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을’도 심하게 밟히면 꿈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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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관씨(45)의 집은 제주시다. 그러나 억양은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이다. 그는 본래 부산에서 마트를 했다. 제주시로 옮긴 것은 2006년이다. 그해 11월 제주시에 있는 남양유업 시판 대리점(마트를 상대로 물품을 공급하는 대리점)을 1억원 들여 인수했다. 부산에 살 때 우유 대리점을 하는 사람들의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 부러웠다. 같은 우유 대리점이라도 부산보다는 제주의 조건이 더 좋은 듯했다. 제주도에서 우유 대리점을 하면 세 식구가 좀 더 행복해질 것 같았다. 모든 게 착각이었다.

“처음 1년 정도는 괜찮았다. 이듬해부터 물건 푸시(밀어내기)가 시작됐다. 2006년 11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지점장을 세 명 겪었다. 처음 두 사람도 푸시가 심했지만, 세 번째 지점장은 그 이전 두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되게 엄청났다.”

지점에서는 주문하지도 않은 물량을 대리점으로 밀어냈다. 대리점에서 소화할 수 있는 물량은 한계가 있다. 남양유업은 반품처리도 받지 않았다. 저장고에 쌓인 물건을 볼 때마다 한숨만 나왔다. 한 번은 밀려오는 물량에 분통이 터진 아내가 지점 영업사원에게 “이 자식아”라고 소리쳤다. 다음날 지점에서 전씨를 호출했다. 지점에서는 아내가 담당 직원에게 욕을 했다며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이 사건 이후 보복이 시작됐다고 전씨는 말했다. 지점에서 밀어내는 물량이 더 늘었다. 대형마트에서 평균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떠먹는 요구르트 시음행사에도 참여할 수 없게 됐다. 쌓이는 물량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 길이 막힌 것이다.

남양유업 대리점협의회 대리점주들이 9일 오후 서울 남대문로 남양유업 본사 앞에서 이날 오전 남양유업 경영진의 대국민 사과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남양유업은 이날 재발 방지와 상생방안 등이 담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피해를 본 대리점주들은 만나지 않았다. | 정지윤 기자

남양유업 대리점협의회 대리점주들이 9일 오후 서울 남대문로 남양유업 본사 앞에서 이날 오전 남양유업 경영진의 대국민 사과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남양유업은 이날 재발 방지와 상생방안 등이 담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피해를 본 대리점주들은 만나지 않았다. | 정지윤 기자

지점장은 제왕적 지위를 누렸다. 새 지점장이 오면서 1년에 한 번 있던 지점 회의가 잦아졌다. 전씨는 “지점장이 술을 마시고 싶은 달이 지점 회의가 열리는 달”이라고 말했다. 계산은 점주들이 했다. 비위를 건드리면 보복성 밀어내기가 들어왔다. “대리점주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누가 사정상 일찍 자리를 뜨겠다고 하면 지점 사람들이 ‘잘 들어가시라. 대신 내일 사장님한테 요플레 100박스 보내드리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점주들이 술자리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두세명 빠졌다. 그런데 그러고나면 이틀 뒤에 그 물량이 실제로 들어왔다.”

‘제주 남양 공화국’의 제왕적 지점장
지난해 10월 16일, 전씨는 지점으로부터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구체적인 이유는 듣지 못했다. 지점은 후임자를 알아보라고 했다. 몇 차례 후임자를 찾아 데려갔지만 지점은 그때마다 후임자의 나이나 담보력을 문제 삼아 거절했다. 후임자는 결국 지점에서 정한 사람으로 결정됐다. 대리점을 인수한 사람을 전씨는 인수인계하는 날 처음 만났다. 지점은 차량과 저장고를 넘기지 않으면 권리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권리금 문제로 지점과 다투는 데 2개월 반이 지나갔다.

갑의 횡포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다. 전씨는 “제주 남양 공화국”이라는 표현을 썼다. “진짜 공화국이다. 남양유업 시판 대리점이 10곳, 가정 대리점이 6곳 있는데, 어느 한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서로 협력해야 하는데 서로 눈치만 봤다.”

