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라기 토양 향기 품은 부르고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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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테루아를 구성하고 있는 3종류 토양의 구성비에 따라 와인의 맛과 향기가 결정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다.

일주일간의 와이너리 여행을 통해 중년 인생의 페이소스를 잘 표현했던 할리우드 영화 <사이드웨이>의 주인공인 마일스는 피노 누아 예찬론자다. 이 영화의 영향으로 2005년 미국에서만 피노 누아 와인 판매가 16%나 증가했고, 세계 와인시장에도 피노 누아 붐이 일어났다. 필자는 화이트 와인의 메카 샤블리를 떠나 피노 누아의 왕국인 부르고뉴의 심장 코트 도르를 찾았다.

부르고뉴는 중세에 프랑스 왕국과 패권을 다투었던 막강한 부르고뉴(영어명 버간디) 공국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부르고뉴 와인 생산지역은 북쪽의 샤블리에서 남쪽 보졸레 끝자락인 리옹 인근까지 거의 300㎞에 걸쳐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그랑 크뤼 와인 산지인 알록스-코르통에 있는 아름다운 가을 포도원 풍경. 모자이크타일 지붕으로 유명하다

그랑 크뤼 와인 산지인 알록스-코르통에 있는 아름다운 가을 포도원 풍경. 모자이크타일 지붕으로 유명하다

이 지방은 화이트 와인 생산지인 북쪽의 샤블리, 보졸레 누보로 잘 알려진 남쪽의 보졸레, 레드와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는 코트 샬로네즈, 푸이이-퓌세 화이트 와인으로 유명한 마코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코트 도르 북쪽의 코트 드 뉘와 남쪽의 코트 드 본 등 여섯 지역으로 나뉜다.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등급체계
이 중 부르고뉴 황금의 언덕은 디종에서 부르고뉴의 중심도시 본 북쪽까지 연결되어 있는 코트 드 뉘다. 폭이 800m를 넘지 않는 좁은 계곡이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20㎞ 가까이 길게 뻗어 있는 이곳은 부르고뉴의 최고급 레드 와인 생산지로 100% 피노 누아 단일 품종으로 만든다. 부르고뉴의 품질등급제도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등급체계(AOC)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르고뉴의 테루아를 구성하고 있는 토양의 정교함과 오랜 세월 유산상속 등을 통한 포도밭의 세분화(소규모 포도밭인 클리마)로 인해 같은 지역에서도 포도 재배자와 네고시앙(상인이라는 뜻)의 역량에 따라 와인의 품질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부르고뉴의 와인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지질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프랑스 주요 와인 생산지의 테루아는 1만여년 전 쥐라기에 형성된 석회암 위에 편암, 초크, 자갈, 모래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쌓인 충적토뿐만 아니라 화강암, 이회암, 진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뉘-생-조르주에 있는 중세 옛 수도원 지하셀라에서 시음한 도멘 뤼페 콜레의 와인들.

뉘-생-조르주에 있는 중세 옛 수도원 지하셀라에서 시음한 도멘 뤼페 콜레의 와인들.

코트 드 뉘는 해발 400m 높이의 지질학적 단층선이 언덕을 형성하며 길게 뻗어있는데, 주요 포도밭은 동쪽 손강 유역에서 고도 350m 지점까지 동향이나 정남향 언덕에 형성되어 있다. 꼭대기는 산림지대다.

충적토로 이루어진 저지대에는 4등급인 부르고뉴 피노 누아와 3등급인 빌라주 와인이 생산된다. 석회암, 초크, 이회토로 구성되어 있는 산비탈 중턱 해발 250m 근방에는 2등급 프르미에 크뤼와 1등급 그랑 크뤼 포도원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결국 이곳 테루아를 구성하고 있는 이 세 종류 토양의 구성비에 따라 와인의 맛과 향기가 결정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다.

