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 우리는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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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오사카, 베를린 등 수많은 도시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기’ 위해 ‘도시재생’에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나는 지난 겨울 보았던 사북, 고한, 철암 일대의 탄광지역을 기억한다. 다른 나라 도시들이 미술관을 유치하고 교육센터를 지을 때, 우리는 카지노를 들이밀고 산을 깎아 스키장을 만들었다.

고등학생 시절 핑크 플로이드 음악을 좋아했다. ‘더 월’ 같은 희대의 걸작도 좋아했지만 특히 사랑했던 것은 1977년에 발표한 ‘애니멀스’였다. 자본주의의 본산인 영국의 비인간적인 산업화와 그에 따른 황폐한 상황을 동물에 빗대어 만든 작품인데, 앨범 전체를 관류하는 쓸쓸한 서정과 예리한 풍자와 끝내 폭발해버리고 마는 분노를 잊을 수가 없다.

앨범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거대하지만 외로워 보이는, 회색의 건물이 우중충하게 서 있고 그 위로 핑크빛 돼지가 둥둥 떠다니는 표지였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런던의 화력발전소였다. 지난 2011년에 이 핑크빛 대형 돼지 풍선이 다시 하늘을 날았다. 정규 앨범 11개를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발매하면서 이를 기념하여 창고에 보관 중이던 돼지 풍선을 날린 것이다.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의  옛 동원탄좌를 재생한 모습 | 정윤수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의 옛 동원탄좌를 재생한 모습 | 정윤수

미술관으로 변신한 화력발전소
왜 핑크 플로이드는 그로테스크한 화력발전소 위로 돼지 풍선을 날렸던가. 그 시절, 이 화력발전소는 침체된 영국 사회와 살벌한 경쟁으로 치닫게 된 산업사회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가. 그곳은 이제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변했다. 테이트모던 갤러리로 변신한 것이다.

이런 일을 도시 재생이라고 한다. 산업화 과정에서 발전해온 대도시의 공간을 21세기의 첨단 정보 및 문화예술 기반에 맞게 바꾸는 과정을 뜻한다. 무조건 철거하고 그 위에 번듯한 건물을 쌓아올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바꾸는 과정에 참여한 사람이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헤르조크와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다. 이 두 사람은 세계 주요 도시 곳곳에 미래에서 온 듯한 건물을 세워왔다. 내가 직접 본, 참으로 경이로운 건물은 뮌헨의 축구경기장 알리안츠 아레나였다. 불시착한 비행선 같았는데, 아름다웠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도 이들이 지었다. 이 두 사람은 이렇게 얼마든지 능수능란한 신소재와 신기술을 선보일 수 있음에도 화력발전소만큼은 외경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내부를 리뉴얼했다. 20세기 영국의 역사와 런던의 기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 안의 기능만큼은 21세기의 문화예술로 채운 것이다.

이러한 도시 재생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카고, 오사카, 베를린 등 수많은 도시들이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오래된 경관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경관이 멸실되거나 훼손되면 그로 인하여 생성되었던 수많은 기억까지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스페인의 빌바오를 보자. 1970년대까지 45만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스페인 북부의 활기찬 항구도시로 철강과 조선산업의 중심지였으며 탄광산업으로 융성했던 도시다. 1970년대 말, 유럽 전체에 불어닥친 중공업산업의 위기와 탄광산업의 사양화로 빌바오는 실업률이 30%까지 치솟을 정도로 위기를 겪게 된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의 삼탄아트마인 내부 모습 | 정윤수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의 삼탄아트마인 내부 모습 | 정윤수

빌바오는 이 문제가 일시적인 상황이 아니라 그야말로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 즉 근대적 산업화에 따라 조성된 도시를 정보, 문화, 교육에 맞는 도시로 고쳐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1995년에 수립된 ‘메트로폴리탄 빌바오 계획’이 그것이다. 이를 전후로 하여 ‘빌바오 구겐하임’ 유치(97년 완공), 아메촐라 공원 계획(2004년 개장), 보행자와 자전거 이용자를 위한 에스칼두나 다리 등이 진행되었다. 이 재생 과정에서 빌바오는 도시의 ‘기억’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빌바오는 스페인의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거점 도시다. 우애와 연대의 표상이 되는 도시답게 그들의 도시 재생은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와 그들의 정서 및 그들이 기억하고자 하는 요소들의 변주로 이뤄졌다.

찜질방ㆍ술집만 즐비한 탄광지역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독일의 루르 탄전지대 또한 그러하다. 도르트문트, 에센, 뒤스부르크 등 중공업과 탄광의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이 루르 지대를 21세기에 맞게 리뉴얼하는 과정에서도 그들은 그들의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탄광도시 졸퍼라인이 대표적이다. 렘 쿨하스, 노만 포스터, 세지마 가즈오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탄광 시설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새로운 기능을 안정적으로 구현하도록 리뉴얼했다. 겉보기에는 여전히 탄광 도시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박물관, 극장, 컨벤션센터, 디자인스쿨 등이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나는 지난 겨울 보았던 사북, 고한, 철암 일대의 탄광지역을 기억한다. 도시 재생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지노와 스키장과 모텔들이 짓누르고 있었다. 다른 도시들이 미술관을 유치하고 교육센터를 지을 때, 우리는 카지노를 들이밀었다. 산을 깎아 스키장을 만들어버렸다. 그리하여 함백산, 태백산 일대의 마을들이 온통 조잡한 숙박시설과 찜질방과 전당포와 술집으로 변하고 말았다.

도시 재생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간신히 시도되고 있지만, 그래서 가난한 마을에 벽화도 그려넣고 쉼터도 만들고 주민 자치의 가게들도 늘어났지만 카지노의 후폭풍과 스키장의 압력을 이겨내기는 힘들다. 2001년 폐광된 삼척탄좌의 안팎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젊은 미술가들과 함께 신생을 도모하고 있는 ‘삼탄아트마인’이 아니었다면 너무 황량했을 것이다.

‘기억할 것은 기억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노동의 기억, 연대의 기억, 쓰라린 상처의 기억은 말갛게 지우고 그저 옛 시절의 끔찍한 가난을 낭만화하고 구경거리로 포장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지원이 미비한 탓도 있고 기술이 뒷받침되지 못한 탓도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가치의 문제다. 문창극의 말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가난에 대한 멸시와 노동에 대한 천대가 여전한 상황에서 우리 도시들이 거쳐온 애틋한 기억의 보존에 따른 도시 재생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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