한 가지 사례가 있다. 지난해 4월 남양유업 제주 가정 대리점(일반 가정에 우유를 공급하는 대리점) 중 한 곳이 문을 닫았다. 6년간 대리점을 운영해온 해당 대리점주는 지점의 각종 부당행위(밀어내기, 판촉물 비용 70% 부담, 명절 떡값)에 문제 제기를 하다 지점으로부터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네 차례나 받고 결국 손을 들었다. 제주경실련과 지역 언론들이 이 사건을 보도했지만 바로잡히지 않았다. “당시 지점에서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다. 나는 ‘그동안 당한 게 있는데 어떻게 도와주겠냐’고 했다. 몇몇 대리점주들은 경실련에 가서 밀어내기와 떡값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러고나서 유야무야됐다.”

전씨는 지점의 협조 요청은 거절했지만 피해를 본 점주를 돕지도 못했다. “그때 점주들이 손을 잡고 남양유업의 횡포에 공동으로 대응을 했더라면 오늘날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것 같다. 왜 못 그랬을까. 누구 한 사람만 나서도 나머지 사람들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점주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 부당함을 호소하려고 했는데 결국 쫓겨나는 걸 보고 비로소 내가 노예살이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남양유업 대리점협의회에 소속된 다른 대리점주들의 사례를 들어보면, 남양유업의 강압적이고 비인간적인 영업방식이 좀 더 명확하게 잡힌다. 유경현씨는 임대아파트 보증금과 은행대출 등으로 9000만원을 마련해 2009년 12월 1일부터 화정대리점을 시작했다. 새벽 3시부터 오후 5시까지 거의 휴일 없이 일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20년 가까이 전국을 떠돌다 보니 한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3년 동안 대리점 운영 2억2000만원 손해
밀어내기는 기본이다. 밀어내기 품목도 갈수록 늘었다. 월 평균 500만원의 손실이 생겼다. 연간 1억8000만원이다. 남양유업이 해당 영업구역 내 이마트와 롯데마트에 파견한 여성 직원(점주들은 이들을 ‘여사님’이라고 부른다) 급여의 일부도 그가 부담했다. 남양유업이 1명당 40만~50만원을 부담하고 유씨가 1명당 70만~80만원씩 월평균 150만원을 냈다. 이 명목으로 3년간 5400만원이 나갔다. 유씨의 계산에 따르면 3년 동안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2억2000만원의 손해가 발생했다. 같은 기간 명절 떡값으로 20만원씩 총 140만원을 썼다. 대리점 개설비 200만원은 지점 영업사원에게 입금했다. 은행대출, 마이너스통장, 제2금융권 대출, 지인들 빚 등으로 메웠지만 달마다 돌아오는 마감액을 맞추기는 어려웠다. 지난해에는 가족을 두고 가출을 감행했다. 남양유업 본사에서 투신자살을 할 결심을 하고 본사 사옥을 답사하기도 했다.

