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强辯)의 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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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치에 닿지 아니한 것을 끝까지 우기거나 변명한다’는 뜻입니다. 박근혜 정권을 보면 대통령에서부터 총리, 장관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강변의 달인’들 같습니다.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김병만의 <달인> 코너에 출연해도 될 듯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국정원의 대선개입과 관련해 사과를 요구하자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덕 본 게 없다”고 일축했습니다. 국정원이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올리고, 여당 후보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 앞장선 사실이 ‘검찰 수사’로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덕 본 게 없다고 우깁니다.

백 보 양보해 덕 본 게 없다손 치더라도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의 정치개입이라는 일탈에 대해 사과하는 게 도리인데도 몇 개월째 눈 하나 깜빡 안 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니 참 당황스럽습니다. ‘참 나쁜 대통령’이 되려고 용을 쓰는 것도 아니고….

정홍원 총리도 철판의 두께에 관한 한 대통령에 뒤지지 않습니다. 인사청문회에서 모진 매를 맞으며 갈고 닦은 내공이 과연 간단치 않습니다. 정 총리는 국회에서 기초연금 공약 후퇴를 질타하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대해 “공약 파기도 아니고, 후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매달 20만원의 연금을 지급하겠다던 약속이 소득하위 70% 노인에게만, 그것도 국민연금과 연계해 차등 지급하는 걸로 바뀌었는데도 파기도, 후퇴도 아니라고 우깁니다. 박 대통령이 “죄송하다”고 사과한 걸 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아니면 바뀐 걸 모르거나, 정부에서 쓰는 후퇴라는 말과 국민들이 쓰는 후퇴라는 말 뜻이 달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도 아니면 국민을 상대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장난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도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이 불거진 뒤 곧바로 감찰을 지시한 것과 관련해 “감찰이 아닌 전 단계인 진상조사 활동이었다”고 우겼습니다. 채 총장을 찍어내야 할 때는 물불 안 가리더니 목표가 달성되자 옷에 묻은 먼지나 털어버리자는 심보가 뻔히 보입니다.

강변과 호도가 판을 칠수록 원칙과 상식은 퇴색하고, 불통만 깊어집니다. 그래도 대통령 지지율이 여전히 고공행진 중인 걸 보면 효과는 있는가 봅니다. 엘리스의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박 정권이 얼굴에 덕지덕지 칠한 가면의 향기에 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잠시 가릴 수는 있어도 영원히 가릴 수는 없습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양치기의 거짓말을 아시죠. 두 번까지는 속아도 세 번째부터는 도와주러 오지 않습니다. 진짜 늑대가 나타나도 말입니다.

열국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진나라 승상 조돈은 포학하고 놀기 좋아하는 진영공에게 늘 선정을 간하다가 미움을 삽니다. 진영공이 눈엣가시인 조돈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조돈은 가신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황망히 국경으로 달아납니다. 그 후 조돈의 동생 조천이 진영공을 살해하고, 조돈은 권력에 복귀합니다. 사관 동호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조돈이 도원에서 그 임금 이고(진영공의 이름)를 죽였다.’ 조돈은 내가 임금을 죽이지도 않았는데 멀쩡한 생사람을 잡느냐고 동호에게 항의합니다. 동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도성으로 돌아왔으나 임금을 죽인 자를 찾아내어 그 죄를 벌하지 않았으니 승상이 그 일을 꾸민 것이 아니라고 극구 변명할지라도 누가 곧이 듣겠소. 승상이 내 머리를 끊을 순 있지만 이 기록만은 고치지 못하오.

진나라의 사관 동호가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기초연금 공약 후퇴를, 채동욱 검찰총장의 사퇴를 기록한다면 이렇게 적지 않았을까요. ‘이 모든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시켰다.’

<류형열 편집장 r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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