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수서발 KTX-한·미FTA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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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지분 ‘민간매각시 면허 취소’ 방침은 FTA 위반 소지

“수서발 KTX 회사에 대해 철도사업 면허를 발급하면서, 민간에 매각하게 되는 경우에는 면허가 취소되도록 하는 더욱 확실한 민영화 방지장치를 마련할 것임도 약속했습니다.”

민영화 방지 법제화는 “FTA 위배”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이 12월 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발표한 대국민 호소문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철도 민영화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정부가 꺼낸 카드는 수서발 KTX 법인의 지분을 민간에 매각하지 않는 조건으로 면허를 발급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국내용 대책’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인해 부메랑이 돼 돌아오고 있다. 민주당이 요구해온 ‘민영화 방지법’뿐 아니라 정부의 접근법 역시 한·미 FTA 위반이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연혜 철도공사사장(오른쪽)이 12월 23일 철도파업과 관련해 열린 국토교통위 전체회의에서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물을 마시고 있다. | 박민규기자

최연혜 철도공사사장(오른쪽)이 12월 23일 철도파업과 관련해 열린 국토교통위 전체회의에서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물을 마시고 있다. | 박민규기자

국토부는 2003년 철도산업발전기본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2005년 철도시설 부문은 한국철도시설공단으로, 철도운영 부문은 한국철도공사(코레일)로 분리됐다.

국토부는 2004년 12월 31일 철도사업법을 제정해 코레일 이외에도 철도사업 면허를 받은 민간사업자가 운영권(철도운송서비스)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은 6개월 뒤부터 적용됐고 2005년 7월 1일 이후에는 민간사업자도 운영권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이 법의 내용은 한·미 FTA에 그대로 반영됐다.

한·미 FTA 부속서Ⅰ(현재 유보)은 “코레일만이 2005년 6월 30일 이전에 건설된 철도노선의 철도운송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다. 경제적 수요 심사에 따라 국토해양부 장관의 면허를 받은 법인만이 2005년 7월 1일 이후에 건설된 철도노선의 철도운송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경제적 수요 심사에 따른 면허라는 단서가 달려 있긴 하지만 원칙적으로 2005년 7월 1일 이후 노선부터는 국내외 민간사업자도 철도운송서비스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유럽연합(EU) FTA도 현재 운영 중인 노선은 개방하지 않지만 신설 노선에는 심사를 거쳐 면허를 줄 수 있도록 돼 있다.

하지만 국토부가 국내 철도시장 여건상 공공부문 지분만이 코레일 자회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판단해 이 자회사에만 면허를 주려는 것은 결국 국내외 다른 민간업체의 참여를 사실상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 협정과 배치된다.

정부는 민주당이 요구해온 민영화 방지법이 한·미 FTA 위반이라며 법제화를 거부하고 있다. 서승환 국토부 장관은 12월 23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현안보고에서 “(민영화 방지를) 법제화할 경우 한·미 FTA 역진방지 조항에 위배될 수 있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다음날인 24일 국무회의 직후 정홍원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철도파업 관련 관계장관회의에서 정부는 “민영화를 안 하겠다는 내용을 법에 명시, 수서발 KTX 운영사에 대해서만 제한하는 것은 입법 기술상 곤란하다”며 “국가 외의 투자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한·미 FTA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국토부 “FTA에 저촉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서발 KTX 법인 지분을 민간에 매각하지 않는 조건으로 면허를 발급하겠다는 국토부 방침 역시 한·미 FTA, 한·EU FTA 위반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외교통상위원장인 송기호 변호사는 “같은 내용을 법으로 막든, 정부 처분으로 막든 면허 심사를 받을 기회 자체를 차단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미국 자본의 투자를 허용한다 해도 ‘민간 매각 시 면허 취소’ 방침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한신대 이해영 교수는 “사실상 정부의 지배하에 있게 될 수서발 KTX 법인에 설사 그것이 단 1달러라 해도 미국 자본의 지분투자가 포함된다면 ‘민간 매각 시 면허 취소’ 등의 조치는 (미국 자본에) 이행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돼 한·미 FTA 위반 소지가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FTA 위반을 피하면서도 민영화 논란을 불식시킬 수 있는 대안은 새로운 면허를 내주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송 변호사는 “철도 민영화 논란과 FTA 위반 소지의 근본 원인은 굳이 자회사를 설립하려는 정부 방침에 있다”며 “새로운 면허를 내주지 않고 코레일이 수서발 KTX 노선을 운영하면 FTA 위반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교수도 “정부는 이제라도 실효성과 진정성이 의심되는 국내용 헛대책을 남발하기보다 수서발 KTX 법인 설립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토부는 이 같은 지적을 반박하고 나섰다. 국토부는 12월 26일 해명자료를 내고 “국토부의 면허를 통한 통제는 FTA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민영화 방지법은 제도를 바꿔 외국자본이 원천적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어서 FTA 위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만, 수서발 KTX 법인과 같은 개별 사안에 대해 공공부문 지분이 들어오는 게 좋겠다고 결정하는 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서발 KTX 법인에 투자하려는 미국 기업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기업은 민간자본이기 때문에 사실상 면허 심사를 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이다. 설사 이 기업이 면허 신청을 했어도 공공부문 지분으로 구성돼 있지 않아 신청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국토부는 이런 결정이 재량권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당국의 재량에 따라 사례별로 면허를 내주기도 하고 안 내주기도 하면 이는 제대로 된 경제적 수요 심사라고 볼 수 없다는 게 통상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국 자본은 당국의 모호한 재량적 기준으로 인해 사실상 한국 철도시장에 접근을 할 수 없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김지환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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