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양국 신뢰 부족 60년간 냉탕과 온탕 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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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주한 미국대사 하비브는 ‘한·미관계는 평온한 적이 없었다’로 시작되는 전문을 보냈다. 그는 ‘강한 의견 불일치나 양자 사이에서 상호간의 의심’이 과거 한·미관계에서 주요한 면모였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리고 한·미관계에서 문제가 되었던 세 가지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

그 하나는 60년 전에 있었던 정전협정을 둘러싼 한·미간의 갈등이었다. 1953년 봄과 여름 정전협정을 체결하고자 하는 미국 정부와 정전협정에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이승만 정부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과 미군을 한반도로부터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으로 응수하자, 한·미간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미국 정부가 국무성 차관보를 특사로 보내면서 갈등은 무마되었지만, 1953년에 시작된 한·미간의 불신은 1960년 4·19혁명까지 계속되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마바 미합중국 대통령이 5월 7일 미국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마바 미합중국 대통령이 5월 7일 미국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하비브가 두 번째로 언급한 것은 1963년 민정이양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케네디 정부는 이른 시간 내에 민정이양을 하는 대가로 5·16 쿠데타와 군사정부를 묵인했다. 그러나 1963년 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민정이양을 번복했고, 군정을 연장하겠다고 선언했다. 케네디 정부는 한국에 대한 원조를 끊을 수도 있다고 했고, 같은 해 말 결국 군사정부는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사례는 1968년 안보위기였다. 1968년 1월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 동해안에서 미국의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직후 박정희 정부는 북한에 대한 보복을 계획했다. 베트남 전쟁에 올인하고 있었던 미국은 한반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존슨 대통령은 사이러스 밴스를 특사로 파견하여 한반도에서 더 이상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진화했다.

혈맹이라지만 상호간에 의심
물론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이후 60년 동안 한·미관계가 계속 안 좋았던 것은 아니다. 1964년부터 1966년 미국이 요구했던 한·일협정과 한국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졌을 때 한·미관계는 ‘허니문’ 시대를 구가했다. 1980년대 신군부는 미국의 경제적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당시 한국 정부로서는 1970년대 후반 시작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197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정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시장개방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한·미관계가 좋았던 1966년 주한 미국대사 브라운은 한국과 미국이 “비정상적으로 가까우면서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지난 60년간 한·미관계는 다양한 모습을 갖고 진행되었다. 때로 한·미관계는 동맹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그리고 때로 한·미관계는 동맹으로서 세계적인 사건에 보조를 같이했다. 그러나 브라운 대사가 언급한 것처럼 그 관계가 다른 국가와의 관계처럼 정상적이지는 않았다. 냉·온탕을 오갔다. 물론 이러한 한·미관계의 오르내림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국익에 따라서 국가간의 관계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미관계는 그렇게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또한 1960년대까지 한국 정부는 미국의 원조 없이 스스로 생존할 수 없었다. 한국 정부 재정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고, 미국의 차관 없이 경제 재건을 위한 계획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던 것일까? 무엇보다도 한·미관계에 관한 자료에서 나타나는 것은 양국 정부 사이에 신뢰가 없었다는 것이다. 서로가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하고, 상대방을 배려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하비브의 전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상호간의 의심’이다. 미국은 한국 정부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전선에서 많은 미군들이 희생되었다. 

한국은 미국 정부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고,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마저도 호응하지 않았던 베트남 전선에서. 이렇게 피로 맺어진 관계이면서도 두 나라 사이에는 60년이 지나도록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지금 한·미동맹은 환갑을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60년 동안 계속돼온 동맹관계는 지금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이제 2년만 있으면 1954년 한·미 합의의사록 이후 계속되어온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미군사령관으로부터 한국 정부로 환수된다. 작전통제권의 환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는 곧 주한미군을 더 감축하거나 철수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한국 정부에 이양하는 문제는 이미 1970년대 초반에 미국 정부 내에서 논의되었다. 왜냐하면 닉슨 행정부에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전면 철수가 아니라 1개 사단만의 감축이라는 부분 철수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작전통제권 이양 문제가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작전통제권 이양 문제는 주한미군이 언제든지 철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군 작전통제권 환수, 새 전환점 맞아
주한미군 문제는 한·미관계에서 항상 뜨거운 감자였다. 외국 군대의 존재는 한국의 국가 브랜드에 약점이었다. 또한 끊이지 않는 주한미군 범죄 문제 역시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논란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존재가 지난 60년간 불완전한 정전체제 하에서 한반도에서 전쟁 억지력으로 작동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최근 중국이 부상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주한미군이 세력 균형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악화된 재정상황과 세계 정세의 변화로 인해 주한미군은 언제든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어쩌면 주한미군 없는 한·미동맹의 시대가 올 수도 있다. 미국에 군사기지를 대여할 수 있다는 점을 핵심 내용의 하나로 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도 개정해야 할 수도 있다. 마치 1960년대 말 한국 정부가 NPT 가입에 주저할 때 미국이 핵우산을 통한 안보를 약속했던 상황이 다시 한 번 도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한·미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신뢰’ 관계이다. 마음이 통해야 한다.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한·미동맹은 계속해서 불안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신뢰가 구축된다면, 굳이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지 않아도 지금보다도 더 끈끈한 동맹관계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1966년의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의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한국과 미국은 ‘어떻게 두 주권 국가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보다 가까우면서도 정상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바로 지금이 ‘정상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일지도 모른다. 미국 사회 내에서 보이지 않았던 한국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한국 사회 내에서 미국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로 인식되기 시작한 지금이 신뢰에 바탕한 동맹관계를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60년이 지난 한·미관계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혜안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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