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21살 주간경향’ 어떻게 탄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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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멤버들이 들려주는 취재 뒤 얘기… 도올 기고문·이명박 자서전 등 큰 반향

21년. 적지 않은 세월이다. 수많은 특종과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지만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모든 취재가 기사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궁금했다. 기사에 담지 못한 못다한 이야기가. 한 발 더 나간다면 <주간경향> 창간멤버들은 잡지를 만들면서 어떤 생각과 포부를 가졌을까, 듣고 싶었다.

<주간경향>의 전신인 <뉴스메이커>의 탄생은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쳤다. 창간 당시 기자였던 도경재 글그림미디어 대표의 증언에 따르면 창간 추진 당시 제호는 <뉴스메이커>가 아니라 <뉴스피플>이었다. 미국에서 나오던 잡지 <피플>을 벤치마킹한 것. 그런데 제호를 급변경해야 하는 사건이 터졌다.

<뉴스메이커> 창간 당시 기자로 활동했던 이정규 소설가(왼쪽부터), 도경재 글그림미디어 대표,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 | 도서출판 밝은세상 제공·정용인 기자

<뉴스메이커> 창간 당시 기자로 활동했던 이정규 소설가(왼쪽부터), 도경재 글그림미디어 대표,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 | 도서출판 밝은세상 제공·정용인 기자

다음은 도경재 대표의 회상. “창간 준비팀이라고 뽑아놓았는데 막상 잡지를 안 만들고 1년이 지나니 소문은 소문대로 나버리고…. 창간을 하려고 하는데 그해 말, 그러니까 1991년 12월에 서울신문사에서 <피플>이라는 잡지를 떡하니 내놓은 거예요. 기존에 옐로페이퍼 <선데이서울>을 만들던 팀이 새로 잡지를 만들면서 바로 <피플>이라는 이름으로 전환해버린 겁니다.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죠.” 그래서 공모 끝에 나온 이름이 <뉴스메이커>였다. “결과적으로 잘 되었습니다. 당시까지 뉴스메이커라는 이름으로 이슈가 되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는 경우는 없었거든요. 우리가 처음으로 쓴 말이었는데, ‘이슈를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뜻으로 굳어졌지요.”

원래 추진 제호는 ‘뉴스피플’
처음 나오던 뉴스메이커는 격주간이었다. 잡지 제작 환경도 지금과 달랐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검색하면 다 자료가 뜨지만 그때는 조사부 자료실 가서 스크랩된 자료를 찾아서 필요한 것 찾아 읽고, 읽으면서 취재현장에 달려가고 했던 것이 기억에 남네요.”

조금 꼼꼼한 기자는 신문을 읽으면서 관심있는 주제 기사를 일일이 스크랩했다. 이와는 별도로 자신의 전문분야를 키우기 위해서 집에서는 다시 관련 분야 전문지를 구독해 읽는 식이었다. 처음 6개월 동안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정치 쪽 기자들이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국회 쪽에서 ‘뉴스메이커, 그 잡지 좋던데’라는 평판이 나오면서부터 조금씩 상황이 풀렸던 것이 기억납니다.” 도 대표는 “짧았지만 그래도 그때가 굉장히 재미있게 일하던 때”라고 기억한다. “한창 일할 나이였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월간지에서 시작해서 일간지에서 훈련도 하고 주간지로 오니까 주간지가 체질에 맞는 거예요. 잘 받아주지 않는 출입처를 어떻게 뚫고 들어갈지 요령도 익혔고….”

뉴스메이커 초창기 멤버 중 현재 경향신문사에 근무하는 사람은 세 사람이다. 김석종 문화부 선임기자와 신동호 논설위원, 그리고 박구재 전략기획실장이다. 김석종 선임기자는 “도올 김용옥씨의 원고를 받던 일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때가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이라서, 도올 선생 비서가 원고를 들고 오거든요. 오후 2시에 마감해야 하는데, 저녁이 돼도 원고가 안 오는 겁니다. 그래서 독촉전화를 하면 오히려 화를 내요. ‘아니, 내가 잉크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피를 찍어서 쓰는 심정으로 원고를 쓰고 있는데 마감 좀 늦추면 안 되나’라고요.”

