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국정원의 ‘무모한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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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반대세력의 제압을 넘어 ‘박근혜 후보의 대선승리를 위해’ 어떻게 선거에 개입하고 다른 국가기관들을 어떻게 동원했는지 네 가지 키워드로 재구성해 본 대국민 심리전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2009년 2월 취임한 뒤 가장 중점적으로 지시한 사안 중 하나다. 심리전이란 직접적인 화력을 쓰는 교전활동 대신 상대방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가해 싸움을 우세한 상황으로 이끌어가려는 다양한 측면의 전투행위를 뜻한다.

다만 이번 심리전은 상대가 달랐다. 군과 정보기관, 그리고 보훈처 등 여타 국가기관까지 총동원돼 벌어진 전쟁의 상대편은 북한처럼 외부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 심리전은 당시 집권세력에 우호적이지 않은 내부의 반대세력을 제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선 승리라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는 데까지 일사불란하게 수행됐다.

파편적으로 확인된 사실과 보도 내용들을 바탕으로 국정원 등의 대선개입 이면에 있던 치밀한 대국민 심리전 시나리오를 네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재구성해 봤다.

지난 8월 19일 국회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증인 보호를 위해 설치된 가림막 아래로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 민병주 전 심리전단 단장, 박원동 전 국익정보국장(왼쪽부터)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지난 8월 19일 국회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증인 보호를 위해 설치된 가림막 아래로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 민병주 전 심리전단 단장, 박원동 전 국익정보국장(왼쪽부터)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야권 경쟁후보에게 종북 딱지 붙이기
18대 대선을 8일 앞둔 지난해 12월 11일, 서울 강남구의 한 오피스텔.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는 자신이 사는 오피스텔로 들어가 평소와 다름없이 지시받은 여론동향 파악 및 개선활동에 들어갔다. 김씨의 뒤를 쫓은 당시 민주통합당과 선거관리위원회가 김씨의 활동이 불법 선거개입이라고 문제삼으며 김씨의 오피스텔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 이 활동이 거대한 심리전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은 묻혀 있었다.

현재까지 국정원이 연루된 인터넷 상의 활동은 검찰 수사 결과만으로도 1977건의 게시글을 올리고, 1711건의 찬반의견 표명활동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나마 반대세력에 종북이라는 이름표를 붙였지만 선거와 무관하다는 판단 때문에 3000여건의 게시글은 제외된 수치다. 여기에 현재까지 5만5000건 이상으로 파악된 트윗을 더하면 심리전이라고 이름 붙인 전선을 만들고 승리하기 위해 국정원이 동원한 역량은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2012년 대선국면에 이르러 국정원은 상당한 세력의 우군을 업고 심리전이 벌어지는 전선을 유리하게 움직여갈 위치를 잡게 된다. 2009년부터 2012년 초까지 다음 아고라에 남긴 국정원의 흔적을 보면 대선 전까지는 당시 이명박 정부의 시책을 옹호하는 데 중점을 뒀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선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심리전의 전술적 구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당면한 지상 목표는 박근혜 후보의 대선 승리였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전술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종북’을 야권 상대후보와 결부시키는 전통적인 방식이 사용된 것이다.

종북 프레임은 낡은 것이었지만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해 전파되면서 새로운 옷을 입었다. 대선을 앞두고 당시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비방에 집중한 사실도 드러난다. 

국정원이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올린 트윗 5만5000여건을 분석하면 초기 박근혜 후보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찬사가 주를 이뤘지만, 대선에 가까워질수록 상대 후보를 북한·종북과 결부시키는 트윗의 비율이 높아지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트위터는 뉴스·토론 사이트나 커뮤니티 게시판과는 달리 ‘봇’이라 불리는 자동 리트윗 프로그램을 통해 트윗을 빠른 시간에 반복적으로 전파하며 물량적인 우세를 점하려는 모습도 나타났다.

온·오프 가리지 않고 보수 우군 집결
2009년 6월 정국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라는 회오리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이후 또 한 번 젊은층에서 반감이 번지자 위기를 느꼈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공간 아고라는 당시의 국정원이 여론 형성과정에 개입한 흔적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정부와 여당마저 추모정국에 기세가 꺾인 당시 국정원은 오히려 공격적인 승부수를 던졌다. ‘노무현이가 지옥에서 보내는 두 번째 유언’, ‘놈현이가 저 세상에 와서 보니 아주 큰 죄가 많았군요’와 같은 게시글은 이후 보수성향 커뮤니티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된 ‘고인드립’의 원조격이다.

전무후무한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두고 보인 국정원의 즉각적인 대응은 예상치 못한 반향을 일으켰다.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와 같은 보수 커뮤니티의 성장과 함께 다양한 보수적 코드가 웹 상에 쉽게 정착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국정원 직원인 것으로 지목된 네티즌 ‘좌익효수’의 활동을 보면 인터넷 상에서 보수가 득세한 과정과 국정원 활동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좌익효수’는 진보세력·호남지역·여성에 대한 비하 내용이 주가 된 댓글을 확인된 것만도 2011년 1월부터 3500여개 이상 달았다. 보수성향 네티즌들이 디시인사이드에서 일베로 유입되면서 진보·호남·여성에 대한 반대 성향이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민주당 진선미 의원은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은 SNS·인터넷에서 좌파로 거론되는 사람들을 공격해 젊은층 생각을 변화시키려는 전략”이라며 “원 전 원장은 총선과 대선 직전 ‘종북세력이 사이버 공간에서 선전·선동하는 것에 선제적으로 대처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고 밝혔다.

