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남북회담 무산

남북회담 ‘급(級)’ 논란 나온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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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국가체제 때문… “北, 통일부 상대할 정부기구 없어 조평통 내세워”

6년 만에 재개될 예정이었던 남북당국회담이 무산됨에 따라 후유증이 잇따르고 있다. 남북한 및 정치권, 학계, 시민단체 등 각계에서는 회담 무산 책임론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특히 북한은 회담 무산 이후 복원시켰던 남북간 판문점 연락 채널을 다시 끊었다. 북한은 실무접촉 과정을 공개하며 “남측 수석대표와 북측 수석대표의 급이 맞지 않아서 무산됐다”는 남측의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했다. 북측은 또한 “(앞으로) 회담에 대해 털끝 만한 미련도 없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남북한간의 추후 회담은 상당 기간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남북장관급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이 이뤄진 6월 9일 판문점 우리측 평화의 집에서 남북 수석대표를 맡은 천해성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왼쪽 세 번째)과 김성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부장 (왼쪽 두 번째) 등 양측 대표단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 통일부 제공

남북장관급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이 이뤄진 6월 9일 판문점 우리측 평화의 집에서 남북 수석대표를 맡은 천해성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왼쪽 세 번째)과 김성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부장 (왼쪽 두 번째) 등 양측 대표단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 통일부 제공

이번 남북회담 무산의 원인은 양측 수석대표들의 격(格)과 급(級) 때문이었다. 회담 무산과 관련해 통일부는 “북측이 우리 수석대표의 급을 문제삼으면서 북측 대표단의 파견을 보류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다”고 밝혔다. 우리측은 북측 회담 수석대표로 김양건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통전부장)이 나올 것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북측이 끝내 우리측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남측은 류길재 장관 대신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통보했다. 하지만 북측은 이에 반발했고 회담이 무산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평소 강조한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점을 실천한 셈이다.

전문가들 “남북대화 격보다 내용 중요”
하지만 북한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학자들은 남북대화에서 격(格)보다는 실질적인 내용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존심이 강한 북한을 상대해서 서로 기싸움만 하다보면 남북대화가 중지됐던 이명박 정부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진희관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사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주요 인사들이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와 어느 정도 가까운지, 실세인지 정확히 모른다”며 “그래서 과거 정부에서는 북한이 장관급 회담 수석대표로 누구를 보내더라도 그만한 비중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회담에 임했다”고 말했다.

남북한간에 회담 수석대표를 놓고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양국의 국가체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당(노동당)이 모든 정부기구보다 권력구조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더구나 수령제 체제인 북한에서는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노동당을 직할 통치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정은 제1비서를 보좌하고 있는 노동당 비서국이 북한에서 가장 힘이 있는 조직이다.

이번에 쟁점이 됐던 김양건 통전부장은 노동당 비서국 소속 대남담당 비서이며, 통전부는 비서국 산하의 전문부서다. 통일전선부의 ‘통일’이라는 용어는 남북통일을 의미하는 ‘통일(Unification)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연대를 의미하는 연합·연대(United)’의 의미다. 통일연구원 정영태 선임연구위원은 “통전부는 대남사업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사회주의 지지단체를 규합하고 비동맹국가에 대한 외교도 담당하고 있다”며 “주요 대남 관련 정책은 김양건 통전부장이 김정은 제1비서와 김경희 노동당 비서(김정은의 고모)의 지휘를 받아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김양건 통전부장, 노동당 비서국 소속 ‘실세’
이 같은 북한의 권력구조로 봤을 때 김양건 통전부장은 김정은 제1비서의 최측근이며, 북한을 움직이는 군부 인사들과 함께 실세 중 한 사람이다. 북한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최근 성명을 통해 “우리의 당 중앙위원회 비서(김양건)가 남측 행정부처 장관 따위와 대상도 되지 않는다”며 “북남대화 역사가 수십년을 헤아리지만 우리측에서는 당 중앙위원회 비서가 공식 당국대화 마당에 단장으로 나간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주장했다. 대체로 통전부는 직접 남한 정부와 국민을 상대하지 않고 모든 대남기구와 단체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에 대해 통일부는 1994년 6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북한 김일성 주석의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판문점 남북 예비접촉에서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가 이홍구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상대했다고 반박했다.

회담 진행됐다면 김양건-원동연 투톱 가동
김양건 통전부장은 북한에서 대남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김양건 부장은 외교분야에서 해박한 지식과 능력을 인정받아 노동당 비서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특히 중국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2007년 10월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주역이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우리측은 4명이 회담에 배석했으나, 북측에서는 김양건 부장이 단독으로 배석해 그는 ‘김정일의 최측근’임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2009년 8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한 적도 있다. 또한 2009년 9월 싱가포르에서 임태희 노동부 장관을 만나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협의하기도 했다. 특히 북한은 그가 지난 4월 개성공단을 방문한 직후 북측 노동자를 전원 철수시키고, 공단 가동을 잠정 중단시켰다.

