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망성쇠 보여준 제국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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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자동차로 흥하였으나 바로 그 산업의 비대함과 방만한 경영으로 망해가는 도시의 운명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시카고, 날로 창대해져 화려하고 은성한 대도시의 극단에서 시위대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Wake up, Chicago!”

앤아버에 볼 일이 있어 나갔다 왔다. 그 풍요롭고 안온한 제국의 도시에 꽤 유명한 대학이 있고 그 대학의 어떤 세미나에 참석하러 갔었는데, 가까운 곳에 디트로이트가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시카고가 있어서, 비록 주마간산이건만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두 곳을 향하여 엑셀러레이터를 숨가쁘게 밟았다.

외신을 통하여, 그리고 몇 편의 할리우드 영화를 통하여 스러져가는 디트로이트의 이미지를 몇 차례 보았음에도 디트로이트의 실경산수가 준 충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자동차로 흥하였으나 바로 그 산업의 비대함과 방만한 경영으로 망해가는 한 도시의 운명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11월 2일 디트로이트 시내의 모습. |  정윤수

11월 2일 디트로이트 시내의 모습. | 정윤수

텅 빈 건물들, 산산조각난 유리창들, 거리를 배회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노숙자들, 공터에 방치된 덩치 큰 자동차들, 대낮임에도 활력을 잃어버린 도심지, 그 쓸쓸함과 황량함, 짓다 만 건물들과 그 밑둥에 방치된 엄청난 쓰레기들.

쓸쓸함과 황량함, 디트로이트의 충격
물론 그럼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유령처럼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일을 위해 바삐 걷고 있었다. 

잠시 들러 점심을 먹은 디트로이트 웨인주립대학교 부근의 패스트푸드점이며 아마도 과거에는 상당히 은성했을 백화점 부근에는 많은 도시인들이 패잔의 성채를 지키는 마지막 시민들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때마침, 콰메 킬패트릭 디트로이트 전 시장이 횡령·뇌물수수로 무려 징역 28년형을 선고받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는 미국 고위공직자가 받은 처벌 가운데 가장 높은 수위로, 거대 기업도시 디트로이트의 패망이 어떤 이유 때문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강력사건 미국 내 1위 도시이지만 그래도 프로야구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는 여전한 강팀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여행 가이드북 ‘론리플래닛’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위험한 도시로 지목했지만, 디에고 리베라의 거대한 벽화가 버티고 있는 디트로이트 미술관에는 꽤 많은 중·고생들이 인솔 교사를 따라다니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악취미 성향의 사업가들이 디트로이트 폐허지역을 ‘좀비 테마파크’로 만들자고 제안을 했지만,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시민들은 이 제안에 저항하며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냈다.

11월 5일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시카고 시위대들이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 정윤수

11월 5일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시카고 시위대들이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 정윤수

그에 비해 시카고는 날로 창대하는 현대 대도시의 극단을 달릴 정도로 화려하고 은성하였다. 시카고 방문자를 첫눈에 사로잡는 강변의 스카이라인, 그 야경, 그 아래로 활기차게 걸어가는 시민들의 보폭은 다양성과 복합성으로 구성되는 제국의 대도시가 어떤 것인지를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 대도시와 닮은 시카고의 운명
1871년 대화재 이후 현대도시로 재탄생하였고 20세기 초의 비약적인 자본주의 발전의 심장이 되어 위로는 백인 억만장자들과 아래로는 일거리를 찾아 저 미시시피 강을 거슬러 올라온 수많은 흑인 노동자들, 바다 건너온 이민자들, 집안에 갇혀 있던 여성들을 받아들인 시카고의 다운타운은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나는 외곽의 한가로운 곳으로 빠지지 않고 3박4일 동안 도심 한복판을 쉼 없이 걷고 또 걸었는데, 대개의 시카고 시민들은 내 보폭을 앞질러 걸었다. 이따금 그들도 멈춰서기는 했는데, 오직 신호등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함성이 들려왔다. 스테이트 스트리트 쪽이었다. 오랫동안 집회와 시위의 나라에서 살아온 이력 때문인지 직감적으로 그 함성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시카고극장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11월 5일 시카고 시위대들이‘점령하라’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다. | 정윤수

11월 5일 시카고 시위대들이‘점령하라’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다. | 정윤수

시카고 abc 방송센터 건물 앞이었다. 수십명의 시민들이 생방송 뉴스가 진행되는 방송센터의 거대한 유리창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시위대의 함성이 거세지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합세하고, 일부 차량마저도 동의와 지지의 클랙션 소리를 내자 방송센터의 거대한 유리창은 곧 짙은 커튼으로 가려졌다.

젊은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민들은 이윽고 그 복잡한 시카고 시내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맥도널드 앞에서 잠시 멈춰 구호를 외쳤고, 아메리카은행 건물 앞에서 발을 굴렀으며, 메이시 백화점 앞에서도 큰소리를 외쳤다.

최종 목적지는 미 연방센터 건물이었다. 현대건축의 아버지 미스 반 데 로어(Mies van der Rohe)를 비롯한 4명의 건축가가 설계한 연방센터 앞에는 조각가 알렉산더 칼더의 작품 ‘플라밍고’(Flamingo)가 의연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 앞의 광장에 집결한 시위대는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Wake up, Chicago!”

그들은 깨어나라고 외쳤다. 당신들의 정부가 당신을 파산시키고 있다고 외쳤고 사기꾼들, 억만장자, 교활한 관료들이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외쳤다. 

비록 잠깐 눈 붙였다 깰 정도의 짧은 여정이었고, 따라서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살펴보겠노라는 의지에 비하여 결국 주마간산일 수밖에 없었지만, 끝없이 펼쳐진 마천루의 야경과 뛰듯이 걸어가는 사람들과 ‘오큐파이 시카고!’를 외치는 행렬들은 바다 건너의 시카고와 우리의 대도시가 엇비슷한 운명의 흥망성쇠를 거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나는 시위대로부터 벗어나 명멸하는 네온사인으로 뒤범벅된 스테이트 스트리트를 바쁘게 걸어갔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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