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강성노조 오해 풀어야 자식들한테 덜 부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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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료원 조미영 수간호사, 26년간 근무하며 공공병원 필요성 깨달아

조미영씨(46)가 간호사가 된 건 우연만은 아니었다. 일찍부터 간호사를 동경했다. 물론 10대 시절 그가 간호사의 업무여건을 속속들이 알진 못했다. 사촌언니가 간호사였는데, 참 좋아 보였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문직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활동적인 성격의 그가 꿈꾼 직업 중에는 여군도 있었다. 간호사냐 여군이냐. 현실이 길을 알려줬다. 고교 시절 아픈 아버지를 간병하는 동안 그의 꿈은 군복 대신 간호복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사회]“강성노조 오해 풀어야 자식들한테 덜 부끄러워”

노조 설립 때도 병원과 심한 마찰
경남 삼천포시(현 사천시)에서 자란 그가 40분 거리의 진주에서 일터를 잡은 것은 1987년 7월이었다. 조씨는 간호학교를 졸업한 뒤 몇 군데 병원에 시험을 봤다. 민간병원과 공공병원을 가리지 않았다. 먼저 원서를 냈던 서울의 어느 병원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고 진주의료원으로 가게 됐지만, 서운하지 않았다. “저희 때는 결혼하면 그만두는 간호사들이 많았어예. 요즘은 마 20년은 있어야 되지만 그때는 스물일곱에 수간호사가 되기도 했지예. 공공병원은 결혼해서도 다닐 수 있었고, 그때만 해도 진주의료원은 진주 간호사들이 오고 싶어하는 병원 중 하나였지예. 시내에 있었고 의사들도 좋았고 환자가 미어터졌어예. 양질의 병원이라고 소문난 데였지예.”

진주의료원에는 노동조합이 없었다. 1988년 11월부터 2000년 4월까지 재임한 강대영 전 원장은 “노조가 생기면 진주의료원이 망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노동조합이 뭐길래 저리 반대할까? 당시 간호사들은 노조에 대해 잘 몰랐다. 진주는 교육도시다. 산업기반이 약하다. 노조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몇 군데 작은 공장에 노조가 있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과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노조에 대한 원장의 거부감이 오히려 노조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노조가 있으면 왜 망한다카지?”

궁금했던 직원들은 노조가 있던 마산의료원에 문의했다. 마산의료원 노조위원장이 진주에 왔다. 두 병원 직원들의 처우·수당·임금을 자료를 놓고 비교했다. 진주의료원 노동조합은 1994년에 생겼다. 조 간호사는 노조를 만드는 것도,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고 기억한다. “지금은 다 공채를 하지만, 그때는 원장이나 관리자들 입김이 셌거든예. 시험을 보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인맥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어예. 병원하고 엄청 마찰이 있었지예. 앞에서는 노조를 인정하겠다고 하고 뒤에서는 계속 조합원들을 탈퇴시킬라카고 그랬지예.”

1999년 7월, 진주의료원 노조는 27일 동안 파업을 했다. 경남도는 지난 4월 9일 ‘진주의료원 휴·폐업 진실백서’에서 15년 전에 일어난 이 파업을 ‘강성노조’의 증거로 제시했다. 노조가 ‘인사위 징계위 노조 참여, 유니언숍 변경, 당연 퇴직자 복직’ 등 무리한 요구를 했고, 당시 강대영 원장이 노조원들에게 감금된 상태에서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당시 파업은 임금인상, 단체협약 갱신, 복지 향상 등 당연한 요구였다고 반박했다. 경남도민일보는 이틀 뒤 기사에서 “현장에서 지켜본 기자 기록으로는 거꾸로 강 원장이 노조원을 폭행했고, 그 과정에서 강 원장 역시 ‘다쳤을 수도 있다’고 보인다. 이를 거두절미하고 ‘노조원이 원장을 감금·폭행’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 왜곡”이라고 보도했다.

신출내기였던 26년 전 조 간호사에게 ‘진주의료원=공공병원’이라는 특별한 자의식이 있지는 않았다.

