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도로명 주소 마음에 안 들어! 바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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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고시 이후 이름 바뀐 158곳… 변경 신청 이유도 ‘가지가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과 회기동 일부 주민들은 동네 앞을 지나는 망우로의 도로명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망우로는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중랑구 망우동까지 총 8.3㎞로 이어진 도로다. 

하지만 동대문구 일부 주민들은 망우로가 어감이 좋지 않아 동네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며 도로명 변경을 동대문구청에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최근에도 주민들은 “망우로는 망우리 공동묘지가 연상된다”며 “동대문구와 중랑구의 경계인 중랑교를 중심으로 동대문 쪽 구간을 왕산로로 바꿔 달라”는 민원을 준비하고 있다. 

반면 중랑구에 사는 주민들은 망우로라는 도로 명칭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중랑구에 망우동, 망우리 고개라는 낯익은 명칭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망우로라는 이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주민들은 오히려 망우로라는 명칭에 친근감까지 느낀다.

2014년 1월부터 도로명 주소가 전면 시행됐다. / 홍도은 기자

2014년 1월부터 도로명 주소가 전면 시행됐다. / 홍도은 기자

올해부터 시행 중인 도로명 주소 변경이 가져온 풍경이다. 도로명 주소는 시·군·구와 읍·면까지는 기존 주소와 같지만 동·리와 지번 대신 도로명과 건물번호를 쓴다. 

사실 도로명 주소는 지난 1997년 도입이 결정됐으며, 2011년 7월 29일 정식으로 고시됐다. 지난해까지는 기존 주소와 도로명 주소를 함께 써도 됐지만 올해부터는 도로명 주소 사용이 의무화된 것이다. 

정부는 무려 400여억원을 들여 도로명 주소를 만들었지만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바뀐 도로명 주소도 꽤 있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진선미 의원(민주당)이 안전행정부로부터 받은 ‘2011년 7월 29일 이후 도로명 주소 변경 현황’에 따르면 전국의 크고 작은 도로명 16만여개 중 158개의 주소가 기존 명칭에서 새로운 명칭으로 바뀌었다.

“집값에 영향” 판교 주변 민원 많아
도로명과 관련해서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치고 있는 곳은 판교신도시 지역이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일대(총 9219만㎡)에 위치한 판교신도시는 2만9000여가구의 아파트에 8만7000여명이 살고 있다. 

한때 벌판이었던 이 지역에 신도시가 들어서고, 주민들도 원주민보다 외지인이 더 많이 거주함에 따라 도로 명칭이 신도시 건설 후에 많이 바뀌었다. 

2014년부터 도로명 주소의 사용을 알리는 게시물. / 김정근 기자

2014년부터 도로명 주소의 사용을 알리는 게시물. / 김정근 기자

특히 주민들은 이 지역을 지나는 각 도로명에 과거 도로명 대신 ‘판교’라는 말이 들어가기를 원했다. ‘판교신도시’라는 브랜드 프리미엄이 집값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지역의 역사성이 있는 이름 대신 판교역로, 판교로 등 도로명에 ‘판교’자가 들어간 이름이 새로 생겨났다.

‘판교’가 들어가는 거리명이나 주소명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 같다. 경기 성남시 운중동 일대 주민들도 ‘산운로’를 ‘판교로’로 바꿔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지역의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판교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언론이 판교는 신도시라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강하게 심어줬다”며 “부동산시장에서 판교라는 집값 프리미엄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이 지역에서는 도로명 변경을 놓고 소송까지 벌이고 있다. 성남시는 경기 분당구 야탑동을 지나는 도로명을 기존의 판교로에서 야탑남로로 변경했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판교로가 더 좋다며 판교로라는 도로명칭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는 주민들이 승소했으며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소송 결과에 따라 다른 곳의 지자체와 주민들 간 비슷한 소송이 잇따를 전망이다. 

