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과 영국 왕실이 사랑한 샴페인 명가 폴 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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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윈스턴 처칠’(Sir Winston churchill)이란 최고급 샴페인으로 유명한 폴 로저는 1849년에 설립된 이래 루이 로드레처럼 5대가 이어온 가족 중심의 샴페인 명가 중 하나다.

샴페인을 ‘프랑스의 정신’(Soul of France)이라고 하는 데는 역사적으로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샴페인 지방은 오늘날의 프랑스 건국에 있어 정신적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샴페인의 중심 도시 랭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6년째인 기원전 53년에 로마군단을 주둔시키고, 갈리아 부족회의를 소집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중세에는 유럽의 교통 요지로 와인 무역의 중심지였다.

로마제국의 쇠퇴 후 481년 프랑크왕국을 건설한 초대 왕인 클로비스가 498년 이곳 주교인 ‘성 레미’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래, 816년부터 1825년까지 37명의 프랑스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필자는 랭스를 흐르는 벨 강가에 자리 잡은 호텔을 나와 이 역사적인 장소를 다시 보기 위해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향했다.

벨 강을 따라 뻗어 있는 A4 고속도로와 N31 국도를 달리는 수많은 차량 행렬이 보였다. 필자는 잠시 랭스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끼면서 상념에 빠져들었다.

‘서 윈스턴 처칠’ 고급샴페인으로 유명한 에페르네에 있는 샴페인 명가 폴 로저.

‘서 윈스턴 처칠’ 고급샴페인으로 유명한 에페르네에 있는 샴페인 명가 폴 로저.

지금의 N31 국도는 갈로-로만 시대에 로마 군단들이 사용했던 로만가도였고, 역대 프랑스의 국왕들이 대관식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갈 때 이용했던 길이었으며, 지금은 샴페인을 싣고 파리뿐만 아니라 세계로 향하는 산업도로이다.

1차 세계대전 중에는 벨 강을 사이에 두고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2차 세계대전 때는 패배한 독일이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던 도시다.

대관식이 치러졌던 노트르담 대성당은 고대 로마 시대의 목욕탕 부지에 있던 옛 성당이 불에 타서 13세기에 다시 세워졌으나, 1차 세계대전 중 파괴되었고 이후 복구되었다. 고딕식 건축물의 걸작으로 파리, 샤르트르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3대 노트르담 사원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수많은 조각으로 치장되어 있는 웅장한 외관과 성당 안쪽에서 바라보는 거대한 장미창, 샤갈의 작품인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웠다. 이곳 성당을 방문하는 관광객만 한 해에 5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샴페인 지방의 주요 샴페인 생산지는 랭스 남쪽 해발 300m를 넘지 않는 구릉지인 몽타뉴 드 랭스, 에페르네를 흐르는 마른 강변의 발레 드 라 마른, 남쪽의 코트 데 블랑뿐만 아니라 멀리 코트 드 세잔과 트루아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3만2000ha의 면적에서 1년에 약 2억5000만병 이상의 샴페인이 생산되고 있다.

450만병의 샴페인이 숙성되고 있는 폴 로저의 지하셀라. 길이 7km, 깊이33m로 섭씨 9.5도의 낮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450만병의 샴페인이 숙성되고 있는 폴 로저의 지하셀라. 길이 7km, 깊이33m로 섭씨 9.5도의 낮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샴페인의 등급체계(AOC)는 포도밭을 그랑 크뤼·프르미에 크뤼·일반 포도밭으로 등급을 나누고, 그에 따라 포도의 구매 가격이 결정되는 독특한 제도이다.

그것은 샴페인 메이커들이 자체 소유·단일 포도원에서 생산되는 포도와 여러 지역의 포도재배 농가로부터 구매한 더 많은 양의 포도를 배합하여 퀴베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싱글 빈야드(단일 지역 포도원)나 빈티지 샴페인을 제외하고는 레이블에 특별한 등급 표기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샴페인을 흔히들 ‘숨겨진 등급체계’라고 말한다.

특별히 등급 표기를 하지 않는 샴페인
다음날 아침 랭스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샴페인 마을 에페르네에 있는 대표적인 샴페인 명가 폴 로저를 찾았다. 마른 강 남안에 샴페인 명가들이 모여 있는 에페르네는 언제 보아도 샴페인과 같은 기품과 격조를 뽐내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서 윈스턴 처칠’로 유명한 폴 로저의 본사. 현관 위에 필자의 방문을 기념하여 태극기가 꽂혀 있다.

