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골목이 낭만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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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욕망에 허기를 느낀 사람들에게 달동네 골목은 ‘옛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낭만적 대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남루하여 드러내기 싫은 일상이다.

황석영의 중편소설 <돼지꿈>은 20세기 중엽의 가난했던 시절을 견뎌낸 가난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찬가다. 가난한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벌어진 숱한 상처와 악연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것을 끌어안고,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마을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고 들어서 아는 일이다. <돼지꿈>은 복날 더위가 이글거리는 한여름, 변두리의 간이주택이나 움막집에서 넝마주이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깊은 애정으로 그렸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가난은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나누며 견디게도 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돼지꿈>에서는 소주나 막걸리가 가난한 마을의 시름을 덜어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종종 그것이 통제되지 않는 폭력으로 급변한다. 막걸리에 취하여 귀가한 가난한 동네의 아버지는 종종 제 분을 못이겨 아내를 패고 아이들을 팬다. 가난은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한다. 절망과 환멸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만든다. 삶의 밑바닥에 침전된, 지워지지도 않고 게워낼 수도 없는 가난의 기억은 학대와 조롱의 참담함으로 얼룩져 있다.

부산 감천마을에 그려진 이질적인 벽화.

부산 감천마을에 그려진 이질적인 벽화.

늘어가는 ‘벽화 마을’들
<해리 포터> 시리즈로 유명한 소설가 조앤 롤링은 2008년 하버드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도 저도 가난을 겪었고, 가난이라는 것이 그리 달가운 경험은 아니라는 데에 저도 부모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가난하면 삶이 두렵고 버거워지며 때때로 심한 우울증을 느끼게 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에서 헤어나오는 것, 그것은 진정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일이지만 가난 자체를 낭만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날 서울이며 부산, 대구, 광주 같은 대도시는 물론이고 전국의 군소도시 읍·면·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 있으니 바로 ‘벽화 마을’이다. 최근의 사례만 보자. 지난 6월 초, 경북과학대 봉사동아리가 칠곡군 기산면의 작은 마을을 방문해 벽화를 그렸다. 7월 초에는 대구 달서구 두류동에서 ‘파도고개 미로(美路)마을’ 타일 벽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7월 중순에는 경희대 학생들이 충남 청양군 운곡면의 시골 마을을 찾아 벽화를 그렸다. 7월 하순에는 농협중앙회 경남본부가 경남 거창군 주암마을을 찾아 담장 벽화를 그렸다. 경북농협 칠곡군지부 직원들도 칠곡군 가산면 학상리 마을에서 벽화 그리기 봉사를 했다. 8월 초순에는 경기도 시흥시 정왕본동에서 지역주민과 학생들이 함께 벽화 그리기를 했다.

이런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진다. 물론 그 순수한 뜻과 작업 후의 깨끗해진 마을 풍경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재정과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농촌이나 변두리의 가난한 마을을 그대로 두기보다는 갸륵한 정성과 뜻이 모여 조금이라도 말끔하게 단장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마을 가꾸기’의 핵심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그 벽화에 그려진 소재가 그 마을의 역사나 문화와는 대체로 상관 없는 ‘낭만적인 풍경’이다.

가을동화 촬영지라는 안내문이 서 있는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

가을동화 촬영지라는 안내문이 서 있는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

그런 마을을 ‘구경’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고, 그리하여 그런 마을 자체가 ‘문화관광 콘텐츠’로 급변하고 있다. 그곳에서 드라마나 영화라도 찍게 되면 그 촬영장소를 찾는 이들이 부쩍 늘어난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수암골목 1번지, 일명 ‘수암골’이 대표적이다. 청주의 대표적인 달동네인데 예쁜 벽화들이 비좁고 어수선한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소지섭과 한지민이 주연한 드라마 <카인과 아벨>의 촬영장소라는 점 때문에 찾는 이가 늘었다. 속초항에 가면 아바이 마을이 있는데 원빈과 송혜교가 출연했던 드라마 때문에 ‘가을동화 촬영지’라고 쓰여 있다. 그뿐인가. 미시령 쪽으로 가면 아예 공공도로 표지판에 ‘대조영 촬영지’라고 쓰여 있다. 2006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의 세트장이 거의 문화유산 수준으로 등극한 셈이다.

아무튼 가난한 마을을 구경하러 가는 행렬이 제법 길다. 부산 사하구 감천2동 달동네는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 ‘한국의 산토리니’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저 그리스 남쪽 에게해의 유명한 관광지 이름이 부산의 달동네에 붙은 것이다. 한국전쟁 때 피란 온 태극교도들이 먼저 판자촌을 형성했고, 그 후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비록 가난한 동네지만 누구라도 받아들여줄 것 같은 이 산동네로 모여들어 한때 2만명 넘게 살던 곳이다. 그런데 이제는 부산 관광 1번지가 되었다. 주말에는 수천명씩 몰려든다. 지난 5월 말부터 3일 동안 열린 골목축제에 무려 3만여명이 다녀갔다.

가난을 구경하는 불편한 행렬들
가난한 동네를 구경한다는 것은 물론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오늘날의 대도시는 획일적이며 비인간적이다. 도시는 비대해졌으나 그것을 만든 인간은 오히려 왜소해졌다. 하늘을 찌르는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는 부와 신분의 상징이며, 도시의 모든 욕망이 집중된 곳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이 낳고 살 만한 인간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천시 강화도 온수리의 마을벽화.

인천시 강화도 온수리의 마을벽화.

그리하여 가난한 동네의 골목을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담장 너머로는 그 옛날 가족들이 둘러앉아 국수를 먹던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허름한 동네의 공터에서는 어린 시절 어두워질 때까지 놀던 추억이 환각처럼 되살아난다. 잔인한 대도시의 냉혹한 직선에 짓눌리다 보니 가난한 동네의 곡선에 마음이 빼앗긴다.

그렇기는 해도 결국은 ‘구경’이다. 만약 어디 민속촌이나 테마파크에 ‘달동네’를 만들어놓는다면 찾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모사물일 뿐이다. 청주의 수암마을이나 부산의 감천마을이나 서울의 홍제동 개미마을은 모사물이 아니다. 그래서 찾아간다.

문제는 사람이 아직 살고 있다는 점이다. 큼직한 렌즈가 달린 디카로 연신 ‘낭만’을 포착하는 사람도 있고, 스마트폰으로 달동네의 일상을 ‘훔치는’ 사람도 있다. 널어놓은 빨랫감도 찍고 평상에 앉아 쉬고 있는 할머니도 찍는다.

찍는 사람에게는 가난이 찍을 만한 낭만적 풍경이지만,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어쩌면 남루하여 부끄러운 일상이다. 탄광지대로 유명한 강원도 철암의 삼방마을 사람들은 그래서 외지인이 드나드는 마을 입구의 한쪽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벽화도 그려져 있고 옛 탄광지대의 흔적도 많이 남아 있는 곳이지만, 초라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싫고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외지인도 보기 싫기 때문이다. 도시의 욕망에 허기를 느낀 사람들에게는 가난한 동네의 비좁은 골목이 ‘옛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낭만적 대상이지만, 그러나 21세기 초엽임에도 여전히 20세기 중엽의 취약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낭만도 아니고 그래서 구경거리가 될 수는 없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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