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이석기 사건’ 판결 이후

국보법, ‘내란보안법’으로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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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내란음모 기소 남발 가능성… 다음 타깃 야권으로 확산 우려

2월 17일 수원지법 110호 법정에 소위 ‘RO모임’ 내란음모사건 선고공판이 열렸다. 평소 공판에는 법정 내에 4~5명의 경위들이 앉아 있었던 것과 달리 이날은 30여명의 경위와 법원 직원들이 법정에 들어와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통합진보당 당원들은 내란음모에 있어서만큼은 무죄를 확신했다. 선고 다음날 만난 오병윤 통합진보당 원내대표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다. “국가보안법이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니까 유죄가 나올 수도 있지만 최소한 내란음모 부분만큼은 무죄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17일 법정에 온 통합진보당 당원들과 피의자 가족들의 얼굴 표정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전 공판과 마찬가지로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짙은 감색 양복을 입고 나온 이석기 의원도 지지자들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선고에서 재판부는 1시간 가까이를 ‘북한의 위험성’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한 재판 참가자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희망섞인 분위기는 점점 사라져 갔다”고 말했다.

“이런 식이면 국가보안법 쓸 필요없다”
선고가 끝나자 이 의원과 지지자들의 얼굴에는 낙담한 기색이 완연했다. 한 피고인의 부인은 결과가 믿기지 않는 듯 울다가 쓰러지기도 했고, 재판부에 “정치법원 부끄럽지도 않으냐”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지난 3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법에서 열린 내란음모 사건 결심공판에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미소를 짓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지난 3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법에서 열린 내란음모 사건 결심공판에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미소를 짓고 있다. / 김기남 기자

내란음모 유죄 판결을 두고 일각에서는 국가보안법이 ‘내란보안법’으로 진화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은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국가보안법을 쓸 필요조차 없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연대 집행위원장을 지내는 등 시민사회 활동가 중에서는 국가보안법 사건을 다룬 경험이 제일 많은 인사 중 하나다.

그는 이번 내란음모사건과 기존 국가보안법 사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며 향후 내란음모 기소가 남발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기존의 방식대로 사건이 진행됐다면 검찰에서 미리 이적단체 혐의로 기소했을 것이다. 

그런데 검찰에서 이적단체로 기소하지 않아도 법원에서 한발 더 나아가 조직의 실체가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번 판결은 앞으로 국가보안법을 쓸 필요 없이 내란음모로 기소해도 된다는 의미다”라고 말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도 비슷한 의견이다. 홍 교수는 “이런 식이라면 그동안의 국가보안법 사건은 왜 내란음모로 기소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라며 “미래를 본다면 (국보법 사건들이) 죄다 내란음모가 성립되는 황당한 상황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17일 수원지법에서 열린 내란음모 사건 선고공판이 끝난 후 이석기 의원 등을 태운 법무부 호송버스가 법정을 나가고 있다. / 서성일 기자

17일 수원지법에서 열린 내란음모 사건 선고공판이 끝난 후 이석기 의원 등을 태운 법무부 호송버스가 법정을 나가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재판부의 판결문에 따르면 RO의 존재 여부가 내란음모 유죄 판결의 가장 중요한 근거 중 하나다. 또한 RO의 존재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제보자 이모씨의 증언 내용과 지난해 5월 ‘합정동 모임’(소위 ‘RO모임’) 녹취록이다. 

변호인은 내란음모가 구체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봤지만, 재판부는 “회합에서 폭동의 세부적인 계획에까지 이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논의된 폭동의 실현 가능성과 그 실질적 위협성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다”고 봤다. 

또한 변호인단은 재판 내내 제보자 이씨의 증언과 녹취록의 신빙성을 문제삼았지만, 재판부는 변호인단 주장의 대부분을 배척했다.

제보자 오락가락 진술 법원서 인정
변호인단은 재판 내내 제보자 이씨의 진술이 오락가락했음에도 재판부가 받아들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제보자 이씨는 2003년 RO에 가입했다고 진술했는데 나중에 이를 2004년으로 바꿨다. 

원래는 다른 인물을 총책으로 지목했다가 이석기 의원이 총책이라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국정원 직원과 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금품을 수수했다는 내용도 재판 도중 드러났다.

이상규 통합진보당 의원은 20일 국회 발언에서 “김용판 재판에서는 권은희 과장의 일관된 진술을 배척하더니, 이석기 의원의 재판에서는 (국정원으로부터) 돈까지 받은 제보자의 오락가락 진술을 입맛에 맞게 인용했다”며 유죄 판결을 납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씨 증언의 신빙성을 의문시하는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하며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의 주요 부분에 대해서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확신에 찬 자세로 진술에 임하고 변호인들의 집중적인 반대심문에도 거침없이 답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합정동 모임’이 비밀리에 이뤄졌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한 진보단체 활동가는 “조직의 활동에 필요하면 비공개 모임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비공개 모임 자체가 내란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판결문에 RO 조직원으로 등장하는 임미숙 통합진보당 수원시위원장도 비슷한 취지의 이야기를 한다. “행사는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질 수 있다. 보안수칙을 갖는 것은 어느 정당이나 마찬가지다. 특정 문화가 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재 국정원은 추가적인 ‘내란음모’ 혐의자들의 사법처리를 준비하고 있다. 국정원이 말한 추가 사법처리 예상자들은 이미 소환조사를 마친 9명 및 임미숙 수원시위원장 등 판결문에 등장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합정동 모임 참가자들 중 이미 국정원이 수사한 인물로는 홍성규 진보당 대변인, 우위영 이석기 의원 보좌관 등이 있다. 홍 대변인은 “언론에 언급되는 것을 보니 우려했던 일들이 벌어지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이번 내란음모사건이 진보당 이외에 야권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청호 부산 금정구의원은 “다음에는 정의당이 내란음모나 국가보안법의 타깃이 될 수 있다”며 그 이유로 “정의당 안에도 민주노동당 출신인 NL(자주파) 세력이 있기 때문에 국정원에서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구의원은 원래 통합진보당 내 국민참여당계로 불렸던 인물로 현재는 무소속이다.

