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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문 ‘대선 불법’ 힘 잃는 ‘대선 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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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대선 개입 시비에 대한 여권의 ‘대선불복’ ‘전 정권 책임’ 프레임은 강력했다. 그러나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검찰 내부의 수사외압 폭로 등 ‘선거부정’ 증거들이 쏟아지면서 금기어였던 ‘18대 대선의 정당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프레임이 움직이고 금기어가 깨지고 있다. 야당의 공세에 맞서 새누리당이 줄곧 제기해 왔던 ‘대선 불복’ ‘전 정권의 책임’이라는 프레임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반면 민주당은 ‘대선 불복’의 이미지로 내비칠까봐 우려해 좀처럼 쓰지 않던 ‘부정선거’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국정감사를 기점으로 국정원의 트위터, 군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의혹, 윤석열 여주지청장의 수사 외압 폭로가 불거지면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국정원이 선거에 불법적으로 개입했다는 정황과 증거들은 계속해서 뒤따라나오고 있다.

대선불복론, 야권 묶는 전가의 보도
국정원 선거개입 논란이 불거지면서 새누리당이 이에 대처하는 첫 번째 프레임은 ‘대선 불복’이었다. 국정원 대선개입 문제가 논란이 됐던 초기에는 새누리당의 ‘대선 불복’ 프레임이 어느 정도 유효하게 작동했다. 

국감장에서 선 윤석열 여주지청장. | 강윤중 기자

국감장에서 선 윤석열 여주지청장. | 강윤중 기자

민주당 지도부에서도 혹시나 ‘국정원 개혁’이나 촛불집회가 ‘대선 불복’으로 비춰질까 노심초사했다. 국정원 선거개입 문제가 ‘대선 불복’의 뉘앙스를 주게 될 경우 여론의 역풍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민주당 관계자는 “‘대선 불복’은 2004년 탄핵을 연상케 한다”고 말했다. 대선에 불복해 수검표까지 했던 한나라당이 결국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의미로 탄핵을 가결했고, 이는 한나라당에 고스란히 역풍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다. 

이에 민주당은 ‘대선 불복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로 촛불집회의 의미에 선을 그었고, 새누리당은 역으로 이를 이용해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냐’며 전가의 보도처럼 ‘대선 불복’ 프레임을 들이밀었다.

최근 연일 국정감사에서 국정원은 물론 군까지 대선에 개입했다는 정황과 증거들이 쏟아져나오자, 새누리당 지도부는 다시 ‘대선 불복’이라는 방패를 들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10월 25일 국감상황점검회의에서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대선 불복의 유혹은 악마가 야당에게 내미는 손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며 민주당을 향해 ‘대선 불복’의 공세를 이어나갔다.

10월 24일 황우여 대표는 문재인 민주당 의원의 ‘불공정 선거’ 성명문에 대해 “당이 수차례 경고했음에도 문재인 의원이 직접 이 부분을 거론했다”며 “대선에 대한 이의가 있거나 문제가 있을 때는 30일 이내 제소하고 이를 마쳐야 하는데 1년이 다 돼가도록 계속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민주당의 본뜻이 어디 있는지, 이렇게 국정을 흔들어도 되는 것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18대 대선 당시 유력 후보였던 문재인 의원이 대선에 불복하려는 게 본뜻이 아니냐며 ‘대선 불복’ 프레임을 덧씌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대선 불복’ 방패는 국정감사에서 쏟아지는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한 증거와 정황들 앞에서 더는 맥을 못추고 있다. 이미 여당 내에서도 비박근혜 의원들을 중심으로 당 지도부가 내걸고 있는 ‘대선 불복’ 프레임에 비판적인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야당을 향해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냐’를 따질 게 아니라, 정부·여당이 논란에 대한 책임 있는 해명과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10월 23일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은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논란이 되는 댓글과 트위터는 한강에 물 한 바가지 붓는 격”이라면서도 “새누리당이 이번 사건에 대해 무언가 감추려 한다는 느낌을 주었다면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게 확실한 입장이나 의견을 표명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새누리당 이인제 의원도 “새 정부는 과거에 있었던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에 제일 정확하게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며 “무엇 때문에 지금 진실을 정확하게 밝혀내지 않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 정권에 아무 부담을 줄 일이 없는데, 오히려 자꾸 혼란스럽게 (사태가) 진행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통령에도, 정부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의 외압 폭로로 설득력 잃어
그러나 무엇보다 새누리당이 제기하고 있는 ‘대선 불복’ 프레임이 더 이상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정권 내부에서조차 통제가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검찰 간부들의 폭로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10월 21일 열린 서울중앙지검에 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국정원의 정치개입 의혹사건의 수사 및 의사결정 과정을 둘러싸고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과 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여주지청장의 진술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박 대통령의 결단을 엄중히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외압 의혹과 국군 사이버사령부 및 국가보훈처의 선거개입 의혹과 관련,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 박민규기자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박 대통령의 결단을 엄중히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외압 의혹과 국군 사이버사령부 및 국가보훈처의 선거개입 의혹과 관련,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 박민규기자