대리점주를 상대로 한 영업직원의 폭언이 담긴 음성파일이 공개되면서 ‘갑의 횡포’ 논란에 휩싸인 남양유업의 김웅 대표(오른쪽에서 네 번째)와 임원들이 9일 서울 중구 브라운스톤 LW컨벤션에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대리점주를 상대로 한 영업직원의 폭언이 담긴 음성파일이 공개되면서 ‘갑의 횡포’ 논란에 휩싸인 남양유업의 김웅 대표(오른쪽에서 네 번째)와 임원들이 9일 서울 중구 브라운스톤 LW컨벤션에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경남 진주에서 대리점을 운영해온 전양우씨는 월 평균 900만~1000만원의 손실을 봤다고 말했다. 떡값으로는 6년간 총 180만원을 현금 또는 통장으로 입금했다. 그가 ‘현금갈취’라고 부르는 일도 있었다. “마감금액 오류가 났다면서 매월 지점 통장이 아닌 영업사원 통장으로 돈을 요구해왔다”는 것이다. 전씨는 2009년 6월부터 2012년 5월까지 25회에 걸쳐 최소 30만원에서 최대 120만원까지 이런 방식으로 돈을 입금했다고 말했다. 항의도 해보고 협박도 했다. 소용 없었다. 지점에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장님, 해보고 싶으면 해보세요. 사장님이 얼마나 버티는지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아마 거지가 되어 남양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대기업 상대 중소 유통상인 모두 피해”
대리점주들은 불법적 밀어내기의 증거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올해 3월 10일 대리점 운영을 그만둔 최근훈씨는 “대리점의 전산 데이터를 조작, 변경하여 불법적으로 밀어내기를 하는 것도 모자라 2006년 이후에는 전산 발주 시스템을 수정해 대리점에서는 주문한 내용을 볼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남양유업이 대리점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주문량을 조작했다는 증거를 남길 방법이 사라진 것이다.

지난해 6월까지 농심특약점을 운영했던 김진택씨(50)는 “남양유업은 상상 이상으로 심한 경우이지만 대기업을 상대하는 중소 유통상인들은 모두 비슷한 피해를 겪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2년 1월 7일에 농심특약점 전국협의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2011년 11월 농심에서 라면값을 인상했는데, 본사에서 특약점 공급가를 라면값 인상폭 이상으로 올려잡아 특약점들이 피해를 보게 된 것이 계기였다.

김씨는 2010년 9월 3억원을 들여 특약점을 시작했다. 새벽에 농심 물류센터에서 물건을 받아 동네마트에 공급하는 게 특약점이 하는 일이다. 남양유업의 경우에는 같은 일을 하는 사업자를 ‘대리점’이라고 부르지만, 개인사업자가 본사와 계약을 맺고 판매대행을 한다는 점에서 대리점과 특약점은 본질적으로 성격이 같다.

김씨는 농심도 매출을 강제로 부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남양유업에 비해 강도는 약하지만 일종의 ‘밀어내기’라는 것이다. “매달 5~10일 사이에 본사에서 매출 목표를 정해 엔포스라는 이름의 농심 내부 전산망에 올려놓는다. 특약점과의 협의는 없다. 늘리든 줄이든 본사 마음이다.” 2012년 7월 이전에는 이 매출 목표의 80%에 미달하면 본사가 특약점에 지급하는 판매장려금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7년 이후에도 목표의 80%에 미달할 경우 분기 장려금과 반기 장려금은 주지 않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특약점은 농심에서 물건을 받아오는 가격보다 싼 가격에 물품을 공급하기 때문에 판매장려금을 받지 못하면 수익이 마이너스가 된다고 김씨는 설명했다. 문제는 판매장려금을 받기 위해 매출 목표를 채우는 과정에서 결국은 더 큰 손해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매출 목표를 달성하려면 다른 제품을 더 싸게 파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갖고 있는 ‘판매장려금 지급약정서’를 보면 “‘갑’은 ‘을’의 판매 및 대금결제의 실적 또는 ‘갑’의 영업정책적 목적에 따라 판매장려금”을 지급할 수 있는데, “본 약정의 해석상 의문이 있을 때는 ‘갑’의 해석에 따른다”고 돼 있다.

김씨는 “손해가 한꺼번에 나는 게 아니라 할수록 조금씩 손해가 쌓인다. 나중에는 버티다 버티다 안 돼 손을 들고 나가게 된다. 3억원을 투자했는데 지금은 빚이 1억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농심의 불공정거래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터넷에 올리고 언론 등에 제보한 이후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이유로 2012년 6월에 특약점 계약을 해지당했다.

