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경기 무상급식 위기

대권 밥상 차리려 애들 밥상을 엎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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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급식 찬성 2년 만에 돌변한 김문수 경기도 지사. 차기 대권을 노리는 그가 마침내 보편적 복지 반대세력을 결집시켜 자신의 지지층으로 만들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일련의 복지·경제민주화 정책 등을 놓고 박근혜 대통령과 각을 세움으로써 차기 주자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그의 도박에 대해 우려하는 시선이 많다.

지난 8월 15일 경기도 안양에 사는 주부 김모씨(43)는 저녁 뉴스를 보다가 가슴이 털썩 내려앉았다. 김문수 지사가 내년부터 무상급식 관련 예산 전액을 삭감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2학년 두 자녀를 두고 있다. 무상급식이 없어지면 급식비로 매달 10만원 정도 생활비가 추가로 지출된다. 학원비, 교재비 등으로 허리가 휘고 있는 김씨 입장에서 매달 고정적으로 10만원 이상이 지출된다는 것은 적은 돈이 아니다.

지난 2010년 2월 16일 무상급식을 실시하고 있는 경기 성남시 성남동 중앙초등학교 식당에서 학생들이 배식을 받고 있다. | 정지윤 기자

지난 2010년 2월 16일 무상급식을 실시하고 있는 경기 성남시 성남동 중앙초등학교 식당에서 학생들이 배식을 받고 있다. | 정지윤 기자

시민·사회단체 “용납 않겠다” 규탄
경기도가 재정난을 이유로 광역단체 중 처음으로 내년 무상급식 예산 전액(860억원)을 삭감하기로 한 뒤 야당과 시민사회가 강력 반발하는 등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전교조 경기지부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면 부모의 씀씀이를 줄이는 것이 먼저지 아이들 밥값부터 줄인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김 지사를 비판했다. 경기도의회 다수당인 민주당은 벌써부터 경기도의 내년 예산심의 때 무산급식 예산 삭감을 용납하지 않겠다며 벼르고 있다. 경기도교육청도 “학교 무상급식으로부터 시작된 보편적 교육복지가 유아 무상보육과 교육, 반값등록금과 고교 무상교육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며 “경기도교육청은 어려운 재정적 여건에서도 무상급식을 지켜내겠다”고 밝혔다.

지역 시민사회단체들과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경기도가 과연 “학생들의 밥값부터 깎을 정도로 재정이 열악하냐”는 비판과 함께 “애들 밥 가지고 장난치냐”는 정서까지 읽힌다.

김 지사의 ‘무상급식 포기선언’은 다소 의외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에 반대하고 나설 때 새누리당 광역단체장으로 무상급식에 찬성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상급식이 교육복지의 일환으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고, 이미 제도로 정착했다고 국민들이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충격적이기도 하다. 지난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은 보수와 진보진영 간의 최대 이슈였다. 무상급식이라는 정책을 고리로 연대한 야권(민주당, 민주노동당)과 보편적 복지의 첫 단계로 가는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한나라당(현재 새누리당) 간의 대결이었다. 당시 한나라당 후보들은 “무상급식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다”, “이건희 회장 손자에게도 무상급식을 해야 하나”, “무상급식은 포퓰리즘의 극치다”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쏟아내며 반대했다. 지방선거 결과는 야권연대의 완승이었다. 야권은 인천시장을 포함한 일부 광역단체장을 탈환하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방의회를 장악했다. 이후 무상급식은 새누리당 소속 단체장이 있는 대구·경북·부산·울산·대전 등에서도 실시하는 등 대세가 됐다.

특히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2011년 8월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를 강행했다가 낮은 투표율로 무산되면서 시장직에서 물러난 게 무상급식 논란에 쐐기를 박았다. 무상급식에 딴죽을 거는 행위는 정치적 자살처럼 여겨졌다.

서울과 달리 경기도는 무상급식의 상징적인 지역이었다. 김상곤 경기교육감이 2009년 첫 민선교육감 후보로 출마할 당시부터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당선됐다. 김문수 지사도 2011년 도의회에서 무상급식 예산을 ‘친환경 학교급식’이라는 용어로 바꾸긴 했지만 무상급식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현재 경기도에서는 도내 944개 초·중교, 학생 65만2000여명이 무상급식 혜택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 경기도교육청은 “경기도가 무상급식 예산 전액을 삭감한다고 해도 당장 초·중학생의 무상급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라며 도민들을 안심시키고 있다.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는 “도가 지원하는 무상급식 예산은 전체 예산의 12%에 불과하므로 교육청 자체 예산(4001억원)과 시·군 예산(3130억원)으로 무상급식이 가능하다”며 “다만 도의 지원이 끊기는 만큼 급식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재정이 열악한 시·군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대통령 선거 후보자 지명 전당대회가 열린 2012년 8월 20일 일산 킨텍스 제1전시관에서 2위를 차지한 김문수 후보가 연설을 하고 있다. | 박민규 기자

새누리당 대통령 선거 후보자 지명 전당대회가 열린 2012년 8월 20일 일산 킨텍스 제1전시관에서 2위를 차지한 김문수 후보가 연설을 하고 있다. | 박민규 기자

