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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4구로 나간 타자가 다시 타석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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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너스 대타’는 경기당 양팀이 딱 한 번씩 타순과 교체 아웃에 대한 걱정 없이 대타를 쓸 수 있게 하는 제도다.

10월 14일, 밤 9시 8분. 준플레이오프 1, 2차전을 잡아내며 플레이오프 진출을 눈앞에 둔 넥센은 되레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3, 4차전을 내리 내줬고, 이날 5차전에서도 두산 선발 유희관에게 꽁꽁 묶이며 점수를 내지 못했다. 

이원석에게 내준 3점 홈런이 그대로 결승홈런이 되기 직전이었다. 주자가 1루와 2루에 나갔지만 이미 아웃카운트는 9회말 2아웃이었다. 마운드에는 리그 최고 투수 중 한 명인 더스틴 니퍼트가 선발이 아닌 구원으로 나와 던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박병호라 해도, 리그 홈런왕이자 타점왕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니퍼트는 스트라이크 존 바깥으로 공 2개를 연거푸 던졌다. 그리고 3구째,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도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흔치는 않다. 

3구째도 마찬가지로 볼에 가까운 공이었지만 스트라이크존 바깥쪽 끄트머리에 걸쳤고, 박병호의 방망이가 벼락처럼 돌았다. 타구가 백스크린을 직접 때렸다. 공을 따라가던 두산 중견수 이종욱이 허탈하게 펜스를 짚었다. 1루수 오재원은 아예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지나칠 정도로 극적인 동점 홈런이었다. 양쪽 벤치의 표정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프로야구 넥센 히어로즈 박병호가 10월 14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준플레이오프 5차전 9회말 2사 1, 2루에서동점 스리런 홈런을 치고 환호하고 있다. | 이석우 기자

프로야구 넥센 히어로즈 박병호가 10월 14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준플레이오프 5차전 9회말 2사 1, 2루에서동점 스리런 홈런을 치고 환호하고 있다. | 이석우 기자

경기는 다시 시작됐다. 13회에는 두산 최준석의 결승홈런이 나왔다. 경기는 두산의 승리였지만 야구사에 길이 남을 만한 홈런은 9회에 나온 박병호의 홈런이었다. 그리고 그 홈런은 원래 ‘출생 불가능’한 홈런이었다.

고의4구, 다른 종목에는 없는 묘미이자 약점
경기가 끝난 뒤 두산 김진욱 감독은 “배터리에게 거를 것을 지시했다”고 했다. 포수 최재훈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은 김 감독의 말대로 “니퍼트가 워낙 (포수가) 일어서서 거르는 고의4구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거르라는 지시가 나왔지만 공이 확실하게 빠지지 않았고, 홈런으로 이어졌다.

만약 고의4구가 나왔다면 경기는 9회말에 혹시 1~2점을 더 주더라도 그대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야구사에 길이 남을 법한 9회말 2사 후의 극적인 동점 3점 홈런은 아예 나올 수가 없었다.

그 고의4구 얘기다. 야구의 묘미이자 약점이다. 결정적 순간, 승부 대신 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 있는 작전.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자, 예를 들어보자. 1점차로 뒤진 프로농구 경기, NBA라고 하자면, 게다가 르브론 제임스가 뛰는 마이애미 히트라고 한다면, 마지막 공격에서 슛을 던지는 것은 누구일까.

리그 최고의 스타 제임스가 어떻게든 마지막 기회를 살릴 가능성이 높다. 골밑을 파고들든, 파고드는 척하다가 미들슛을 하든 어쨌든 관중들이 가장 큰 기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비가 ‘파울작전’을 쓴다면, 어차피 자유투 또한 제임스가 던지게 된다. 팬들은 마지막 공격을 앞두고 두근두근 가슴이 뛸 수밖에 없다.

