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수서발 KTX 주식회사안도 ‘스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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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부 ‘철도경쟁체제’ 내세우지만 범대위측 여전히 ‘민영화’ 의심

“민간 매각 방지를 명시하면 되지 않느냐. 민간에는 절대 팔지 않는다고 수차례 말했다.”(국토교통부)
“‘주식회사’ 자체가 바로 민영화다. 사실상 최대주주인 정부가 언제든지 떼 팔 수 있다.”(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철도노조)

114년 된 한국 철도의 체질을 높이기 위한 고육지책인가, 아니면 철도를 민영화시키기 위한 꼼수일까. 올 추석에 기차를 이용한다면 정부 혹은 KTX민영화반대 범대위 측에서 뿌리는 전단지 하나쯤은 받아볼 것 같다.

정부는 지난 6월 27일 철도산업발전방향을 발표했다. 코레일을 지주회사 체제로 만들고 6개 자회사를 두는 방안이 확정됐다. 6개 자회사 중 핵심은 수서발 KTX 운영회사다. 코레일이 30% 지분을 갖고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70%를 소유해 ‘주식회사’로 만들겠다는 안이었다. 그동안 논의되던 제2 철도공사안을 뒤집은 묘안이었다.

코레일 사장 석 달째 공석으로 지지부진
수서발 KTX란 신설되는 수서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호남선을 운영하는 회사다. 즉 수서↔부산, 혹은 수서↔목포 KTX를 전부 맡게 된다. 모회사인 코레일은 서울·용산에서 출발하고 도착하는 경부선과 호남선을 운영한다.
정부는 자회사 설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7월 17일 수서발 KTX 운영준비단을 설치했다. 8월 20일에는 코레일과 철도산업발전 TF 회의를 갖고 실천계획을 본격 수립하기로 했다.

지난 7월 철도노조 조합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철도 민영화 반대 114배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지난 7월 철도노조 조합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철도 민영화 반대 114배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하지만 진도는 생각보다 나가지 못한 상태다. 석 달째 코레일 사장이 공석상태로 있었던 것이 컸다. 당초 정부 구상은 KTX 자회사안에 반대했던 정창영 전 사장을 조기에 퇴진시킨 뒤 속도감 있게 자회사 안을 밀어붙인다는 복안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KTX 자회사안은 코레일이 이사회를 열어 의결하면 된다.

정창영 전 사장은 임기를 1년 이상 남겨놓은 지난 6월 17일 돌연 중도퇴임했다. 정부 차원의 입김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됐지만 정 전 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코레일 사장 공모가 시작됐다. 여기까지는 시나리오대로 가는 듯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공공기관장 관료 독점 논란이 불거지면서 청와대가 공공기관장 공모를 모두 중단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두 달이 더 흘렀고, 8월 들어 사장 공모는 재개됐다. 하지만 국토부는 조급했다. 김경욱 철도국장이 코레일 사장 선정을 위한 임원추진위원회에 압력성 전화를 넣었다. 국토부로서는 ‘철도 경쟁체제에 대해 국토부와 뜻이 같은’ 사장이 필요했다. 곧바로 역풍이 불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가 격하게 반발했다. 기획재정부 공공기관운영위원회는 결국 사장 추천을 포기했다. 코레일 사장 선정은 한 달가량 더 늦춰지게 됐다.

철도산업방향을 발표했지만 아직 현실화된 것은 없다. 여론이 극히 악화될 경우 코레일 이사회에서 자회사 설립안이 부결될 수도 있다. 이 경우 국토부가 입을 충격은 상상하기 힘들다. 국토부는 여론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 8월 31일 철도노조가 “대구역 KTX 충돌사고는 정부가 철도 민영화를 밀어붙이면서 철도산업간 유기적 협력관계가 약화된 것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자 “기관사와 승무원들이 그동안 철도노조의 민영화 반대집회 등에 동원되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해 사고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반박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토부 내에서 ‘철도 민영화’라는 말은 금지어로 통한다. ‘철도 경쟁체제’로 불러야 한다. 초반 여론 정지작업에 실패하면서 철도노조와 시민사회단체의 선전전에 밀려 ‘민영화’ 프레임에 갇혔다는 피해의식이 크다. 국토부가 ‘민영화는 절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민간 매각 금지를 명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국토부는 수서발 KTX주식회사에 철도운송허가를 내주는 면허조건과 회사의 정관, 투자자 모집을 위한 주주협약에 모두 ‘민간 매각 금지’를 명시하겠다고 밝혔다. 또 지분의 30%를 가진 대주주인 철도공사가 동의하지 않으면 정관 등을 개정하는 것을 금지하겠다고도 했다. 임의적으로 매각하면 효력배제하거나 위약벌칙을 물리는 규정도 삽입하겠다고 밝혔다.

“철도경쟁체제는 민영화의 다른 이름”
국토부 관계자는 “누구도 쉽게 민간 매각을 하자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규정을 강력하게 만들 것”이라며 “이런데도 민영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철도노조와 KTX민영화저지범대책위원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는 “철도 경쟁체제는 민영화의 다른 이름”이라며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코레일이 지분 30%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코레일 사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데다, 70%의 공적 연기금은 결국 정부가 통제한다는 이유에서다.

정부는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이 주식에 투자한 만큼 이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는 주주권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또 반대측은 수서발 KTX가 자회사가 되면 언제든 떼내 팔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모회사의 한 부서가 아닌 별도 자회사는 분리매각하기가 매우 쉽다. 정부는 코레일이 운영하는 적자노선만을 떼내 민간에 운영을 맡기겠다는 구상을 이미 밝혔다. 고속철도가 아닌 새마을호·무궁화가 다니는 기존 적자노선은 ‘민영화’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국토부가 인천공항공사 민영화에 나섰던 전례도 반대 시민단체들이 국토부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알짜인 인천국제공항을 맡아 인천공항공사가 막대한 흑자를 남기자 이명박 정부는 이를 매각하려 했다. 인천공항공사의 지분을 팔아 남긴 돈으로 공항에 추가 투자를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댔다.

철도노조 관계자는 “수서발 KTX는 흑자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막대한 흑자를 남기면 어느 시점에 철도 추가 투자 등을 이유로 이사회 의결을 거쳐 민간 매각을 결정할 수 있다”며 “박근혜 정부에서 하지 않더라도 다음 정부에서 재추진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억지가 아니라 지금껏 역대 정부의 행보를 볼 때 ‘합리적 의심’”이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청와대의 입장이다. 청와대는 수서발 KTX 경쟁체제 도입에 집중하는 모습을 그다지 보이지 않고 있다. 인수위원회가 선정한 140대 국정과제에는 철도 안전은 있어도 경쟁체제 도입은 없다. 앞선 이명박 정부 때도 청와대 내부에서는 철도 민영화 추진을 마뜩잖아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청와대로부터 철도 경쟁체제 도입 미션을 받았더라면 정창영 전 코레일 사장이 국토부에 반기를 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때문에 여론의 향배가 급격히 반대로 기울 경우 청와대가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철도 경쟁체제 도입을 밀어붙일지는 의문이다.

국토부의 한 관계자는 “현재 코레일은 효율화를 하기 힘들 정도로 덩치가 커져 있어 어떤 식으로든 메스를 가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며 “이런 상태로 가면 막대한 철도부채로 정상적인 운영이 어렵게 되고, 유지·보수비마저 줄어 철도안전에도 큰 위협이 된다. 적자노선도 비용을 줄인 민간사가 투입되지 않는다면 곧 폐지되는 수순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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