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와인, 황제의 와인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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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성 와인은 전 세계 와인 생산국에서 다양한 방법과 스타일로 생산하고 있지만, 아직도 샴페인의 품질과 명성을 능가하지는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재위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던 나폴레옹 황제는 일찍이 “승리의 기쁨을 샴페인으로 축하하고, 패배의 아픔 또한 샴페인으로 달랜다”고 하였다. 

세계 최초로 살롱 문화를 만든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여후작은 “샴페인은 마신 후에도 여인의 아름다움을 변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술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샴페인은 한때 일반 서민들이 근접할 수 없었던 황실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즐기는 축제의 술로 자리매김하였다. 그것은 샴페인의 상큼하고 우아한 풍미와 끝없이 피어오르는 현란한 거품의 화려함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고급 문화와 아름다운 예술적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수확이 한창인 샴페인 지방 랭스 근교의 가을 포도원 풍경. 멀리 언덕까지 포도원이 지평선을 이룬다.

수확이 한창인 샴페인 지방 랭스 근교의 가을 포도원 풍경. 멀리 언덕까지 포도원이 지평선을 이룬다.

 

필자는 세계의 미식가들이 동경하는 중세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 디종에서 출발하여 샴페인 지방의 중심 도시인 랭스로 향했다. 샴페인 지방은 그동안 필자가 여러 차례 방문하였지만 가을 단풍이 물든 포도 수확기는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최고급 샴페인 ‘크리스탈’과 ‘윈스턴 처칠’로 유명한 루이 로드레, 폴로저 같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샴페인 명가와 작은 규모이지만 자체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최고 품질의 샴페인을 만들고 있는 필리포나, 그리고 협동조합 형태로 생산하고 있는 마이를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다.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발포성 와인
샴페인(Champagne)은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영어 발음이다. 지금은 지역명보다는 이곳에서 나는 발포성 와인(Sparkling wine)으로 세계에 더 잘 알려져 있다. 샴페인은 ‘샴페인 양조방식’으로 생산된 이 지방의 발포성 와인만이 ‘샴페인’이란 명칭을 사용할 수 있도록 법으로 보호받고 있다.

발포성 와인은 전 세계 와인 생산국에서 다양한 방법과 스타일로 생산하고 있지만, 아직도 샴페인의 품질과 명성을 능가하지는 못하고 있다. 

발포성 와인의 명칭을 스페인에서는 ‘카바’, 이탈리아에서는 ‘스푸만테’(머스캣으로 만든 것은 ‘아스티’, 글레라로 만든 것은 ‘프로세코’라고 한다), 독일은 ‘젝트’, 샴페인 이외 지역의 프랑스에서는 ‘크레망’, 남아프리카는 ‘캡 클라시크’로 부른다. 미국에서는 생산지 명칭을 함께 표시하면 샴페인이란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포도수확 작업 중 포즈를 취해주는 젊은이들. 광활한 샴페인 지방의 포도밭이 마치 바다처럼 느껴진다.

포도수확 작업 중 포즈를 취해주는 젊은이들. 광활한 샴페인 지방의 포도밭이 마치 바다처럼 느껴진다.

샴페인은 이 지방의 특별한 기후와 토양이 어우러져 자연이 빚어낸 우연의 산물이다. 샴페인 지방은 유럽 대륙의 와인 생산지 최북단에 위치해 겨울이 춥다. 

1차 발효가 끝나야 할 와인이 겨울에 잠시 발효를 멈추었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시작된 2차 발효로 생성된 탄산가스가 포함되어 자연스럽게 발포성 와인이 된 것이다.(저가의 발포성 와인은 화이트 와인에 이산화탄소를 주입하여 만든다)

샴페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돔페리뇽은 병목이 깨지고 코르크 마개가 튀어나온 샴페인을 처음에는 잘못 만들어진 ‘악마의 와인’이라고 생각했다. 샴페인을 최초로 개발한 사람이 돔페리뇽이라고 알려진 것은 와전된 것이다. 

세계 최초의 발포성 와인은 기록상 1531년 카르카손의 ‘블랑케드 드 리무’이지만 샴페인 양조방식은 아니었다. 샴페인 양조방식은 1차 발효를 끝낸 와인을 병 속에 넣고 설탕과 효모를 첨가하여 2차 발효를 통해 탄산가스를 만든다. 