필자는 1903년에 설립된 대표적인 부르고뉴 와인 메이커로 부르고뉴와 샤블리 지역에 와이너리와 포도밭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는 뤼페 콜레 와이너리를 찾았다. 전통과 개혁을 추구하며 이곳 테루아의 성격을 반영하는 와인을 만드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는 뉘-생-조르주에 있는 특이한 와인 메이커이다. 열렬한 테루아 지상주의자인 마케팅 책임자 크리스티앙 시아모스 이사는 테루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오래 전 수도원으로 사용했던 건물 앞에 있는 빌라주급 포도밭에서 이곳의 테루아를 구성하고 있는 3개의 작은 자갈(석회암, 초크, 이회암)을 집어들고 부르고뉴 와인의 우수성을 설명했다. 대부분의 신세계 와인은 기름진 토양으로 포도나무가 깊게 뿌리 내리지 않고 표토에서 쉽게 열매를 맺기 때문에 포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맛과 향기만을 표현하는 단편적인 와인이라 할 수 있다.

부르고뉴 와인은 테루아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토양에 깊숙이 뿌리를 내려 각종 미네랄과 영양소를 흡수하기 때문에 같은 피노 누아라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풍미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코트 드 뉘 지역의 와인 중심 마을 뉘-생-조르주의 아름다운 거리 모습.

코트 드 뉘 지역의 와인 중심 마을 뉘-생-조르주의 아름다운 거리 모습.

즉 포도 자체의 맛과 향기에 테루아의 맛과 향기가 첨가된 복합적인 풍미를 가지고 있는 와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화강암은 적당한 신맛과 풍부한 아로마, 석회암은 레몬향과 미네랄, 이회암은 강건함과 후추 맛, 점토는 타닌의 맛, 편암은 가늘고 간결한 맛 등이다.

매혹적인 체리 빛깔, 우아한 풍미
부르고뉴 와인은 어쩌면 쥐라기 때부터 1만여년 이상의 긴 세월 동안 형성된 토양의 향기를 품고 태어난 와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몇 년 전에 샹볼-뮈지니 근교 와인 가도에 있는 본-마르 그랑 크뤼 포도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는 마치 케이크를 자른 듯한 전형적인 코트 드 뉘 테루아의 단층이 있었는데, 포도나무 뿌리가 바위틈으로 영양분을 찾아 지하 20m까지 뻗어 내려간 눈물겨운 장면을 보면서 새삼 자연의 위대함을 느낀 적이 있다.

샤레이론 이사의 안내로 중세부터 사용했던 옛 수도원의 어두운 지하 와인셀라에서 2011년산 화이트 와인과 2010년산 레드 와인 10종류를 시음하였다. 이 중 필자에게 인상적이었던 와인은 최하위 등급인 ‘부르고뉴 피노 누아 콩테스 드 뤼페’와 프르미에 크뤼인 ‘뉘-생-조르주 레 크로’ 레드 와인이다.

코트 드 뉘 지역의 테루아를 구성하고 있는 초크.

코트 드 뉘 지역의 테루아를 구성하고 있는 초크.

와인 입문자들이 던지는 가장 많은 질문은 ‘어떤 와인이 좋은가?’인데, 일반적인 정답은 값비싼 와인이 좋은 와인이다. 그러나 와인 애호가의 현명한 선택은 ‘가격 대비 좋은 와인’(Value for Money)을 구매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르고뉴 피노 누아 콩테스 드 뤼페 2010년’은 가장 추천할 만한 와인이다. 밝은 체리색에 딸기와 블랙커런트, 달콤한 향신료와 부드러운 과일향이 느껴지고, 젊지만 신선한 타닌의 맛이 신세계의 피노 누아와 분명히 다른 풍미를 자랑했다. ‘뉘-생-조르주 프르미에 크뤼 레 크로 2010년’은 아직 충분히 숙성되지 않았지만 이곳 테루아를 잘 표현하여 부르고뉴 와인의 정통성을 보여주었다.

매혹적인 체리 빛깔에 천연의 단맛이 부드럽고, 기분 좋게 뿜어내는 과일과 꽃향기, 균형 잡힌 산도, 타닌·알코올에 미네랄의 상쾌함이 더해져 벨벳처럼 우아하고 순수한 풍미와 관능적인 잔향이 오랫동안 입안에 맴돌았다.

문득 영화 <사이드웨이>에서 주인공 마일스가 여주인공 마야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피노 누아는 카베르네 쇼비뇽과 달리 아무 환경에서 자랄 수 없어. 껍질이 얇고 성장이 빨라 끊임없이 보살펴줘야 하기에 인내심 없인 재배가 불가능한 품종이지. 하지만 소박하면서도 오묘한 맛과 향은 태고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거든.”

글·사진|송점종<우리자산관리 대표·Wine MBA> j-j-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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