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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이 부른 후폭풍, 어디까지 미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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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 넘어 사회 각계 시국선언 줄이어… 2008년 촛불집회 재연될 가능성도

국정원이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전격 공개한 이후 후폭풍이 거세다. 
검찰 수사 결과 국가정보원이 인터넷 댓글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는 등 대선과정에 개입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6월 14일. 그때도 대학가에서 시국선언이 이어졌지만 국정원이 국면전환을 위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공개하면서 오히려 시민사회의 반발이 더 거세지는 양상이다.

지금은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쉽게 예측하기 힘든 국면이 됐다. 대학가에서 시작된 시국선언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미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정원 및 경찰의 불법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미주동포들’은 시국선언에서 “조국의 현실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며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했다. 이들은 미국과 캐나다에 살고 있는 1018명의 서명을 모은 데 이어 세계 각국 한인사회로 서명운동을 확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재미 한인단체들의 모임인 미주희망연대도 6월 23일(현지시간) 워싱턴DC 주미대사관 앞에서 국정원 규탄 집회를 연 바 있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비판하는 시민과 학생들이 6월 23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비판하는 시민과 학생들이 6월 23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급기야 청소년들까지 시국선언 행렬에 가세했다. 대안학교인 충남 금산간디학교, 인천 산마을고등학교, 경남 간디고등학교 학생회는 6월 2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겠다고 27일 밝혔다.

청소년들이 국정원 사태에 관한 시국선언을 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간디고등학교 학생회 서정한 부회장은 “고등학생의 안목으로도 이러한 시국은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시국선언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 사소한 이야기로 시작됐는데 직접 행동에 옮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교별로 학생총회 같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학생 모두가 시국선언을 하는 것을 논의한 뒤 최종 의결했다”고 밝혔다.

청소년·해외동포까지 시국선언 대열 동참해
시민사회 진영의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민주노총·참여연대·한국진보연대 등 209개 시민사회단체들은 6월 27일 시국회의를 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북방한계선(NLL) 포기 논란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로까지 이어진 국정원 사태에 대한 공동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시민사회단체들은 공동결의문에서 “국정조사를 통해 국정원의 대선개입 실상이 낱낱이 밝혀져야 할 것”이라며 “국가정보원 정치개입 공범자, 경찰과 국정원을 비롯한 축소·은폐 공범자도 처벌하고 정치개입 근절을 위해 국정원을 전면 개혁하라”고 요구했다.

이들 시민사회단체는 6월 28일 전국적 규모의 촛불집회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정부와 여당에 대한 압박에 들어갈 계획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이광철 변호사는 “검찰 수사 결과 발표 전인 6월 5일 일차적으로 성명을 발표했지만 국정원의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로 정국이 더욱 혼란스러워진 시점에서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자는 단체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면서 “운영위원회의 논의에 따라 전국적인 조직을 활용해 다각적인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참여연대의 이태호 사무처장도 “현재 섣불리 전망하긴 힘들지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참여하기 시작하면 사태가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잇따른 시국선언의 시발점은 대학가였다. 서울대 총학생회가 6월 20일 국정원 사태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고, 같은 날 이화여대·경희대·성공회대 총학생회도 시국선언 대열에 합류했다. 21일부터는 서울 광화문 일대에 다시 촛불이 등장했다.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을 주축으로 한 대학생과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이다.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 인도 한편에 모인 300~500명가량의 시민들은 자유발언대에서 전·현 정권과 국정원을 성토했다. 한대련과 한국청년연대 등 대학생·청년단체들은 현재의 촛불집회를 시민사회단체들과 연계해 확대하는 방식으로 7월 이후로도 매일 이어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학가에서 시국선언이 잇따르면서 대학 내 여론이 양분되는 상황도 벌어졌다. 서울대에서는 6월 20일의 성명서 발표가 학내 여론을 수렴하지 않은 총학생회의 독단적인 처사라는 주장이 속속 나왔다. 이에 대해 서울대 총학생회는 7월 중으로 계획하고 있는 시국선언은 전체 학생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대 총학생회 최원석 정책국장은 “이번 국정원 사태가 헌법질서의 위기를 초래했기 때문에 사안의 중대성에 따라 성명을 발표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 총학생회는 외부 정치단체와 연계돼 있지 않은 비운동권 총학이다. 그런데도 총학생회의 활동이 정치적이라고 몰아가는 주장이 있어 학내 논의를 거쳐 시국선언을 준비하려 한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 전국 규모 촛불집회 예고
연세대와 고려대, 서강대 등에서도 여러 대학들의 시국선언이 속속 이어지자 총학생회 차원의 시국선언을 낼 것인지를 두고 격론이 일었다. 정치적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사안에 대해 총학생회가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측과 국가기관의 권력남용이 이미 검찰의 수사로도 확인된 만큼 현안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일 수 있다는 측이 맞선 것이다. 총학생회 차원의 시국선언을 보류한 서강대의 경우 4명의 학생들이 개인 명의로 민주주의의 후퇴를 경고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학교 게시판에 붙이기도 했다.

일부 시국선언 반대여론과 기말고사 및 방학기간 때문에 대학생들의 활동이 줄어든 대학가에선 교수들이 전면에 나섰다. 6월 25일 한양대에 이어 26일 성균관대·가톨릭대·충북대 교수들이 각각 시국선언문을 냈고, 27일 서울대와 청주대, 28일에는 동국대 교수들도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교수들의 시국선언 대열은 경북대·성공회대·전남대·중앙대 등 전국적으로 확산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반면 정치권의 국정조사 움직임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검찰이 사건 관련자에 대한 기소 의견을 밝힌 것은 6월 11일이었지만 여야는 2주가 지난 25일에야 국정조사 실시에 합의했다. 국정조사특위 위원장을 맡기로 한 민주당은 신기남 의원을 위원장으로, 정청래·박영선·신경민 의원 등 능력이 검증된 의원들을 위원으로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야권이 국정조사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일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는 전망도 나오는 형편이다.

정치평론가인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국정조사를 실시하기로 한 것 자체는 시민들이 입법부를 통해 국가 정보기관의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것이지만, 현재 야당이 전반적으로 큰 신뢰를 얻지 못해 힘을 잃은 상황이기 때문에 조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기관 내부의 제보자를 확보할 수 있을지가 확실치 않다”고 말했다.

현재 이어지고 있는 시국선언과 촛불집회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 촉발된 촛불집회만큼 파급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다양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국정조사가 지지부진한 결과를 보여 시민들의 공분이 쌓이면 2008년 당시의 ‘거리의 정치’가 재연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며 “현 정부와 여당이 정당성에만 집착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일반시민들까지 대규모로 참여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시민들의 반응은 저조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2008년의 촛불집회는 일상과 밀접한 먹을거리 문제여서 시민들이 체감하는 폭이 더 컸다”면서 “18대 대선 이후 시민들 사이에서 정치적 참여를 통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감이 떨어진 것도 참여를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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