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축제의 와인 보졸레 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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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그렇게 열광했던 보졸레 누보의 신드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지금은 철 지난 유행처럼 시들어가고 있다.

“보졸레 누보가 막 도착하였다!(Le Beaujolais Nouveau est arrive!)”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화려한 포스터를 백화점, 레스토랑, 와인숍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매년 11월 셋째 목요일 0시, 그 해의 보졸레 누보가 자정을 기해 전 세계에 동시에 출시되면 세계 와인애호가들은 한동안 그 순간을 열광하였다. 한국은 시차로 인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보졸레 누보를 맛볼 수 있는 행운의 나라였다.

필자는 마콩시에서 남쪽으로 TGV와 A6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손계곡을 따라 보졸레 누보로 유명한 보졸레 지방의 주요 와인 생산지역을 탐방했다.

보졸레 지방의 랜드마크인 물랭 아 방 지역의 아름다운 포도원 정경. 풍차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보졸레 최고 품질의 와인을 생산한다.

보졸레 지방의 랜드마크인 물랭 아 방 지역의 아름다운 포도원 정경. 풍차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보졸레 최고 품질의 와인을 생산한다.

 
보졸레는 동쪽에 손강을 끼고 서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보졸레 산맥 구릉에, 장장 55㎞에 걸쳐 있는 광활한 지역이다. 보졸레 최고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북쪽의 생타무르에서 남쪽 코트 드 부루이까지 10개의 보졸레 크뤼 지역을 지나는 동안 단풍으로 물든 가을 포도원이 시골마을과 어우러져 연출해 내는 만추의 풍경이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보졸레는 중세 부르고뉴 공국에 속했던 영토로 공식적으로 부르고뉴 와인에 속하지만 와인의 스타일이나 토양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독립된 와인 생산지역이다. 포도 재배 면적이 2200ha, 연 생산량이 130만hl(헥토리터)로 부르고뉴를 능가하는 보졸레 와인은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값싸고 누구나 마실수 있는 서민의 와인
우선 부르고뉴의 보석이라고 할 수 있는 피노누아가 아니라 가메(Gamay)라는 포도품종으로 와인을 만든다. 토양은 화강암 기저 위에 오랜 세월 풍화된 편암에서 생성된 점토와 모래가 섞여 있는 분홍색 표토로 이루어진 특이한 테루아를 가지고 있다.

양조 방법도 부르고뉴와는 다르게 탄산가스 침용 방법을 통해 가메의 풍부한 과일 향과 색깔을 우러나게 하고, 타닌과 사과산을 최소화시켜 누구나 마시기 쉬운 와인을 만든다. 

탄산가스 침용 방법은 포도 알을 파쇄하지 않고 포도송이를 통째로 밀폐된 발효조에 넣어 탄산가스에 의해 포도 알갱이가 자연스럽게 발효를 일으키도록 하는 기술이다. 인간의 수명과 비슷한 가메는 가지치기를 하지 않고 한 그루씩 말뚝에 묶어 자유롭게 자라게 한다.

중세 부르고뉴 공국 시기에는 가메가 피노누아에 비해 저급 와인이란 이유로 보졸레 지역을 제외한 부르고뉴 지역에서의 재배를 칙령으로 금지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보졸레 와인은 값싸고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는 서민의 와인이란 콤플렉스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리옹으로 피난 온 파리지앵(파리시민)들이 고급 와인 대신 보졸레를 즐겨 마시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100년 된 기차 역사를 개조하여 만든 와인박물관 ‘르 아모 뒤 뱅’에 있는 조르주 뒤뵈프의 와인숍.

100년 된 기차 역사를 개조하여 만든 와인박물관 ‘르 아모 뒤 뱅’에 있는 조르주 뒤뵈프의 와인숍.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보졸레 와인 산업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탄생한 마케팅 전략이 바로 보졸레 누보 와인축제다.

보졸레 누보란 그 해 생산된 가메로 만든 와인으로 불과 한두 달 숙성시킨 햇와인을 말하며, 원래 이 지역에서 농부들이 즐겨 마셨던 와인이다. 

