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한국의회 국제망신 자초하나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철도민영화 방지법 한·미FTA 위반 여부 WTO에 유권해석 의뢰 논란

‘세계무역기구(WTO)가 철도 민영화 방지법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위반 여부를 판단한다?’

국회가 철도 민영화 방지법 등이 한·미 FTA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WTO에 물어보기로 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국회가 스스로의 입법권을 버리고 나라 망신을 자초한다”는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만약 WTO가 한·미 FTA 위반이라고 판단하면 한국 국회가 이를 따라야 하느냐는 것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아이디어가 나오게 됐을까.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의 자회사인 수서발 KTX 법인이 면허를 받는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민주당이 제안한 철도 민영화 방지법이 한·미 FTA와 상충되는지 여부였다. 이 법안은 수서발 KTX 법인의 소유권을 공공부문이 갖도록 하는 것이 골자로, 민주당 변재일 의원이 지난해 12월 18일 대표발의했다.

1월 13일 철도산업발전소위 강석호 위원장을 비롯한 여야 의원들이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 회의를 열어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 | 박민규 기자

1월 13일 철도산업발전소위 강석호 위원장을 비롯한 여야 의원들이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 회의를 열어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 | 박민규 기자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등 관계부처는 “법으로 철도사업자의 소유권을 공공부문으로 한정하는 것은 한·미 FTA에 위배된다”며 반대의 뜻을 밝혀 왔다. 국토부의 면허를 통해 외국자본을 통제하는 것은 국제협정에 위배되지 않지만 법률로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정부의 입장을 반박했다. 대표적인 근거는 ‘공기업 민영화와 관련된 어떤 정책적 결정도 우리 정부가 자유롭게 내릴 수 있으며, FTA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설명한 옛 외교통상부(현 외교부)의 자료다. 이런 자료가 버젓이 있는데 왜 한 입으로 두 말 하느냐는 것이다.

1월 13일 열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산하 철도산업발전소위원회 2차 회의에서도 이 사안에 대한 설전이 되풀이됐다. 소모적인 공방을 중단하고 제3자의 판단을 받아보자는 차원에서 민주당의 국토위 간사인 이윤석 의원이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정부가 법제화 반대하자 민주당이 제안
“그렇다면 이렇게 합시다. 외교부하고 산업부 간 의견 차이가 있으므로 WTO에 두 의견에 대한 유권해석을 의뢰합시다. 어떻습니까?”

여형구 국토부 2차관은 부정적인 뜻을 밝혔다. “우선 첫째로 아직 제정도 안 된 법안 내용을 가지고 논의한다는 게 실체가 없어 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둘째는 WTO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시장 개방을 얘기하는 곳이고, FTA는 WTO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양자간 개방을 추구하는 무역협정입니다. (WTO에 유권해석을 의뢰하는 게)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 의원은 일단 이 반론에 수긍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예, 좋습니다. 이것은 법률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의원은 다른 주제에 대한 질의를 이어가다 다시 WTO 유권해석 의뢰 카드를 꺼내들었다. “정부의 FTA 위반이라는 그 해석 있잖아요. 그것을 WTO 사무국에다 문의하면 된대요. 그것 뭐 한 닷새면 온다니까요. 정부에서도 (국회가 문의하는 걸로) 알고 계십시오, 차관님.”

철도발전소위 위원장인 새누리당 강석호 의원도 이 의원의 제안에 동의했다. 강 의원은 회의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정리했다. “FTA 위배인지에 대한 정확한 유권해석을 국제기구에서 할 수 있는지 한 번 알아보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회의 뒤 여야가 WTO 유권해석 의뢰에 합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통상 전문가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국회의 무능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입법주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했다.

한·미 FTA를 비준해 국내법 체계로 받아들인 장본인은 바로 국회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제3자에게 유권해석을 의뢰하겠다는 건 한·미 FTA의 내용도 모른 채 비준을 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국내에서 해결할 사안을 굳이 국제기구로 가져가는 건 국내 정책주권을 스스로 제약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기업형 슈퍼마켓(SSM)을 규제하기 위해 2011년 개정된 유통상생법처럼 한·유럽연합(EU) FTA 위반이지만 ‘골목상권 살리기’라는 여론에 힘입어 국회가 입법을 이뤄낸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유통상생법은 한·EU FTA, 한·미 FTA 등과 명백히 충돌하지만 영세 자영업자 보호를 위한 규제 기능을 지금도 발휘하고 있다.

국회 스스로 무능하다고 고백하는 꼴
유권해석을 설사 의뢰한다고 해도 WTO가 이를 반려할 가능성도 있다. 이 교수는 “WTO와 같은 국제기구는 특정 국가의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항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여형구 2차관의 지적대로 양자간 협정인 FTA와 관련된 해석을 다자간 협정을 관장하는 WTO에 물어본다는 게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WTO 유권해석 의뢰에 대한 비판이 잇따르자 국회 내부에서도 재고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강 의원은 1월 17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WTO에 문의를 하면 한국 위상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양자간 FTA에 대한 내용을 다자간 무역기구에 문의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1월 21일 열리는 철도발전소위 3차 회의에서 WTO 유권해석 의뢰에 대해 야당과 다시 논의를 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를 제안한 이 의원은 “정부·여당이 ‘공기업 민영화와 관련된 어떤 정책적 결정도 우리 정부가 자유롭게 내릴 수 있다’는 해석에 동의하지 않으면 예정대로 WTO에 질의서를 보내겠다”는 계획이다.

철도발전소위 3차 회의에서 여야가 기존 합의를 뒤집을지, 예정대로 WTO에 유권해석을 의뢰할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김지환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baldkim@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