“서민들이 주로 찾는 공공병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예. 글치만서도 ‘결혼해서도 다닐 수 있는 전망 좋은 병원’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어예. 이 병원이 어떤 병원이어야 하는지는 일을 하다보니 알게 된 거지예. 특별히 힘들었던 일이예? 응급실이 그랬지예. 지금 이 자리(2008년 개원한 현재의 초전동 병원)로 오기 전에는 행려환자나 술 먹고 쓰러진 환자들이 응급실에 많이 왔지예. 경찰이나 119에서 그런 사람들을 꼭 진주의료원으로 델꼬 왔어예. 근방에 다른 병원들이 있었는데도 그랬지예. 그런데 교통사고 환자들은 사고가 진주의료원 앞에서 나도 택시기사들이 꼭 민간병원으로 데려다줬지예. 환자들을 병원에 데려다주면 병원에서 돈을 줬다 카더라고요. 암암리에 그런 일들이 있었지예. 우쨌든 행려환자나 취객이 오면 참 곤욕이었지예. 옷에 똥·오줌을 싼 사람들도 있는데 씻기고 옷 갈아입혀야 하지, 환자들 신원조회도 해야지….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받은 경우예? 그런 일은 없었어예. 저희가 과잉진료를 안 한다 아입니까. 할 수도 없고예. 서민들 상대로 MRI니 위내시경이니 찍으라고 강요는 몬하지예.

저희 병원은 입원환자에 대해서도 정산을 한 달에 한 번 하는 다른 병원과는 달라예. 퇴원할 때 하지예. 병원비 안 내고 나가시는 분도 있어예. 그래도 영 형편이 안 되면 받을 방법이 없지예. 그래도 그런 거는 사실 우리가 안고 가야 되는 게 맞다 아입니까.”

2009년 신종플루가 발생했을 때 진주에서는 보건소를 제외한 일반병원 중에서는 진주의료원만이 신종플루 환자들을 치료했다. 정신없이 바빴지만 간호사들에게는 ‘공공병원 진주의료원’의 존재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던 소중한 계기였다.

경영마인드 없는 원장들 보내 경영 악화
진주의료원은 1989년과 1990년 전국의료원 종합경영실적 평가에서 2년 연속 1위를 했다. 경영은 조금씩 나빠졌다. 조미영 간호사는 1987년 2월 개원한 경상대병원이 자리잡으면서 환자들이 많이 빠져나갔고, 2008년 진주 시내에서 진주시 외곽으로 의료원을 신축이전하는 과정에서 경영실적이 크게 나빠졌다고 말했다. 위기를 돌파할 능력 있는 원장이 없었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지금까지 원장들이 20년 이상 개인의원하다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예. 원장들 중에는 건설회사 출신 비의료인도 있었고예. 의학용어 하나 모르고 경영마인드도 없는 사람을 앉혀놓고 경영을 하라 하면 우짜라는 긴지. 강성노조, 귀족노조라는 말보다 그게 더 억울하지예.”

경남도는 7월 1일 진주의료원 해산 조례안을 공포했다. 5월 29일 경남도가 폐업을 공식 발표할 당시 70명이던 간호사들은 두 차례 명예퇴직과 자발적인 퇴직 등으로 지금은 35명으로 줄었다. 1987년 함께 입사했던 조 간호사의 동기들 4명도 병원을 떠났다. 조미영 간호사는 지난 5월 29일 해고통보를 받은 해고자 신분이지만, 병원을 지키고 있다.

그는 1990년대 후반 이후 구조조정 기류가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정년을 채울 수 없겠다는 생각을 오래 했다. 2년 전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따놓았지만 조 간호사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병원과 거리에서 폐업 철회 투쟁을 벌이는 후배들을 대신해 마지막으로 남은 8층 노인병동 환자 2명을 돌보는 게 요즘 그의 일상이다. “홍준표 도지사가 선거에 나오기 전에 관리직원 하나가 그랬지예. ‘홍준표를 찍으면 의료원 적자를 줄여준다 카더라.’ 완전히 거꾸로 됐지예. 제가 2008년부터 3년 동안 노조위원장도 하고 4월에는 단식도 하고 해서 홍 지사가 ‘강성노조=조미영, 서수경(퇴직)’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카대예. 그 오해는 풀어야지예. 물질적으로는 아쉬운 부분도 있지예. 명퇴를 했으면 돈이라도 조금 받았을 낀데 지금 해고자 신분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도 없고예. 그래도 자식들한테 좀 덜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7월 3일 오후 진주의료원에서 만난 조 간호사는 병동 컴퓨터 모니터로 이날 오전부터 시작된 진주의료원 국정조사 실시간 중계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는 국정조사에 큰 희망을 걸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날 국정조사에서 “(경남도를 대법원에) 제소했을 때 실익이 적지 않나 판단한다”고 말했다. 진주의료원 해산 조례안을 도의회에 재의요구하지 않고 공포한 경남도에 대한 제소를 포기한 것이다. 조 간호사의 많지 않았던 희망이, 한 뼘 더 줄었다.

<글·사진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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