이들은 ‘수사 외압 여부’ ‘지휘체계’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특히 공소장 변경 신청과 관련해 “국정원에 대한 수사 초기부터 외압이 있었다”고 한 윤 지청장의 폭로는 상당한 파장을 불러왔다.

새누리당의 ‘대선 불복’ 프레임이 여론에 대한 설득력을 급격히 잃어버리 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사무국장은 “초기에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오히려 여당이 문제를 키워오고 적극적인 노력을 안 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여당의 내부 권력 분열과정에서 여러 가지 의혹들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야당이 세게 나가도 새누리당이 제기하는 대선 불복 프레임이 여론에 통하기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상황 자체가 야당이 폭로한 게 아니라 검찰에서 나왔던 이야기인 만큼 여론에 충격을 주고 있으며, 그런 만큼 더 이상은 ‘대선 불복’으로 공격하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그는 “국정원 선거개입 문제는 폭발력이 있는 문제인 만큼 국민들은 그 문제가 가져올 정치적 혼란 등 때문에 판단을 유보하거나 대통령이나 집권여당이 알아서 해주기를 바란 측면이 있다. 한 마디로 위임을 해주었던 어젠다인데 윤 지청장의 폭로로 현 집권여당이 이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집권여당을 신뢰할 수 없는 만큼 그들이 제기하는 ‘대선 불복’ 프레임 또한 더 이상 설득력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과나 대안조치 내놓는 게 상책”
새누리당이 국정원 선거개입 논란에 대처하는 두 번째 프레임은 이 책임을 전 정권인 이명박 정권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것이다. 현 정권과 전 정권을 분리시키면서 책임소재를 이명박 전 대통령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국한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 지청장이 폭로한 대로 국정원에 대한 수사를 검찰이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은 더 이상 이를 전 정부 책임이라고만 보기 어렵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 정권의 검찰에서 수사 외압이 있었다는 의혹은 현 정부 또한 책임론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전 정권 책임’이라는 프레임도 더 이상 유효하게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새누리당이 제기하는 ‘대선 불복’ 프레임에 걸려 여론의 역풍을 맞지 않을까 우려하고 조심하던 민주당이 좀 더 적극적으로 ‘부정선거’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은 ‘대선 불복’ 프레임이 무너지고 있는 흐름을 간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주당에 ‘부정선거’는 일종의 금기어였다. 하지만 이제는 김한길 당대표까지 ‘부정선거’라는 말을 입에 올리거나 거론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대선 불복’ 프레임에 덧씌워지지 않을 만큼 자신감 있는 정황과 증거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10월 24일 김 대표는 “부정선거를 부정선거로 말하지 말라는 것은 긴급조치를 비판하면 무조건 감옥에 처넣은 유신시대의 논리”라면서 강도 높게 비판했다. 나아가 대선 결과의 정당성 문제까지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지난 10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긴급 의원총회에서 박지원 의원은 “선거 문제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설훈 의원도 “지난 대선 자체가 심각한 부정이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아야 한다”며 “선거 결과를 승복할 수 있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의원까지 10월 23일 성명을 통해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지난 대선은 불공정했다”며 “미리 알았든 몰랐든 박근혜 대통령은 그 수혜자”라고 박 대통령 책임론을 제기한 것은 임계점이 머지않았다는 신호탄인지도 모른다.

상황이 점점 집권여당에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5년 내내 부정선거 시비가 제기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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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조직적으로 국가기관들이 개입한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원칙 자체를 부정한 것이다”라며 “사과를 하거나 대안적 조치를 취하는 게 정상적 과정이고, 만약 그렇지 않고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5년 내내 박근혜 정부에서는 부정선거 시비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부정선거 시비가 계속되면 의회정치는 실종되고 거리의 정치만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원하는 상황이 아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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