농심 관계자는 전화통화에서 “이 건은 지난해 7월 김씨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를 해 공정위에서 조사하고 있는 사안이다. 김씨가 특약점 전국협의회 대표라고 하는데 지금은 우리 대리점주가 아니기 때문에 대표 자격이 없다. 농심이 매출 목표를 강제하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했다는 것은 김씨의 일방적인 주장이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그동안은 농심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행태들이 농심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남양유업 사례가 까발려지는 걸 보고 농심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대기업과 계약을 맺고 있는 전국의 중소 유통상인이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풀어야 한다”며 “‘갑’과 ‘을’이 동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정부에서 표준 검인계약서를 사용하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갑의 횡포’ 막으려면 ‘을’도 연대해야
‘을’이 ‘갑’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은 마땅치 않다. 섣부른 저항은 더 큰 보복을 낳는다. 1993년부터 2012년 12월까지 남양유업 대리점을 운영했던 김원영씨의 말이다. “반발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물건을 너무 많이 밀어서 돈을 벌기는커녕 빚내서 장사하고 있다. 너무 하지 않나’라고 얘기하면 ‘오늘 줄여주겠다’고 하고는 더 들이민다. 그러니 아예 얘기를 못한다. 권리금을 포기한다면 몰라도 그럴 수는 없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몇 년 전에는 집단으로 소송을 해보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회사로부터 회유와 협박이 들어와서 10여명이 모였다가 와해됐다.”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을’은 힘이 약하다. 노혜경씨는 2011년 2월 CJ대한통운 여수지사와 화물차량 2대에 대한 화물운송 ‘위·수탁’ 계약을 맺었다. 화물차량은 CJ대한통운 소속으로, 노씨는 운전기사 2명을 고용해 화물차를 운행했다. 

남양유업 제품 불매운동이 3대 편의점 전반으로 확산된 8일 오후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편의점 출입문에 ‘저희 점포에서는 남양유업 제품을 취급하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팻말이 붙어 있다. | 연합뉴스

남양유업 제품 불매운동이 3대 편의점 전반으로 확산된 8일 오후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편의점 출입문에 ‘저희 점포에서는 남양유업 제품을 취급하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팻말이 붙어 있다. | 연합뉴스

노씨는 차량 보증금 공제가 마무리된 2011년 10월 CJ대한통운 측에 운임 지급을 요청했으나 회사는 아직까지 운임 1억원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 CJ대한통운은 노씨 소유가 아닌 차량에 대한 할부금과 제3자에 대한 2건의 연대보증 책임을 요구하며 노씨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그는 “회사는 변호사를 사서 소송을 하고 있고, 나는 변호사 비용이 없어 혼자 소송을 하고 있다. 법률용어도 제대로 모른다. 오늘도 법원에서 뭘 준비하라는 말을 들었는데 무슨 뜻인지 몰라 답답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을’이 ‘갑’에게 저항하려면 연대해야 한다.” 제주에서 남양유업 대리점을 했던 전성관씨의 말이다.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변호사는 어떻게 구하는지, 과정은 또 어떻게 되는지 배운 게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당하면서 묻히는 건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피해를 본 대리점주들의 대리점협의회가 있다는 사실을 서울의 지인한테 듣고 연락처를 수소문해 연락을 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남양유업은 지난 9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김웅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해 재발 방지, 밀어내기 관행이 있었다는 사실 인정, 현재 진행 중인 검찰 수사 및 공정위 조사에 대한 적극 협조, 대리점협의회에 대한 고소 취하, 상생방안 마련을 약속했다. 그러나 남양유업 경영진은 정작 본사 앞에서 시위 중인 대리점협의회 소속 대리점주들과는 만나지 않았다. 대리점주들이 남양유업의 대국민 사과를 “쇼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이유다.

편의점 CU·GS25·세븐일레븐 점주 단체 연합인 전국편의점가맹점사업자단체협의회는 지난 8일부터 남양유업 제품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공정거래법 23조를 보완해 ‘갑의 횡포’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민변은 피해 대리점들을 모아 집단소송을 추진할 계획이다. 검찰은 남양유업의 불공정거래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고 회사 경영진을 곧 소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을’의 반격에 ‘갑’이 궁지에 몰렸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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