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TPP 막차 타려는 한국의 입장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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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무역수지 악화 가능성 높고 농수축산업 희생 불가피

“정부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에 관심을 표명하고, 기존 참여국과 예비 양자협의에 나서겠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1월 29일 서울 여의도 수출입은행에서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한 말이다. “한국의 TPP 참여는 타이밍의 문제”라고 했던 웬디 커틀러 미 무역대표부 부대표 대행의 ‘예언’이 서서히 현실화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관심 표명이 TPP 참여 확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거의 없다.

TPP 참여국은 올해 말을 협상 타결 시한으로 삼고 있다. 참여국 간의 이견 때문에 올해 말까지 협상이 마무리될 가능성은 낮지만, 한국은 타결 시점이 언제가 되든 막차를 타게 되는 셈이다. 한국은 과연 타이밍을 잘 잡은 것일까. 또 한국이 TPP에 참여하게 되면 우리 경제에는 어떤 영향이 있을까.

TPP는 ‘Trans Pacific Partnership’의 약어다. 미국·일본·호주·멕시코·싱가포르·칠레·페루·베트남·말레이시아·캐나다·브루나이·뉴질랜드 등 12개국이 협상에 참여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이 참여하면 13번째 나라가 된다. 

11월 29일 우태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실장(가운데)이 오후 서울 여의도 수출입은행에서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 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날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회의에서 정부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기존 참여국과 예비 양자협의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11월 29일 우태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실장(가운데)이 오후 서울 여의도 수출입은행에서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 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날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회의에서 정부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기존 참여국과 예비 양자협의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미국은 TPP를 ‘21세기형 FTA’로 부르며 앞으로 아시아·태평양지역 경제 통합의 표준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아태지역에서 중국을 포위하려는 미국의 전략인 셈이다. 중국으로서는 이 때문에 한국의 관심 표명이 달가울 리 없다.

중국 눈치 보던 정부 입장 변화
한국은 중국을 자극할 수 있는 TPP에 왜 뛰어들려고 하는 걸까. 올해 3월까지만 해도 TPP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미온적이었다. 현 부총리는 12월 1일 기자들과 만나 “3월부터 (정부 내에서) TPP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며 “(당시는) 미국, 아세안 등과 이미 FTA를 체결했기 때문에 ‘좀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미국과 중국의 통상정책 변화가 TPP에 적극적인 쪽으로 한국을 자극했다고 현 부총리는 설명했다. 미국이 도하개발어젠다(DDA)보다 미·유럽연합(EU) FTA, TPP 등 지역 무역협정에 무게중심을 뒀기 때문에 TPP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그는 또 “중국이 TPP를 배타시하는 입장이 완화됐다”며 “중국 내 연구소들에서도 중국이 TPP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통상전문가들은 미국의 ‘보이지 않는 압력’이 한국 정부의 입장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분석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한국이 이번에 TPP에 관심 표명을 한 이유로 미국을 지목했다. 이 교수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펼치는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한국을 포함시킨 TPP라는 성과물이 내년 하반기 중간선거를 앞두고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한국은 이미 미국과 높은 수준의 FTA를 맺었기 때문에 TPP 협상과정에서 미국과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높은 수준의 개방을 꺼리는 개도국을 미국과 함께 압박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은 이미 한·미 FTA를 통해 서비스·투자, 규범 등의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개방을 했기 때문에 TPP 참여로 인해 치러야 할 비용이 적다.

미국의 ‘보이지 않는 압력’ 작용
하지만 한국의 관심 표명 뒤 미국에서 미묘한 발언이 나왔다. 마이클 프로먼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11월 30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한국의 관심 표명을 환영했다. 하지만 프로먼 대표는 “현재 진행 중인 TPP 협상이 타결되기 전에 한국이 협정에 합류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밝혔다. 이 발언을 둘러싸고 해석이 분분하다.

‘한국이 막판에 버스를 타려 했지만 버스는 이미 지나갔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미국이 뒤로는 한국에 문을 열어주겠다고 해놓고선 기선제압 차원에서 다른 이야기를 했다는 분석도 있다. 대단한 선심을 쓰는 것처럼 하면서 한국에 ‘비싼 입장료’를 물리겠다는 태도라는 것이다.

TPP가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은 한·일 FTA라는 틀로 좁혀볼 수 있다. TPP에 참여하는 12개국 중 한국과 무역협정을 맺지 않은 곳은 뉴질랜드·캐나다·호주·멕시코·일본 등 5개국이다. 

일본을 제외한 4개국이 한국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가량에 불과하다. 결국 핵심은 일본이라는 얘기다. 한국의 TPP 참여가 사실상의 ‘한·일 FTA’라고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자동차를 포함한 자동차·기계산업 관계자들은 일본의 시장개방 압력에 대한 우려로 TPP 참여에 반대하고 있다. 정부도 ‘높은 수준의 대일 시장개방’ 시에는 제조업 분야의 피해와 대일 무역수지가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를 인정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우태희 통상교섭실장은 “일본과는 한·중·일 FTA 협상을 진행 중”이라며 “일본 제조업의 시장개방 압력, 협상 가입조건을 면밀히 살펴보고 (우리 업계가) 감내할 수 있는 부분인지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농수축산업의 피해도 불가피하다. 한국은 동시다발적인 FTA를 체결해 오면서 이들 분야를 ‘희생양’으로 삼아온 측면이 있다. 그런데 한국이 TPP에까지 참여하면 농수축산업계는 설상가상의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TPP 참여 시 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에 농수축산물 시장을 일정 수준 개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정부가 TPP 참여 시 경제적·외교적으로 어떤 실익이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서둘러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주사위는 사실상 던져졌다. 한국은 12월 3일부터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WTO 9차 각료회의에서 호주·캐나다 등과 TPP 참여를 위한 예비 양자협의를 시작했다. TPP라는 거대한 지역 무역협정에 서둘러 들어가기 위해 한국이 얼마나 많은 입장료를 치러야 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지환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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