고 김대중 대통령 북한 조문단의 원동연 아태평화위 실장(왼쪽부터),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현인택 통일부 장관, 김천식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이 2009년 8월 22일 조문단 숙소였던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만나고 있다. | 통일부 제공

고 김대중 대통령 북한 조문단의 원동연 아태평화위 실장(왼쪽부터),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현인택 통일부 장관, 김천식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이 2009년 8월 22일 조문단 숙소였던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만나고 있다. | 통일부 제공

김양건 통전부장 밑에 있는 원동연 제1부부장, 맹경일 부국장 등도 ‘핵심 대남라인’이다. 원동연 제1부부장과 맹경일 부국장이 김양건의 대남 행보를 보좌하고 있다. 원 제1부부장은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 문안 작성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는 1992년 남북 고위급 회담 이후 20여년간 대남사업 분야에서만 일해온 베테랑이다. 그는 또한 2009년 10월 남북간 특사 비밀회동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번 남북당국회담 대표단 명단에도 원동연 제1부부장은 포함돼 있었다. 원동연 제1부부장은 북측 대표단 보장성원(안내요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만약 당국간 회담이 진행됐다면 원 제1부부장이 서울에서 상황실장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즉 원동연 제1부부장이 회담 상황을 수시로 체크하고, 이를 평양의 김양건 부장에게 보고하면 김양건 부장은 김정은 제1비서의 재가를 받는 구조였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원동연-김양건’ 투톱체제가 가동 직전에 멈춰선 것이다. 맹경일 부국장은 김양건 부장과 원동연 제1부부장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며, 대남 접촉과정에서 주로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장용석 선임연구원은 “이번에 만약 남북당국회담이 열렸으면 평양의 김양건 통전부장이 서울의 원동연 제1부부장에게 훈령을 내리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며 “현재 북한에 있는 대남 전문가들 중 ‘김양건-원동연’은 최상의 라인업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통일부 차관 상대”
북한의 정부기구인 내각에는 우리의 외교부에 해당하는 외무성은 있지만 통일부와 같은 조직은 없다. 북한에서 남한을 담당하는 조직은 통전부 지휘하에 있는 외곽단체 또는 유관단체들이다. 대표적인 단체가 조평통, 아태평화위원회, 민족화해협의회 등이다. 이른바 남북대화에 나서는 ‘대남일꾼’들도 이들 단체 명함을 갖고 있다. 노동당의 외곽단체인 조평통은 4·19 혁명 다음해인 1961년 5월 ‘평화통일과 남북교류’를 표방하는 노동당 산하 기구로 설립됐다. 남한에 대화를 제의하거나 남한의 대북정책을 비난할 때는 꼭 조평통이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성명을 발표해 왔다. 북한의 내각에 통일부의 상대 역할을 하는 정부기구가 없기 때문에 조평통이 통일부의 상대역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은 이번 당국간 회담을 제의할 때도 조평통 대변인의 특별 담화문 형식을 빌렸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조평통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다. 통일부는 조평통이 대통령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와 유사한 기구라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의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2007년 12월 1일 2박3일간의 방문 일정을 마치고 북으로 귀환하기 위해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을 떠나며 환송나온 인사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북한의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2007년 12월 1일 2박3일간의 방문 일정을 마치고 북으로 귀환하기 위해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을 떠나며 환송나온 인사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북한이 이번 회담에 조평통 강지영 서기국장을 내세웠다. 통일부가 펴낸 ‘2013 북한 주요기관·단체 인명록’에 따르면 조평통은 위원장과 부위원장, 상무위원, 위원, 책임참사 등으로 구성된 지도부 밑에 서기국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강지영 서기국장이 회담 수석대표의 카운터 파트로 류길재 장관이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지난 시기 북남상급회담(장관급회담) 단장으로 내각 참사 명의를 가진 조평통 서기국 1부국장을 내보내고, 서기국 부국장이 남조선 통일부 차관과 늘 상대해 왔다”며 “이번에는 남측 당국의 체면을 세워주느라고 1부국장이 아닌 국장을 단장으로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과거 남북장관급회담 북측 단장이었던 김령성, 권호웅 등은 모두 조평통 서기국 1부국장이었으며, 2007년 남북총리회담 예비접촉에서는 전종수 서기국 부국장이 통일부 차관을 상대했다. 북한은 과거 장관급회담에서 조평통 소속인 김령성, 권호웅 등에 내각참사라는 직함을 줘서 수석대표로 내보낸 것이다. 이와 관련,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조평통 서기국장은 통전부의 부부장급으로 우리의 통일부 장관과 차관 사이 정도로 추측된다”며 “북한의 대남 핵심 실세들은 우리 정부 인사들과는 달리 자주 바뀌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강지영 서기국장은 1988년 김책공대를 졸업한 이후 남북학생회담 북측 준비 부위원장을 시작으로 대남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2004년 12월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 북측 준비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그는 또 2005년 8월 8·15 민족대축전 북측위원회 종교분과 위원, 2010년 11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의장 등을 거쳤다. 그는 2011년 10월 안경호 조평통 서기국 국장의 후임으로 발탁됐다.

남북당국회담 실무접촉에서는 여성인 김성혜 조평통 서기국 부장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김성혜 부장은 북한에서 보기 드문 ‘대남 여성일꾼’이다. 김 부장은 2002년 박근혜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밀착 수행했다. 김 부장은 2002년 5월 ‘유럽-코리아재단’ 이사 자격으로 방북한 박 대통령을 3박 4일 방북 기간 내내 함께 다녔다. 그는 2005년에는 서울과 평양에서 열린 제15∼16차 남북장관급회담에 수행원으로 참가했으며, 2006년에는 6·15 남북 당국 공동행사의 보장성원(안내요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남측 특별수행원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외에 전종수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과 황충성·김명철도 남북대화에 자주 모습을 보이고 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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