‘서 윈스턴 처칠’로 유명한 폴 로저의 본사. 현관 위에 필자의 방문을 기념하여 태극기가 꽂혀 있다.

그것은 아마도 폴 로저 외에도 모엣 샹동, 페리에-주에, 드 브노주, 드 카스텔란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샴페인 명가들이 뿜어내는 기포와 향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 윈스턴 처칠’(Sir Winston churchill)이란 최고급 샴페인으로 유명한 폴 로저는 1849년에 설립된 이래 루이 로드레처럼 5대가 이어온 가족 중심의 샴페인 명가 중 하나다. 윈스턴 처칠과의 특별한 관계로 주소 역시 윈스턴 처칠 3번가였지만 내비게이션에는 나타나지 않아 지도로 찾아갔다. 

겨우 약속 시간에 맞춰 스페인과 영국에서 온 방문객들과 지하 셀라에서 합류하였다. 450만병의 샴페인이 잠자고 있는 어두운 지하 셀라 곳곳에는 1900년 시설 확장 중 붕괴되었던 사고의 아픈 추억이 여기저기 크랙으로 남아 있었다.

당시의 사고로 폴 로저는 총 500배럴과 100만병 이상의 귀한 샴페인을 잃고 말았다. 수출 담당 이사 휘그 로마냥의 안내로 셀라 방문을 마치고 시음을 위해 한 블록 떨어져 있는 본사로 자리를 옮겼다.

윌리엄 왕자 결혼식 샴페인으로 사용
와인 색깔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색창연한 본사 건물 현관에 반가운 태극기가 스페인, 영국 국기와 함께 걸려 있었다. 손님을 배려한 폴 로저의 마케팅 정신이 놀라웠다. 특별히 화려한 로코코풍의 VIP룸에서 시음이 시작되었는데 이곳 방명록 옆에도 탁상용 태극기가 꽂혀 있었다.

샴페인 명가 폴 로저에서 시음했던 샴페인들. 맨 오른쪽이 ‘서 윈스턴 처칠 2000’이다.

샴페인 명가 폴 로저에서 시음했던 샴페인들. 맨 오른쪽이 ‘서 윈스턴 처칠 2000’이다.

폴 로저가 생산한 여러 종류의 샴페인 중 엑스트라 퀴베 리저브 NV와 2004 빈티지, 그리고 대망의 ‘퀴베 서 윈스턴 처칠’ 2000년산을 시음하였다. 엑스트라 퀴베 리저브 NV는 최고 품질의 Non Vintage 샴페인 중 하나로 신선한 과일과 꽃향기가 수정같이 맑게 느껴졌다.

우리는 영국 총리 처칠이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리더십과 영웅담 때문에 그의 낭만적이고 예술적인 면모를 간과하기가 쉽다. 그는 정치가이기 전에 왕립사관학교 출신으로 전 세계의 전쟁터를 누빈 유명한 종군기자였으며,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위대한 작가이자 뛰어난 화가였다.

특히 두주불사의 애주가로 다양한 술을 매일 즐겼는데, 우연한 자리에서 폴 로저의 샴페인을 접하고 나서부터 열렬한 애호가가 되었다.

역대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랭스의 노트르담 대성당. UNESCO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역대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랭스의 노트르담 대성당. UNESCO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윈스턴 처칠 샴페인의 탄생은 1944년 처칠이 파리의 한 파티에서 폴 로저의 안주인인 미모의 오데트 폴 로저 여사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도버 해협을 넘나든 두 사람의 우정은 1965년 처칠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1975년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샴페인이 바로 ‘서 윈스턴 처칠’이다.

윈스턴 처칠의 퀴베 배합 비율과 양조법은 물론 가문의 비밀이다. 풍부하고 잘 익은 풀 바디의 다소 남성적인 스타일이지만, 기포가 섬세하고 말린 과일과 장미꽃 향기에 우아한 바닐라의 풍미가 느껴짐은 아마도 피노누아를 주품종으로 하여 10년 이상 지하 셀라에서 저온으로 장기 숙성한 결과일 것이다.

필자는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원동력은 그가 생전에 마신 500상자 이상의 샴페인 덕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91세까지 장수하면서 그는 이 지상의 모든 애주가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떠났다.

“나는 알코올을 통해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코올에서 얻었다.”(I have taken more out of alcohol than alcohol has taken out of me) 이후 폴 로저는 2004년부터 영국 왕실의 공식 샴페인 공급자가 되었으며, 2011년 4월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 샴페인으로 사용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글·사진 송점종 우리자산관리 대표·Wine MBA j-j-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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