국정원의 우군 확대를 위한 심리전은 인터넷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2010년 11월부터는 일반인들을 국정원에 초청하는 행사가 시작됐다. 신고전화 111이나 인터넷을 통해 국정원에 신고활동이 활발했던 일반인들을 초청하는 자리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흔드는 내부의 적’, ‘종북주의에 대하여’, ‘종북좌파 구별 및 신고방법’ 등의 주제로 특강이 있기도 했다.

20~30대 젊은 네티즌들의 비중이 높은 데다, 그들이 쓴 행사 참석 후기가 보수 커뮤니티에서 호응을 얻으면서 젊은층을 대상으로 한 국정원의 심리전은 온·오프라인이 결합된 성공적인 전술을 추가하게 된 것이다.

사이버사령부와 퍼나르기 찰떡 공조
국군 사이버사령부 소속 부사관과 군무원 4명이 대선과정에서 여론조작에 개입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뒤 여기에 참여한 사이버사 요원들이 추가로 더 있다는 주장도 속속 나왔다. 이들 역시 국정원과 유사한 방식으로 포털과 중소형 커뮤니티, SNS 등으로 담당분야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트위터에서는 국정원에서 트윗을 올리자마자 실시간으로 리트윗을 한 사례가 40여건 발견됐다. 또 국정원이 ‘종북 사이트’로 지목한 ‘오늘의 유머’에 대해서도 사이버사 요원들이 가상 사설망(VPN)을 통하는 등 국정원과 유사한 방식으로 활동한 점이 다수 발견됐다.

기록 삭제와 증거인멸의 과정 역시 국정원과 사이버사 모두에서 공통된 요소다. 각 사이트에 올라간 게시글은 작성자가 삭제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서버에서 기록을 찾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국회의 국정조사 과정에서 국정원 직원의 게시글과 댓글이라고 새롭게 밝혀진 글들이 곧바로 삭제된 양상과 동일하게 국방부에 대한 국정감사 직후 사이버사 요원 2명의 블로그 글 514건도 일괄 삭제됐다.

수사기관의 입장에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의심되는 작성자가 남긴 글의 기록을 확보해야 하지만 대대적인 삭제작업에 나설 경우 그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점에서 확보된 증거보다 현저히 많은 수의 게시글이 작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2010년 1월 국방정보본부 예하 기능 사령부로 신설된 사이버사가 특히 총선·대선이 있는 2012년에는 79명을 선발하는 등 매년 인력을 큰 폭으로 늘려왔다는 점에서 국정원과 함께 대선 전 대민 심리전에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됐다.

두 기관의 대선개입 연계설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민간과 결합된 심리전을 총괄하는 합동참모본부 민군심리전부에서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과 현 사이버사 1처장, 심리전 단장이 함께 재직한 사실이 국정감사에서 밝혀졌다. 
또 정보기관의 예산을 총괄하는 국정원이 국방예산 외에 별도로 편성된 사이버사의 정보 관련 예산을 지원했다는 점 역시 논란을 일으켰다. 민주당 진성준 의원은 “국방부는 사이버사령부 예산이 국방비에 편성된 예산이라고 강조하지만 정보예산은 편성단계에서 국정원의 심의·조정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사이버공간에서 펼친 변형된 쿠데타
전문가들에 따르면 심리전이 벌어지는 공간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선전·선동의 내용이 전파될 수 있는 매개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이번 대선개입 논란에서는 신문·방송·출판물 등 전통적인 매체보다는 PC와 스마트폰 기반의 인터넷·SNS가 주된 전장으로 떠올랐다.

둘째로 심리전이 벌어지는 양측 사이의 전선은 물리적인 전선과 달리 전·후방 구분이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은 외부의 적을 상대하는 것과는 달리 내부의 반대세력을 상대로 심리전이 벌어질 경우 후방의 국민을 우호세력으로 볼 수 없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미국이 2001년 9·11 테러 이후 자국민 역시 잠재적 적군일 가능성이 있다고 상정한 것처럼, 국정원도 국민 중 상당수가 외부의 적인 북한과 연계돼 있다는 전제하에 심리전을 수행한 것이다. 이 심리전의 결과가 결국 박근혜 후보의 대선 승리로 나타나게 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여론조사 결과 공표가 금지된 대선 직전에 나타났다.

줄곧 뒤져 있던 문재인 후보가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혹으로 지지율 반전에 성공했으나 경찰의 중간 수사 발표로 결국 우세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의 이택수 대표는 “47.0% 대 47.5%로 0.5%포인트 문재인 후보가 앞서던 상황이었는데, 16일 오후 11시에 김용판 전 청장의 긴급 기자회견이 있었다. 그 다음날인 12월 17일 조사에서 다시 박근혜 후보가 48.7% 대 46.9%로 단 하루 만에 역전하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대국민 심리전은 그것을 수행하는 국가기관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고승우 전 한성대 교수(언론사회학)는 “현대 심리전이 사이버 공간에서 전개되는 것처럼 선거에서의 부정 역시 사이버 공간에서 자행된 것이 확인됐다”면서 “국정원이 사이버 공간에서 이른바 종북세력 비판을 위한 작전을 펼치는 것은 총칼을 앞세운 쿠데타의 변형이자 헌정 유린행위”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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