김 지사가 무상급식 예산을 전액 삭감한 표면상의 명분은 예산 부족이다. “빚을 내면서까지 모두에게 무상급식을 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경기도의 경우 경기침체 등으로 취득세 등이 줄어들면서 올해 하반기만 세수가 예상보다 6000억원이 감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 정가에서는 김 지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단순히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인이, 그것도 여권의 차기 대권주자가 무상급식처럼 휘발성이 강한 사안을 전액 삭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뭔가 정치적 노림수가 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다른 지자체를 봐도 그렇다. 경기도보다 상대적으로 재정이 더 열악한 인천도 무상급식 지원은 예년 수준(267억원)으로 편성한다는 계획이다. 전국 16개 광역단체 중 재정자립도가 15위인 전북 역시 무상급식 예산지원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전북도청의 예산담당자는 “내년에는 물가인상분을 고려해서 무상급식 예산을 소폭 인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실무진도 모르게 무상급식 포기 결정
‘친환경 학교급식을 위한 경기운동본부’, 전교조 경기지부에 따르면 경기도는 올해 홍보예산만 106억원에 달하는 등 김 지사 재임기간에 홍보비로 무려 250여억원을 사용했다. 또 전시성 행사인 ‘경기국제보트쇼’에 지난 2008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50억∼75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김 지사가 대권 도전의 랜드마크로 추진 중인 GTX 사업에는 총 13조원의 재원이 소요된다. 또한 경기도가 최근 정부의 DMZ 세계평화공원 계획과 관련해 DMZ 브랜드 세계화, 역사문화자원 활용 관광지 개발, 남북교류 및 통일기원 문화행사 등 총 23개 사업에 91억원을 투자하기로 한 것도 실속 없는 전시성 사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경기도청 김동근 기조실장은 “경기도가 공무원들의 인건비까지 깎기로 했다”며 “홍보비 등을 깊이 들여다보고 깎을 부분은 깎겠다”고 말했다.

다른 항목에서도 예산을 깎을 여지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무상급식 예산을 우선 삭감한 것은 정치적 고려에 의해 이뤄졌을 개연성을 말해준다. 실무진도 몰랐던 무상급식 예산삭감 결정 과정을 봐도 그렇다. 김 지사는 예산삭감 결정 과정에서 김동근 기조실장 및 소수의 참모진과만 논의를 했다. 경기도에서 무상급식을 담당하는 평생교육국의 경우 김 지사의 발표가 있고 난 후에야 알았다. 경기도의회 강득구 의원(민주당)은 “무상급식 관련 실무부서인 경기도 평생교육국이 김 지사가 발표하기까지 예산편성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며 “김 지사와 주변의 소수 참모그룹이 정무적 판단에 의해 결정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지사가 무상급식 찬반 논란에 불을 지펴 ‘무상 복지’ 이슈의 한복판에 서려는 의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구희현 ‘친환경 학교급식을 위한 경기운동본부’ 상임대표는 “김 지사가 무상급식을 쟁점화시켜 다음 대통령선거 때까지 끌고 가겠다는 전략으로 파악된다”며 “김 지사는 이를 통해 보수층도 결집시키고, 계속 뉴스 속의 인물이 되는 노이즈마케팅을 염두에 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친환경 학교급식을 위한 경기운동본부’가 8월 19일 경기도의회 앞에서 집회를 열고 ‘삭감된 무상급식 예산을 원상복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 ‘친환경 학교급식을 위한 경기운동본부’ 제공

‘친환경 학교급식을 위한 경기운동본부’가 8월 19일 경기도의회 앞에서 집회를 열고 ‘삭감된 무상급식 예산을 원상복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 ‘친환경 학교급식을 위한 경기운동본부’ 제공

이와 관련해 지역에서는 김 지사가 이미 도지사 3선 도전을 포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김 지사가 도지사 출마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이 같은 무모한 도박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지역 정가의 분석이다. 김 지사는 무상급식 예산을 삭감하면 다수당인 민주당의 거센 반발을 살 수밖에 없고, 다른 예산까지 정상적으로 통과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출마 포기를 결심했을 경우는 사정이 달라진다. 최악의 경우 도의회가 예산안을 통과시켜주지 않아도 김 지사로서는 잃을 게 없다.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강도 높일 듯
김 지사는 도지사 3선에 나서기보다는 뚜렷한 차기 주자가 없는 새누리당으로 들어가 ‘포스트 박근혜’를 노리는 쪽으로 정리한 것 같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 지사가 이런 구상을 하고 있다면 무엇보다 당내에서의 지지기반 확충과 당권 장악이 절실하다. ‘무상급식 포기 선언’은 당원들에게 그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새누리당 경기도당의 한 관계자는 “김 지사가 지난번 새누리당 대선 경선과정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완패하면서 당권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경선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다”며 “김 지사로서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새누리당의 당권을 잡는 데 지금이 적기라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지사가 무상급식 이슈를 계기로 겨누고 있는 궁극적인 목표는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시각도 있다. 복지·경제민주화 등 보수와 맞지 않는 정책 추진을 놓고 박 대통령과 각을 세움으로써 차기 대권자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김 지사는 정부의 취득세 영구인하 조치를 비판하고 나서는 등 박근혜 정부와 번번이 부딪치고 있다. 김 지사의 한 측근은 “사실 우리는 돈이 없으니까 (무상급식비를) 못준다는 것이지만 박근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메시지로 해석해도 부인은 하지 않겠다”며 “이번 사태의 원인은 복지를 해주겠다며 생색내지만, 그 책임은 지방정부에 전가하는 중앙정부에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김 지사가 앞으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점점 높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용꿈을 꾸고 있는 김 지사는 ‘무상급식 예산 전액 삭감’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다시 역사를 4년 전으로 되돌려놓은 것이다. 김 지사에 대한 판단은 국민들의 몫이 됐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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