다음은 발효 과정에서 생긴 앙금을 제거하기 위해 병을 거꾸로 세워 돌려주는 작업(르뮈아주)을 통해 앙금을 병목에 모이게 한 후, 드라이아이스로 병목을 냉각시켜 병 속에 있는 탄산가스를 유지하면서 앙금을 제거한다.(데고르주망) 이 작업이 끝나면 제거한 양만큼 와인을 다시 채워주는(도쟈주) 복잡한 과정이다. 

크리스탈을 특별 주문한 루이 로드레의 셀라 로비에 있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의 흉상.

크리스탈을 특별 주문한 루이 로드레의 셀라 로비에 있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의 흉상.

여기에는 샴페인의 압력을 견디는 유리병 제조, 코르크 마개가 튀어나가지 않게 철사로 고정시켜주는 뮈슬레의 개발, 병목을 드라이아이스로 냉각시켜 앙금을 제거하는 아이디어 등 200년 동안 인간의 끝없는 도전과 창조의 결실로 1800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샴페인이 탄생하였다.

이후 샴페인은 베르사유에서 빈,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황실의 필수품이 되었으며, 유럽 대륙의 격동기인 19세기에 산업화에 성공하였다. 지금도 랭스나 에페르네를 방문하면 샴페인 명가(이곳에서는 ‘메종’ 혹은 ‘하우스’라 칭한다)의 화려하고 우아한 건물들이 거리를 형성하는데, 부유하고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샴페인이 가져다준 번영과 영광의 산물이다.

겨울 지나고 2차발효로 탄산가스 생겨
샴페인은 일반 와인과 달리 빈티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샴페인 메이커들이 그들만의 비법인 퀴베로 최고의 맛을 내는 샴페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빈티지가 없는 샴페인을 NV(Non Vintage)라고 한다. 퀴베는 포도원, 품종, 수확 연도가 각기 다른 포도주를 혼합하여 만든 샴페인 원료를 말하며, 결국 퀴베가 샴페인의 품질을 결정한다.

샴페인을 만드는 포도 품종은 이곳 테루아에 최적인 샤르도네, 피노누아, 피노뫼니에 세 종류이다. 필자는 랭스에 있는 ‘샴페인의 롤스로이스’로 비견되는 대표적인 가족 중심의 샴페인 명가 ‘루이 로드레’를 찾았다. 

1776년에 설립, 2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루이 로드레의 우아한 본사 건물에서 이브 클레르 여사를 만나 셀라로 이동했다. 셀라 로비에 있는 크리스탈 샴페인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의 흉상이 인상적이었다. 

한창 수확기여서 바쁘게 작업 중인 셀라를 둘러보고 테이스팅 룸에서 테이스팅 시간을 가졌다. 브륏 프르미에를 비롯하여 몇 가지 샴페인을 맛보았지만, 루이 로드레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황제의 샴페인 ‘크리스탈’을 빼놓을 수 없었다.

크리스탈은 러시아 황제 알레산더 2세가 자기만을 위한 샴페인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하여 1876년에 개발한 제품이다. 일반 샴페인병과 달리 병 안을 볼 수 있도록 투명한 크리스탈로 제작되었고,(그래서 샴페인 이름도 크리스탈이었으나 현재는 고품질의 유리병으로 대체되었다) 압력에 견디고 앙금이 모일 수 있도록 병 밑바닥이 쏙 들어간 펀트가 없는 평평한 모양이다. 그것은 몇 차례 암살 위험에 직면했던 황제가 병 안에 폭발물이나 독극물을 숨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황제의 샴페인 루이 로드레의 현란한 크리스탈 모습.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가 주문하여 특별히 개발한 제품이다.

황제의 샴페인 루이 로드레의 현란한 크리스탈 모습.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가 주문하여 특별히 개발한 제품이다.

또한 샤르도네 40%, 피노누아 60%로 배합한 황제만을 위한 최고 품질의 퀴베로 생산하였다. 크리스탈은 다른 고급 샴페인이 가지고 있는 균형 잡히고 복합적인 풍미에 강건하면서도 부드럽고, 섬세하면서도 명료함이 공존하는 자기 정체성으로 시음할 때마다 필자에게 감동을 주었다.

크리스탈의 영광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그에 따른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으나, 1925년 신흥 자본주의 강대국 미국 시장의 개척으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필자는 이것이 단순히 한 샴페인 명가의 성공을 넘어 와인 문화가 한때 왕과 귀족의 전유물에서 대중의 문화로 발전해가는 역사의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만을 위해 크리스탈을 만든 황제는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크리스탈은 우리들을 위해 여전히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 송점종 우리자산관리 대표·Wine MBA j-j-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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