NFL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기 종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4점 혹은 5점 뒤진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가 공격을 하고 있다면, 그 공격의 시작은 바로 리그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인 쿼터백 톰 브래디의 손 끝에서 시작된다. 그 패스 하나가 어디로 향하는지, 그 패스가 성공하는지 여부에 따라서 승부가 갈린다. 브래디를 향해 상대가 고의로 공격을 할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룰에 규정된 거친 몸싸움과 수비뿐이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중동 특유의 ‘침대축구’ 정도를 제외하면 정당한 수비 외에 상대 주공격수의 슈팅을 피하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야구는 다르다. 10월 14일 준플레이오프 5차전에 나온 박병호의 한국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사상 가장 극적인 홈런 중 하나가 될 3점 홈런은 ‘정상대로’라면 출생이 불가능한 홈런이었다. 상대 벤치는 고의4구를 지시했지만 니퍼트가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뿐이다. 실제로 볼을 던졌는데 그 공이 높았고, 박병호는 이를 때려냈을 뿐이다.

야구는 리그 최고 스타의 공격을 고의로 피할 수 있는, 르브론 제임스의 슛을, 톰 브래디의 패스를 고의로 피할 수 있는 작전을 일상화시켜 놓은 스포츠다. 야구팬들은 그래서, 클러치 상황에 중심타자가 들어섰을 때 미리부터 “아, 이번에는 거르겠군. 다음 타자가 쳐줘야 하는데”라고 마음먹는다.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미국 스포츠전문잡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의 톰 버두치 기자가 최근 호에서 ‘고의4구’를 비롯한 야구의 근본적인 규칙에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했다.

누구든 타석에 설 수 있는 ‘보너스 대타’제도 도입 어떨까
버두치는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의 지나친 투고타저를 지적했다. 세인트루이스의 젊은 투수들이 씩씩하게 공을 던졌고, 보스턴의 비교적 고참 투수들도 상대를 꽁꽁 묶었다. 무엇보다 불펜 투수들이 너무 많이 나왔다. 경기 시간이 길어졌다. 

분명, 이번 월드시리즈가 재미 없는 경기는 아니었지만, 점수가 너무 적었다. 관중들이 환호할 시간이 줄었다. 위기를 맞으면 수비쪽 벤치는 주저없이 고의4구를 지시했다. 결정적 순간마다, 특히 디트로이트와의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보스턴의 중심타자 데이비드 오티스는 걸어나갔다.

톰 버두치는 ‘보너스 대타’를 제안했다. 설명하자면, 경기당 양팀이 딱 한 번씩 타순과 교체 아웃에 대한 걱정 없이 대타를 쓸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지금의 대타 제도는 경기에 빠져 있던 선수가 대타로 나와야 하고 대타 대신 교체된 선수가 경기에 다시 들어갈 수 없는 방식이지만, 보너스 대타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무시하는 규칙이다.

누구든 타석에 들어설 수 있고, 해당 타순의 타자는 그저 다음 타석으로 밀리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0-1로 뒤진 경기 후반 1사 2루, 또는 1사 2, 3루 박병호 타석 때 상대가 박병호를 고의4구로 거른다면 넥센 벤치가 보너스 대타를 선언하며 1루에 나간 박병호를 다시 타석에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1사 만루에서 박병호가 다시 타석에 들어선다면 이번에는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된다. 감독의 머리는 깨지겠지만 팬들의 두근거림은 더욱 커진다.

누구든 타석에 들어갈 수 있는 제도이므로 이미 나가 있는 주자를 다시 타석에 들어서게 할 수도 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임시 대주자를 세우면 된다. 룰은 단순하고 간단하다.

파격적이라고? 충격적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그건 야구가 아니라고?
톰 버두치는 “똑같은 의견과 질문이 1973년 아메리칸 리그에서도 벌어졌다. 지금은? 아무런 문제 없다”고 말했다. 1973년은 아메리칸 리그에 지명타자 제도가 도입된 해다. 

그때도 “지명타자 제도는 야구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거셌고, 지명타자로 뛰게 된 선수들조차 “반쪽 선수가 된다는 점에서 충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지극히 자연스런 제도가 됐다. 한국프로야구는 1982년 출범 때부터 아예 지명타자 제도 하에서 시작됐다.

자, 버두치의 제안대로 보너스 타자 제도를 도입하는 건 어떨까. 지나치게 ‘투수 중심’으로 움직이는 한국 프로야구의 흐름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변화는 혁명적 제안을 통해 극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역사적으로도 종종 있어 왔다.

<이용균 경향신문 체육부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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