보졸레 누보는 보졸레, 보졸레 빌라주, 보졸레 크뤼 등급 중 가장 낮은 보졸레 등급에 속하지만 보졸레 와인을 세계에 알린 일등공신이다. 보졸레 와인은 지나치게 가볍고 오래 숙성시킬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반면, 신선하고 과일향이 풍부하며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보졸레 누보의 성공에는 보졸레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와인메이커 조르주 뒤뵈프(Georges Duboeuf)의 공이 컸다. 일찍이 보졸레 와인의 약점을 간파한 그는 이 지역 와인메이커들을 설득했다. 약점을 역이용하여 빨리 만들고 빨리 마실 수 있는 보졸레 누보를 축제화하는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제안하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상품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꾼 역발상, 축제를 통한 문화 마케팅, 11월 셋째 목요일 0시(처음에는 11월 15일이었음)부터 마실 수 있다는 와인 출시의 이벤트화, 전 세계 시판일에 맞추기 위한 가장 빠른 운송방법의 선택, 예술가가 그린 화려한 꽃무늬의 레이블 장식 등 온갖 마케팅 기법이 총동원되어 세계인을 열광케 한 성공 스토리는 지금도 마케팅 전략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소개되고 있다.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고 출시 이벤트화
그러나 세계가 그렇게 열광했던 보졸레 누보의 신드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지금은 철 지난 유행처럼 시들어가고 있다. 그 원인은 아마도 보졸레 누보가 일종의 유행상품이란 속성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와인에 대한 상식과 소득이 높아지면서 저급 와인에서 정통 와인으로, 가벼운 와인에서 무거운 와인으로 유행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조르주 뒤뵈프 와인박물관의 레스토랑에서 마셨던 보졸레 크뤼 등급의 물랭 아방 와인.

조르주 뒤뵈프 와인박물관의 레스토랑에서 마셨던 보졸레 크뤼 등급의 물랭 아방 와인.

정통 와인이 김장김치와 고전음악이라면 보졸레 누보는 겉절이 김치나 대중음악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와인의 전통과 역사를 중요시하고 있는 보르도에서는 축제기간에도 보졸레 누보를 찾기가 힘들다. 

필자가 보르도에서 와인 MBA 시절을 보낼 때 보졸레 누보 출시일에 보졸레 누보를 파는 와인바를 찾지 못해, 결국 아이리시 펍에서 축구경기를 시청하며 기네스 맥주를 마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필자는 낭만적인 풍차가 있는 물랭 아 방 마을을 거쳐 조르주 뒤뵈프와 최근 빌라주급 보졸레 누보를 국내에 선보인 루이 자도의 샤토 데 작크가 있는 로마네슈-토랭 마을을 방문하였다. 

조르주 뒤뵈프는 보졸레를 대표하는 와이너리답게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기차 역사를 매입하여 ‘르 아모 뒤 뱅’이라는 와인박물관, 레스토랑, 와인셀러와 와인숍을 운영하고 있다. 부티크호텔 같은 인테리어를 보면서 그의 예술 마케팅 철학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시간에 이곳 레스토랑에서 이 지역의 쇠고기 안심 요리와 보졸레 크뤼인 조르주 뒤뵈프의 ‘2009년산 프레스티주 물랭 아 방’을 주문했다. 물랭 아 방 마을의 이름은 중세시대 손강변에 많이 있던 풍차에서 유래되었고, 이곳은 보졸레에서도 최고 품질의 와인생산지로 유명하다.

필자는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붉은 장미꽃과 열매 향에 향신료를 품은 단단한 풍미와 농밀한 구조감을 음미하면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보졸레의 새로운 세계에 매혹되었다. 

어쩌면 앞으로 보졸레 누보의 새로운 마케팅 전략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들만의 전통과 개성을 가진 정통 보졸레 가메 와인과 가볍게 마실 수 있는 대중 와인인 누보를 접목시키는 것에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

보졸레 누보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고전상품으로서의 와인과 끝없이 변화를 요구하는 패션상품으로서의 와인에 대한 새로운 마케팅 전략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되었다. 

필자는 한때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었던 보졸레 누보의 축제가 다시금 부활하기를 기대하면서 좀 더 머무르고 싶던 아름다운 보졸레를 뒤로 하고 리옹으로 향했다.

<글·사진 송점종 우리자산관리 대표·Wine MBA j-j-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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