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이미지들이 점령한 지하철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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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놓고 간 신문지를 즐거운 마음으로 읽던 시대는 끝났다. 폐지 줍는 노인은 쫓겨났고 그 자리를 현란한 광고들이 장악해버렸다. 온갖 상품이미지가 내 몸 구석구석을 찔러대도 나는 속수무책이다.

일산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오랫동안 서울의 동북방에서 살았다. 강북구·도봉구가 오랜 거처였는데, 그래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다녔다. 고교 3학년 때, 1985년 4월 20일에 기본요금 140원으로 상계에서 삼선교까지 부분 개통된 4호선을 거의 첫 손님이 되어 이용했다. 그해 가을, 10월 18일에 상계에서 사당까지 완전 개통된 뒤로는 완전히 자가용이었다. 서울 동북방에서 대학로에 가거나 종로서적에 가거나 서울역에 갈 때 내 자가용은 지하철 4호선이었고, 그래서 지금도 어쩌다가 그 노선을 타게 되면 옛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특히 저녁 무렵의 동대문운동장역. 아, 지금은 그 무슨 역사니 문화니 하는 말에 억지로 공원이란 단어까지 붙여버린 역이 되었는데, 아무튼 그 동대문운동장역의 저녁 7시쯤이면 다음날 신문이 미리 매대에서 팔리곤 했다. 그것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2011년 3월 11일 광화문역

2011년 3월 11일 광화문역

그 신문을 다 읽을 무렵이면 미아역이나 쌍문역에 내릴 때가 되는데, 그때 그 신문을 어떻게 했던가. 그냥 선반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거의 실시간으로 누군가 그 신문을 가져가서 읽는다. 그렇게 하여 신문은 돌고 돈다. 아마도 서너 사람의 손을 거친 끝에 신문은 휴지통으로 던져졌을 것이다. 어쩌면 어떤 알뜰한 사람이 집에까지 가져가서 여러모로 재활용했을 것이다.

선반 위 신문을 읽던 기쁨 사라지고
다른 이가 읽고 선반에 던져놓은 신문을 확보하여 읽는 행운도 있었다. 시간도 벌고 돈도 아끼는 경우였다. 시커먼 터널을 달리는 동안 뭐라도 읽을거리를 확보했다는 것에 더하여 몇 푼의 신문 값도 아끼게 된 것은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그랬는데,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곳곳에 신문지 수거함이 놓여 있다. 다 읽고 난 신문을 선반에 올려놓지 말고 꼭 수거함에 넣어달라는 안내문이 곳곳에 붙어 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 딱 한 번 읽은 신문을 그냥 수거함에 버리면 자원과 정보와 일상적 즐거움의 낭비가 아닐까. 그 신문을 선반에 올려놓으면 누군가가 읽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집에 가져가서 태풍 불 때 유리창에라도 붙이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지하철을 담당하는 기관(노선마다 담당 주체가 달라서 그냥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에서는 읽고 난 신문지의 처리가 걱정거리였던 모양이다. 특히 아침 출근시간대가 그렇다. 요즘은 저마다 스마트폰으로 신문도 읽고 메일도 보내고 어젯밤에 미처 못본 드라마도 보는 시절이지만 그래도 조간신문을 읽는 사람이 있고 특히 지하철 입구마다 비치된 무가지 신문을 들고 타는 사람들이 많다.

2012년 10월 8일 선릉역

2012년 10월 8일 선릉역

그때 허름한 차림의 노인들도 함께 탄다. 그들도 신문을 노린다. 읽기 위해서가 아니다. 모아서 폐지 수집상에게 팔기 위해서다. 아침 출근시간대에 노인들은 지하철을 바쁘게 오가면서 선반 위에 버려진 신문을 급하게 수거하고는 사라진다. 피곤한 몸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눈에 다소 거슬리는 풍경이 될 때도 있다. 폐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인들끼리 말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출근자 중에 누구는 민원전화를 걸 수도 있다. 몇 푼 되지도 않는 폐지 값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지하철을 돌면서 신문을 확보하려는 노인들은 공익근무요원을 피해 급히 달아난다. 이 살벌한 경쟁 도시의 한 단면이다.

그래서 지하철 담당 기관에서 신문지나 폐지 수거함을 따로 비치하기로 한 것이다. 길목마다 수거함을 비치했다. 지하철 안팎으로 안내문도 붙였다. 신문지 수거함 공모전도 진행했다.

그리하여 어찌되었는가. 노인들은 공익근무요원들에 의해 쫓겨났다. 그들이 추방당한 자리는 그리하여 쾌적한 공간이 되었는가.

2012년 12월 13일 을지로3가 역사

2012년 12월 13일 을지로3가 역사

나는 지금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스크린도어가 가로막고 있다. 그런데 그냥 안전 유리막이 아니다. 공학적 차원에서는 스크린도어가 소음과 분진과 안전사고로부터 승객을 보호하는 장치이지만 운영 기관의 재정적 관점에서, 그리고 기업의 마케팅 관점에서 이 거대한 유리막은 잠재적 소비자를 실시간으로 공략할 수 있는 무차별적인 광고판이다.

넘치는 이미지들, 과연 쾌적한가
나는 지금 스크린도어가 아니라 거대한 광고판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닫힐 때마다 막대한 자본을 후광으로 삼는 각종 상품의 이미지들이 현란하게 춤을 춘다.

그 이미지들은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시각적 촉각성’이 무엇인지 대번에 가르쳐준다. 내 시각을 거쳐 들어온 온갖 상품의 이미지들은 내 몸의 구석구석을 날카롭게 찔러댄다. 시각적 체험이 실제로 몸에 와서 꽂히고 자극하여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게 만드는 촉각적 체험이 된다. 가히 거대한 자본의 융단폭격이다.

내가 타야 할 지하철이 다가온다. 스크린도어, 아니 거대한 광고판이 스르르 열리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간다. 지하철 내부 또한 움직이는 광고시장이다. 누군가 놓고 간 신문지를 즐거운 마음으로 확보해서 읽던 그런 시대는 끝난 것이다.

2013년 3월 30일 신사역

2013년 3월 30일 신사역

출입문이며 선반이며 그 위의 천장까지 온통 거대 기업의 광고판이요, 사실상 그에 버금가는 기업이 되어버린 유수의 대학교의 광고판이다. 폐지 줍는 노인은 쫓겨났고 그 자리를 거대 자본의 현란한 광고 이미지들이 폭포수처럼 장악해버린 지하철의 풍경!

나는 어렵사리 빈 자리를 확보하여 주저앉는다. 선반 위는 텅 비었으니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사방에서 조여든 현란하고 재치 있고 아름다운 광고들,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의 무자비한 공격임에 틀림없는 저 이미지들에 맞서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신문지 줍는 노인과 저 현란한 자본의 광고 이미지들, 도대체 무엇이 더 꼴불견이냐. 내 마음은 그렇게 질문하고 있지만 사실상 속수무책이므로 나는 그저 스마트폰을 꺼내 들 뿐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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