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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고액 후원자들 그들은 왜 신분 숨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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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만원 초과 기부자 10명 중 7명이 이름·직업 등 바꾸거나 아예 기록조차 안 해

정몽석 현대종합금속 회장은 지난해 새누리당의 중진급 의원인 서병수·나성린·유일호 의원에게 각각 한도액인 500만원씩 후원했다. 

친박(박근혜)계 실세인 서병수 의원은 현재 부산시장에 출마한 상태다. 나성린·유일호 의원은 경제 관련 상임위에 포진해 있다. 나성린 의원은 국회 기획재정위 새누리당 간사를 맡고 있으며, 유일호 의원은 국회 정무위 소속이다.

기업인이 정치인을 후원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오히려 박수를 받을 만하다.

지난 2월 3일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모여 단체촬영했다. | 박민규 기자

지난 2월 3일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모여 단체촬영했다. | 박민규 기자

그런데 이상한 점은 정 회장이 후원을 하면서 신분 노출을 꺼린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정 회장은 직업란을 각각 다르게 표기했다. 

서병수 의원 후원금에는 직업란에 ‘현대종합금속’으로 기재했지만 나성린 의원 후원금에는 ‘회사원’으로 적었다. 유일호 의원에게는 아예 ‘기타’라고 표기했다. 전화번호도 휴대전화와 유선 전화번호로 의원들마다 다르게 적었다.

“떳떳하지 않은 후원 방증하는 셈”
이와 관련, 정치권에서는 대기업 회장으로서 떳떳하지 않은 후원금이 아니냐는 비판도 일고 있다. 국회 관계자는 “기업인으로서 후원금 기재란에 각 의원들마다 다른 직업을 적었다면 후원자를 숨기고 싶은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며 “떳떳한 후원금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현대종합금속 측은 “아는 바가 없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유일호 의원 등을 학회·모임을 통해 알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의원들에게 고액 후원금을 내면서 인적사항을 제대로 기재하지 않는 관행이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행법(정치자금법)에 따르면 개인은 1년에 총 2000만원, 한 의원에게 최대 500만원까지 후원할 수 있다. 하지만 고액 후원자(연간 300만원 초과)들의 정확한 신원 파악을 하기란 쉽지 않다. 

후원자 대부분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신원을 숨기기 때문이다. 후원자는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 직업, 전화번호 등 인적사항을 기재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을 제대로 기재하는 후원자는 많지 않다. 형식적으로만 적을 뿐이다.

언론사들의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최근 공개한 ‘2013년도 국회의원 300만원 초과 기부자’ 명단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된다.

명단에 따르면 총 2400여명이 지난해 217명의 의원들에게 고액 후원을 했다. 하지만 후원자 전체의 70% 이상이 정확한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 대부분이 직업란에 자영업, 회사원, 사업(가), 직장인 등으로 표기했으며, 기타와 공란으로 둔 경우도 있었다. 

주소를 아예 기재하지 않은 고액 후원자도 20명이 넘었다. 게다가 고액 후원자 대부분이 차명으로 후원해 후원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깜깜이 후원’도 계속되고 있다.

안홍철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은 지난해 1월부터 5월까지 5개월 동안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 서병수·유정복 의원에게 각각 100만원씩 1500만원의 후원금을 보냈다. 

[정치]정치인 고액 후원자들 그들은 왜 신분 숨길까

안홍철 사장은 친박계 실세 의원들에게 후원금을 내면서 선관위에 신고한 후원금 리스트에는 직업과 주소를 다르게 적는 등 마치 후원자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했다. 

최경환 의원에게는 주소와 직업을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회사원으로, 서병수 의원에게는 서울 서초구 염곡동의 자영업자로, 유정복 의원에게는 서울 서초구 헌릉로의 직장인으로 각각 기재했다. 

지난해 말 소리소문 없이 KIC 사장에 임명된 안 사장은 과거 행적 때문에 민주당 등 야당으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안 사장은 과거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종북 하수인’으로 지칭하고 대선후보였던 문재인·안철수 의원 등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바 있다.

안 사장은 낙하산 인사 논란도 일었다. 안 사장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캠프’ 특별직능단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유정복 의원은 안 사장의 직속 상관인 직능총괄본부장을 맡았다. 안 사장은 최경환 의원과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선 의원을 지낸 구천서 한중경제협회장도 새누리당 홍문종 사무총장, 정우택 최고위원, 이현재 의원에게 각각 500만원씩 후원금을 냈다. 구천서 회장 역시 직업란을 공란(이현재 의원)으로 두는 등 직업을 각각 다르게 적었다.

의원들에게 ‘보험용’ 성격의 후원금을 낸 지자체장이나 지방의원들도 있었다. 박춘희 송파구청장과 류수철 서울시의원은 같은 지역구 의원인 김을동 새누리당 의원(서울 송파병)에게 500만원씩을 후원했다.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대구 동을) 역시 도재준 대구시의원으로부터 500만원을 받았으며, 이한구 의원(대구 수성갑)은 박민호 수성구의원으로부터 500만원을 받았다. 

민주당 정호준 의원(서울 중구)은 김영선 중구의원으로부터 360만원을 받았다. 전남지사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이석형 전 함평군수와 전형준 전 화순군수는 각각 안철수 의원에게 400만원, 500만원을 후원했다.

지역구 지자체장·보좌관이 기부도
지방의원 등으로부터 고액 후원금을 받는 것은 현행법상 문제가 없다. 그러나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의원이 공직 후보자들로부터 고액 후원금을 받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견해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해당지역 의원이 기초단체장 및 지방의원에 대한 공천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공직 후보자들로부터 300만원 이상 고액 후원금을 받았다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심지어 의원 보좌관이 모시고 있는 의원에게 후원금을 낸 경우도 있었다. 새누리당 김희국 의원(대구 중·남구)은 보좌관으로부터 500만원의 후원금을 받았다. 

주로 지역구 일을 맡아보고 있는 이 보좌관은 재력가로 알려졌다. 해당 보좌관은 “국회의원이 의정활동을 하다보면 돈이 모자랄 때가 있다”며 “살림살이를 잘 아는 보좌관으로서 특별한 의미 없이 후원금을 냈다”고 밝혔다.

한편 정확하게 신원을 밝히고 후원하는 기업인들도 있다.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은 고향(경남 하동) 후배인 새누리당 여상규 의원을 6년째 후원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500만원을 후원한 손 회장은 여 의원과 ‘형, 동생’ 할 정도로 막역하다.

김홍선 전 안랩 대표와 고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은 대선후보였던 안철수 의원에게 500만원씩의 후원금을 냈다. 지난 2008년부터 5년여 동안 안랩의 대표를 맡았던 김 전 대표는 안랩의 창업자인 안 의원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올해 초 별세한 김 전 행장은 자신이 주택은행장으로 있었던 2001년 안 의원이 사외이사를 맡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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