국정원, 10여명 추가 사법처리 검토
이 구의원은 ‘경기동부연합’으로 통칭되는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비민주성과 친북한적인 성향을 지적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내란음모 유죄를 모두 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나도 그렇지만 참여계 내에서도 내란을 일으킬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내란음모로 처벌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고 말했다.

박래군 소장은 통합진보당 측도 ‘이미지 쇄신’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통합진보당에 대한 불신이 있기 때문에 (당국에서도) 쉽게 노리고 들어오는 면이 있다. 국민들 사이에 북한 추종세력이라고 낙인찍힌 부분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 스스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평소 북한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도 무조건 회피만 할 것이 아니라 정리된 입장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 박 소장의 진단이다.

오병윤 의원도 당에 씌워진 종북 이미지를 벗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그는 “남북이 더욱 더 화해·협력으로 가는 사이가 된다면 그런 인식들도 없어져갈 것”이라며 “남과 북이 협력으로 갈 수 있도록 평화통일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란음모 피의자 홍순석 부인
“남편이 북한찬양을 한 걸 본 적이 없어요”

1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사옥씨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1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사옥씨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내란음모사건 1심 선고가 내려진 17일, 박사옥씨(41)가 집에 돌아오자 7살짜리 딸은 엄마에게 “왜 혼자 왔냐”고 물었다. 박씨는 딸에게 “아빠 일이 아직 다 안 끝났대”라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박씨는 내란음모사건 피의자 홍순석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부위원장(49)의 부인이다. 박씨는 홍 부위원장과 사이에 12살, 7살 난 두 딸을 두고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큰딸에게는 남편 일을 숨길 수 없었지만,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둘째에게는 “아빠가 멀리 돈 벌러 갔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혹여라도 막내가 알게 될까, 집안에서 컴퓨터도 쓰지 못하게 막을 정도였다. 그런다고 애들이 모를 리 없었다.

“국정원에서 압수수색 들어왔을 때 애들이 현장을 다 봤어요. 어느날은 갑자기 작은 애가 ‘혹시 아빠 잡아간 사람들 경찰 아냐?’라고 묻는데 가슴이 철렁했어요. 제가 정확히 알려주지 않아도 아이들이 어느 정도는 눈치로 알고 있었던 거죠.”

박씨의 작은딸은 3월에 있을 자신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아빠가 올 것이라고 아직도 기대하고 있다.

선고 전날인 16일 박사옥씨는 오랜만에 집안 대청소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 시작한 청소는 해가 진 뒤에야 끝났다. 지난해 8월 28일 남편이 국정원에 의해 체포된 지 6개월 만이었다.

“내일이 되면 혹시 남편이 감옥에서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란음모 혐의는 무죄가 나고 국가보안법 혐의는 집행유예가 되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이튿날 박씨와 다른 피의자 가족들은 약간의 희망을 안고 수원지법을 찾았다. 석방된 남편과 바로 만나게 하려고 자녀들을 데려온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다. 

홍 위원장은 징역 6년에 자격정지 6년을 선고받았고, 다른 피의자들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선고가 끝난 이후 박씨는 한동안 방청석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한다.

“지난 5개월 동안 김정운 판사가 재판을 공정히 진행했다고 생각했는데, 판결 내용은 그동안 봤던 그 판사가 아닌 거예요. 검사의 주장을 다 받아들일 거라면 왜 수십 번이나 재판을 했을까. 암담하면서도 억울한 생각뿐이었어요.”

내란음모사건을 유죄로 이끈 결정적 기여자인 제보자 이아무개씨는 홍순석 부위원장의 대학 후배다. 여성단체를 운영 중인 박사옥씨도 종종 남편과 함께 있는 이씨를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남편과 절친이었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프락치’가 되는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활동을 하다 보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마련인데 저도 모르게 ‘저 사람도 혹시?’라는 의심이 어쩔 수 없이 드는 때가 있어요. 과연 앞으로 사람을 믿고 살아갈 수 있을는지….”

판결문에 따르면 홍 부위원장은 제보자 이씨 등과 함께 세포 모임을 하며 주체사상을 학습했고, 북한을 찬양하는 발언을 수차례 했다. 박씨는 물론 판결문보다는 남편을 믿는다고 말했다.

“저는 지금도 남편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아요. 그동안 남편이 그런(북한 찬양) 행동을 한 걸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제 남편은 전쟁 반대 평화운동을 해왔던 사람인데 무장투쟁을 언급했다는 식으로 나오는 게 황당할 따름이죠.”

그래도 박씨는 한가닥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한때 남편의 ‘동지’였던 제보자 이씨의 마음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선고가 끝나고 나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과연 이씨는 이 결과를 듣고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을까. 지금 결과를 보고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일말의 양심이 그에게 남아 있다면 2심에서는 진실을 밝혀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어요.”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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