 끌어올 수 있는가를 따지는 이해관계와 영악해진 주민은 풀뿌리를 쉽게 흔들 수 있다. 그리고 정부와 연관된 일자리들이 늘어날수록 그것은 주변의 질시를 받고 주민을 분열시킨다. 풀뿌리가 지역을 강화시켜야 하는데 외려 체제를 강화시킨다.

내적인 힘을 다지면서 외부와 적극적으로 연계될 때에 풀뿌리민주주의는 더 넓게, 더 깊이 뿌리를 내릴 것 같다.

<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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