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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적폐는 ‘소득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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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돈 버는 세상’ 자본 증식 속도에 반비례해 노동가치 추락 ‘인간안보’ 가로막아

불안이다. 안전을 보장한다는 정부에 대한,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지탱하는 경제적 여건에 대한 불안이다. 세월호 사고와 함께 한국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불안은 가시적인 안전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불안정한 현재의 소득수준이 앞날에도 그리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전망이 자리잡고 있다. 자본이 거칠 것 없이 증식하는 속도와 반비례해 노동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위기감, 이것이 바로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을 피부로 경험한 뒤 얻은 교훈이었다.

때마침 ‘인간안보’를 위협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에 대해 분석한 한 권의 책이 유럽과 미국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책 <21세기 자본>은 방대한 수치 자료를 바탕으로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증폭되고 있는 경제적 불안감의 근원을 쫓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책 전체를 꿰뚫는 그의 논지는 간단하다. ‘돈이 돈을 버는’ 경향은 300여년에 이르는 자본주의의 역사 동안 두드러져 왔고, 특히 21세기에는 더욱 극심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너머로 솟아 있는 타워팰리스 등 고급 주상복합건물들이 구룡마을 판자촌과 대조를 이룬다. | 경향신문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너머로 솟아 있는 타워팰리스 등 고급 주상복합건물들이 구룡마을 판자촌과 대조를 이룬다. | 경향신문

한국 사회 역시 이러한 우려에서 자유롭진 않았다. 한 나라 안의 부를 가르는 ‘자본’과 ‘노동’ 간의 싸움에서 한국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더 오랜 서구 선진국들에 비해서도 자본 쪽이 더 큰 몫을 가져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정태인 원장이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그리고 한국 경제’ 보고서에서 피케티의 공식에 따라 한국 경제에서 자본과 노동의 몫을 추산한 결과를 보면 자본의 몫은 약 48%에 달해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 이유는 한 해 동안 새롭게 만들어지는 소득에 비해 과거부터 현재까지 축적되어온 국가 내 전체 자산(국민순자산)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축적된 자산의 비중이 한 해 동안 만들어지는 국민소득에 비해 높을수록 그 사회는 이미 축적된 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자본의 몫이 높아지는 사회가 된다. 정 원장은 한국의 국민순자산이 국민소득의 8배에 달해 4~6배 수준인 서구 선진국 이상이라고 분석했다.

우리나라 자본의 몫 세계 최고 수준
이러한 수치가 가리키는 내용은 경제부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피케티는 자본의 힘이 세진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킨다는 것이 자본주의 역사에서의 결론이라고 지적한다. 프랑스의 ‘벨 에포크’와 미국의 ‘도금시대’는 자산과 소득의 집중도가 높아져 정치·사법의 영역까지 자본의 입김에 좌우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 이들 나라에서 국민순자산이 국민소득의 6~7배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한국의 자본 집중도와 정치 상황과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실 학계의 거시적인 관점이 아니라 보통의 생활인의 관점에서도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일수록 사회는 더욱 불안해진다는 경험은 일반적이다. 안전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적폐’는 기본적인 생활을 위협받는 경제적 불안정과 소득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 크게 치솟은 부동산 가격 상승률은 자살률과 같은 추세를 보였다. 전국의 아파트 매매가 지수가 2000년에 비해 2008년 2.4배로 정점을 찍는 동안 같은 기간 10만명당 13.6명이던 자살률도 26명으로 1.9배 상승했다. 이 기간 소득불평등을 재는 지수인 지니계수도 0.28에서 0.32로 급격하게 높아졌다. 자본의 집중과 인간안보가 반대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전체 국민소득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리키는 노동소득분배율은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한국노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자영업자의 소득규모를 고려해 보정한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80.4%를 기록해 최고치를 찍은 뒤 지속적으로 떨어져 2010년에 이르면 67.5%까지 하락한 채로 회복되지 않고 있다. 같은 노동자 계층 안에서도 양극화는 심화됐다. 하위 99% 노동자들의 노동소득 비중은 같은 기간 74.2%에서 64.5%로 줄어든 반면 상위 1%에선 그 비중이 3.8%에서 5.1%로 증가했다.

문제는 피케티가 지적하듯 이러한 양극화와 소득불평등으로 인한 인간안보의 위기가 향후에도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데 있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에 따라 경제성장이 둔화되는 현상은 노동소득을 높이려는 조치마저 약화시켜 이미 축적된 자본의 힘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고령화 추세를 보이고 있는 한국으로선 사회 전체의 변화 없이는 이러한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막기 어려운 실정이다. 때문에 줄어든 실질소득폭을 부채로 메워온 상당수의 노동계층에 대해 소득수준을 조정하기 위한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노동연구원의 이병희 선임연구위원은 “가계부채의 증가를 통한 생활수준의 유지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노동시장의 불평등 억제가 남은 길”이라며 “근본적으로는 고용률을 높이는 한편 적극적인 재분배정책을 확대하는 대책이 보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분배 개선 위해 국가개입 필요성 높아져
앞서 프랑스와 미국 등 국가에서 국민순자산의 비중이 국민소득을 압도한 시기에 자본주의의 세습적 성격이 극에 달했다는 것 또한 피케티를 비롯한 경제사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19세기 말 최고조에 이르렀던 자본의 집중이 결국 대공황과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사회에서 자본이 특정 계층에 고도로 집중되는 경향도 세월호 이상의 사회적 비용을 초래할 위험을 품고 있는 셈이다. 피케티는 이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도 ‘세습 자본주의’로 역행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며 국제적인 ‘부유세’ 도입을 통해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소득에 대해선 80% 이상의 강도 높은 세제를 적용해 부의 집중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견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 전체의 부가 더디게 성장할수록 이러한 정치적 개입의 중요성은 높아진다. 정태인 원장은 “우리의 분배 상황은 이미 세계에서도 최악에 속한다. 앞으로 경제성장률도 정체한다면 더 빠른 속도로 부의 집중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월호 사고에서 보였던 위험의 외주화 역시 미래세대 또는 비정규직과 같은 주변부 노동계층의 인간안보를 담보로 한 것이었다. “한국의 피케티 비율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아이들이 전부 세월호에 갇힐 수 있다는 사실이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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