서울과 김포공항을 잇는 공항대로는 각 지자체 간에 명칭 변경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경기 김포공항에서 강서·양천·영등포구를 지나는 공항대로는 양천구와 영등포구를 지나는 구간만 목동공항대로로 이름을 바꿨다가 강서구의 강력한 문제 제기로 결국 공항대로로 원상복귀되기도 했다.

도로명 변경은 주민 50% 이상이 동의하면 해당 지자체에 변경을 신청할 수 있다. 단 도로명의 안정성을 위해 도로명이 변경된 이후 3년이 지나지 않으면 변경을 신청할 수 없다.

도로명 변경 놓고 지자체와 소송도
도로명이 외래어로 가득찬 지역도 있다. 인천시 서구 청라신도시 지역은 도로를 만들 때부터 외래어 도로명칭을 사용했다. ‘루비로’, ‘에메랄드로’, ‘라임(lime)로’, ‘커넬(canal)로’ 등이다. 일반인들이 정확한 뜻도 모르는 외래어가 버젓이 도로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도로들은 청라신도시 건설 당시 토지구획의 명칭을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을 건설할 때 ‘루비존’, ‘라임존’이라는 명칭으로 구획을 정한 것이 그대로 도로명칭이 된 것이다. 

이후 이 길들은 지역의 명칭을 넣어야 한다는 민원에 따라 길 앞에 ‘청라’를 넣어 ‘청라 루비로’, ‘청라 에메랄드로’ 등으로 일제히 바뀌었다. 인천 서구 오류동과 경서동을 지나는 난지로와 난지로 28번길도 각각 환경로와 환경로 28번길로 바뀌었다. 

쓰레기 매립지가 연상되는 난지로를 종합환경연구단지가 위치한 지역 특성을 반영해 환경로로 바꾼 것이다. 인천 서구청은 불과 1년여 만에 도로명판, 건물 번호판, 지역 안내판 등을 다시 바꿨다. 서구청은 교체비용으로 1700여만원을 사용했다.

반면 외래어 도로명칭을 해당 지자체와 주민들이 나서 순우리말로 바꾼 곳도 있다. 경기 파주시 금촌동 금촌택지지구 내에는 ‘금빛로’가 있다. 

원래는 거리 이름이 외래어인 ‘로데오로’였으나 시민을 대상으로 한 공모를 통해 ‘금빛로’로 변경했다. ‘금빛로’는 지역명인 금촌에서 ‘금’을 따오고 지역의 찬란한 번영과 미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빛’을 더해 이름이 만들어졌다.

어떤 지역에서는 마을 주민의 심리적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도로명을 바꾼 곳도 있다. 경남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와 한실리를 잇는 도로명은 원래 마진리의 ‘마’자와 한신리의 ‘한’자를 따서 ‘마한로’라고 했다. 

하지만 빨리 발음하면 ‘마한로’가 ‘망한로’로 들려 마을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불안했다고 한다. 실제로 도로명이 ‘마한로’가 된 이후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있었다. 

이에 따라 주민의 심리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두 마을 명칭을 모두 따서 ‘마진한실로’로 바꿨다. 도로명을 바꾼 이후 마을사람들의 불안감이 해소됐다는 것이 진주시청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어감이 좋지 않은 야동길, 구라길 등도 실제로 존재한다. 야동길은 경남 창녕군 고암면과 전북 고창군 흥덕면에 있으며, 구라길은 경남 함안군 수동면과 경북 청도군 이서면에 있다. 이들 길은 야동마을, 구라마을 앞에 있는 도로명들이다. 

하지만 야동길과 구라길의 이름을 바꿔 달라는 민원은 아직 없다. 대부분 노인들이 거주하는 이들 마을에서 신조어인 이들 단어를 잘 모르는 데다, 옛날부터 이어온 도로명칭을 굳이 바꿀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 마을사람들은 외지에서 도로 이름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이상할 따름이다. 

경남 창녕군청 관계자는 “지역주민들 대부분은 ‘야한 동영상’이라는 야동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며 “야동길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자연마을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주민들 사이에서는 길의 이름을 바꾸려는 움직임도 없다”고 말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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