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올해의 디딤돌 판결

집회시위자 무분별 체포에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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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판결’은 선정 못해, 정신장애인 보험가입 거절행위 철퇴도 약자 인권 보호에 기여

주간경향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함께 ‘2013 올해의 판결’을 선정했다. 한 해 동안 인권을 옹호하고 법치주의를 확립해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성장시킨 디딤돌 판결 10개와 국민의 인권과 정치·사회·경제적 권리를 후퇴시킨 10개의 걸림돌 판결이 포함됐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첫해인 올해 ‘최악의 판결’은 있었지만 ‘최고의 판결’은 선정되지 않았다. 특히 주목할 것은 ‘10대 걸림돌 판결’ 중 ‘최악의 판결’을 포함해 6개가 대법원 판결이라는 사실이다. 대법원의 보수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올해의 판결은 민변의 13개 위원회와 회원들, 선정위원들이 추천한 54개 후보를 놓고 최종 회의를 거쳐 추려냈다. 심사위원단엔 위원장을 맡은 이유정 변호사(민변 부회장)를 비롯,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와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형사법), 강성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 김도형 변호사(민변 사무총장), 김종보 변호사(민변 사무차장), 박근용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신수경 새사회연대 공동대표, 경향신문 류인하 기자가 참여했다.

2009년 4월 정리해고에 반발하며 파업에 들어간 쌍용차 노조원들이 경찰과 격렬하게 대치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2009년 4월 정리해고에 반발하며 파업에 들어간 쌍용차 노조원들이 경찰과 격렬하게 대치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올해의 판결’ 선정위원단이 ‘최고의 디딤돌 판결’을 선정하지 못한 것은 최고 법원인 대법원이 올 한 해 동안 인권 개선과 법치주의 확립에 큰 영향을 주는 결정적 판결을 내놓지 못한 탓이 크다. 그러나 하급심에서는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을 지지한 다수의 판결이 나왔다.

성소수자 인권신장에 기여
대표적인 것이 적법절차를 지키지 않고 무분별하게 집회시위자를 체포한 경찰에 제동을 건 판결이다. 

수원지법 형사10단독 이상훈 판사는 2009년 쌍용자동차 사태 당시 경찰의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조합원들의 체포를 저지한 민변 노동위원장 권영국 변호사(50)를 불법연행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로 기소된 경찰관 유모 경감(47)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전투경찰 중대장인 유 경감이 전경대원들에게 지시해 조합원들을 에워싸고 이동을 제한한 행위는 체포에 해당하는데도 체포이유조차 제때 고지하지 않고, 불법체포에 항의하며 조합원 접견을 요청한 권 변호사를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체포한 것은 공권력 행사라는 미명 아래 헌법이 정한 적법절차 원칙의 본질을 손상시킨 행위라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변호인의 피해자 접견권을 막고 36시간 동안 불법감금한 경찰의 행위는 국가 공권력 행사의 정당성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초래할 수 있는 것으로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밝혔다.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한 판결도 눈에 띈다. 서울서부지법은 외부성기 성형을 전제로 성별정정을 해오던 기존 결정례와 달리 외부성기 성형을 하지 않은 남성 성전환자에 대해서도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정정신청을 허가했다. 그동안 성별정정의 전제로 해온 외부성기 성형은 일본과 한국에만 있는 엄격한 요건으로,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에 가장 큰 장벽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의학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수술이고, 수술비용도 일반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액이기 때문이다. 성전환자들은 자신의 성정체성대로 성별정정을 하기 위해 사실상 목숨을 담보로 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 결정을 계기로 인천지법 부천지원 등 다른 법원에서도 유사한 결정이 확산되는 등 성소수자의 인권신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남양유업 대리점 손해배상 인정
그동안 보험회사가 관행처럼 해온 정신장애인의 보험가입 거절 행위에 철퇴를 내린 판결도 디딤돌 판결로 선정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박대준 부장판사)는 정신장애3급인 박모씨(40)가 약물치료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보험인수를 거절한 동양생명에 “박씨에게 100만원을 위자료로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정신장애 재발방지를 위해 지속적인 약물복용을 할 수밖에 없는 정신장애인에게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는 이유로 별다른 조사 없이 보험가입을 거절한 것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이 금지하는 ‘차별행위’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북한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인터넷 매체인 <우리민족끼리>에 실린 글 200여건을 트위터에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유죄를 받은 박정근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수원지법 형사3부(장순욱 부장판사)의 판결도 상식을 확인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선을 앞두고 대선후보를 풍자한 포스터를 길거리에 부착한 혐의(공직선거법위반)로 기소된 팝아티스트 이하(본명 ‘이병하’)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의 판결과, 올해 최대의 화두였던 ‘갑을(甲乙) 논란’을 일으켰던 남양유업 본사의 속칭 ‘밀어내기’에 대해 대리점주가 입은 손해는 남양유업사가 전액 손해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한 서울중앙지법 민사83단독 오규희 판사의 판결도 디딤돌 판결로 꼽혔다.

내년 1월 첫 변론기일을 앞두고 있는 고용노동부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의 효력을 정지한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반정우 부장판사)의 결정도 비록 실제 판결을 앞두고 있지만 눈여겨 봐야 할 결정으로 선정됐다. 대법원 판결 중에서는 아내 강간을 인정한 판결이 유일하게 선정됐다.

올해의 10대 디딤돌 판결 ‘한줄평’

(자료: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무순)

●외부성기 성형 없는 남성 성전환자에 대한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 정정신청 허가 결정(서울서부지법)
 “성소수자의 인간 존엄성 보장을 위한 초석을 닦은 소중한 판결”

●아내 강간죄 인정(대법원 전원합의체)
 “설사 부부간에 성생활의무라는 것이 있더라도 성적 자기결정권은 침해할 수 없다”

●<우리민족끼리> 리트윗한 박정근씨에 대해 무죄 선고(수원지법)
 “단순한 리트윗만으로는 국가 존립·안전에 위기가 초래될 수 없다는 당연한 상식을 판결로써 확인받아야만 하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수용자의 변호인 접견교통권을 보장한 결정 2건(헌법재판소)
 “흉악한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재판받을 권리와 변호인에게 조력받을 권리는 헌법으로 보장돼 있다”

●약물치료를 받는다는 이유로 정신장애인의 보험가입 거절한 보험회사 행위는 차별금지법이 금지하는 차별행위에 해당(서울중앙지법)
 “그동안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무 황당한 일을 겪으셨죠? 보험회사는 당황하시면 안 됩니다”

●대선 앞두고 풍자미술가가 후보자를 그린 포스터를 길거리에 부착한 행위는 공직선거법 위반이 아니어서 무죄(서울중앙지법)
 “검사에게는 어려운 예술을 법원은 상식적으로 판단하였다”

●남양유업본사 과잉공급(속칭 ‘밀어내기’)으로 발생한 대리점주 손해에 대해 남양유업 본사 손해배상책임을 전액 인정(서울중앙지법)
 “갑을관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을’들이 ’갑’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폭발한 그 울분을 법원은 외면하지 않았다”

●난민 보호를 강화한 판결 2건(행정법원)
 “이제 우리나라도 난민 인권 후진국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의미 있는 판결들이 나왔다”

●고용노동부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정지(행정법원)
 “정부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대한 법원의 정상적인 재판. 대통령님, 어느 누구도 헌법을 부인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하라면서요? 그런데 노동3권은 헌법에 있거든요”

●변호인 피해자 접견교통권 방해 경찰관에게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및 직권남용체포죄 인정(수원지법)
 “변호사를 함부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체포한 경찰관, 더 이상 공무집행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류인하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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