실제 도올의 기고문은 파란을 일으켰다. ‘노태우씨에게 고함’이라는 당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격문 성격의 글도 있었다. 인쇄매체에서 대통령 ‘각하’에게 ‘씨’를 붙여 부르는 것은 당시 분위기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한약 분쟁 관련 기고도 그래요. 취재를 해서 약사 쪽이 잘못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은 파격이었습니다. 당시 보도들을 보면 양비론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통상적이었거든요. 한의사들은 자기편이라고 해서 사보고, 약사들은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또 사보고… 결국 재판을 찍었습니다.” 신동호 논설위원은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김용옥 교수가 직접 언론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냥 앉아서 글을 쓰는 거하고 다르거든. 자기가 직접 경험해 보니까.”

창간 연재 중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자서전 기획이다. 이 기획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 기획을 ‘물어온’ 인사는 당시 경제담당 기자였던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 1988년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회장과 첫 인사를 한 정 대표는 MB가 현대건설을 그만두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어느날 비서한테 전화가 왔어요. 한 번 오라고. 가보니 책상이 싹 비워져 있는 거예요.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죠. 나중에 들으니 정주영 회장이 정치에 진출하는데 국민당이라는 정당을 만들려고 한다, 거기에 함께 하자고 했는데 이 회장이 거부하니 나가라는 뜻으로 회사 인감들을 다 가져갔다는 겁니다.”

이명박 자서전 연재 비화
<뉴스메이커> 창간호에 실린 이야기는 이 ‘정주영 회장과 결별’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자서전은 제가 제안했습니다. ‘창간이니 자필 원고 연재합시다’라고요. 당연히 ‘아직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라고 하죠. 그래서 작전(?)을 짰습니다. 제가 1인칭으로 원고를 써서 들고 갔습니다. 아주 잘 아는 이야기이니까요. ‘어차피 내야 하니 여기서 틀린 부분이 있으면 고쳐주십시오’라고 했더니 이 양반이 원고를 넘겨보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괜찮은 거예요. 이 양반 말이 ‘야 재밌다. 신통하게 잘 썼네’라며 주위에 ‘이대로 나가도 되지?’라고 말한 뒤 저보곤 ‘기자가 알아서 해’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나가게 되었고 꽤 화제를 모았죠.” 궁금한 점. 그때 잡지에 실린 내용이 나중에 <신화는 없다>는 제목의 자서전에 거의 그대로 실렸는데? “제가 취재해서 쓴 것을 감수하는 형식이었는데 이게 워낙 화제를 모으니 이명박 회장 주변 친구들이 이야기했을 거 아니에요. 별 옛날이야기가 나오는데 비밀스런 게 나오면 곤란하고… 그래서 10회 만에 중단하고 그걸 바탕으로 ‘책을 써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거죠.”

이정규 작가는 창간 당시 최고참 기자였다. 재직 당시 박순천 여사의 친일경력과 관련한 특종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래도 해방 이후 정계를 주름잡은 대표적 인사였으니 사람들이 다 안 믿었거든요. 자신의 제자를 일본 정신대에 보냈다는 풍문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당사자를 찾아낸 거예요. 일장기 아래 같이 찍은 사진까지 딱 맞아떨어지고….”

그는 뉴스메이커를 그만둔 뒤 전업작가가 되었다. 첫 작품은 IMF 외환위기 시절에 낸 <초록빛 모자의 천사>라는 제목의 소설. 당시에는 국내 소설 1위를 기록하기도 한 베스트셀러였다. “그 소설로 팬 카페까지 생겼습니다. 그 뒤에는 본격 문학을 했죠. <돼지들>은 북파공작원을 다룬 것인데, 그분들 증언을 바탕으로 ‘국가는 우리를 버렸다’고 기사를 썼던 것이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낸 책은 최초의 여류명창을 다룬 <진채선>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기자와 작가는 깨어 있는 정신으로 기록한다는 것이 일맥상통하는 직업인 것 같습니다. 차이점은 창조성인 것 같아요. 작가는 인물이든 뭐든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있는 반면, 기사는 팩트가 중요하니 창조를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창간 멤버로 참여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아쉬워하는 것은 <뉴스메이커>라는 제호였다. 정선섭 대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돌이켜놓고 보면 시의적절했던 매체였던 것 같아요. 창간 당시 군부독재 정권이 끝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오피니언 리더가 우후죽순으로 나오던 때거든요. 물론 취재력의 한계나 그 후 경향신문의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곤란도 겪었지만, (인물자료를) 잘 발전시켰으면 대한민국의 오피니언 리더를 망라해 움직이는 엄청난 데이터베이스가 되었을 겁니다. 제가 다시 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사실 없진 않은데요, 하하.”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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