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가루’ 우편물의 공포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4월 23일 점심 무렵 ‘오전 10시 12분 국방장관 앞으로 백색 가루 소포 배달’이라는 속보가 떴다. 잠시 모골이 송연했다가 기분이 진정된 뒤에는 걱정이 앞섰다. 북한 핵실험 이후 남북한 긴장국면과 미국 보스턴 압력솥 폭탄테러에 이은 우편테러 공포가 고조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얼마 안 가서 백색 가루는 시중에 유통되는 식용 밀가루로 판명됐다는 보도가 나와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 앞으로 발송된 비방 글과 밀가루를 넣은 우편물. | 국방부 제공

김관진 국방부 장관 앞으로 발송된 비방 글과 밀가루를 넣은 우편물. | 국방부 제공

미국을 비롯한 세계 전역이 우편테러 공포로 몸살을 앓고 있다. 보스턴 테러사건 하루 뒤인 4월 16일과 17일 미국 로저 워커 연방 상원의원(공화당·미시시피주)과 오바마 대통령 앞으로 수상한 우편물이 각각 배달됐다. 이들 우편물은 사전에 정부 우편통제시설에서 차단돼 세부 검사가 이루어진 덕에 수신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독성물질인 리친(Ricin)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돼 충격을 주었다. 지난 4월 18일에는 워싱턴 외곽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해군 지원시설, 그로부터 5일 후인 4월 23일에는 워싱턴 외곽 볼링 공군기지에서도 의심스러운 우편물이 발견돼 9·11테러 후 탄저균 우편테러를 겪은 미국인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확인 결과 이들 우편물의 수상한 물질은 독성물질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지만 ‘리친 우편테러’에 대한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다.

리친은 아주까리로도 불리는 피마자 씨에서 추출되는 물질로서 핀 끝에 살짝 묻힌 정도의 극소량(0.001g 정도)으로도 성인을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지상 최강의 독으로 불리는 보툴리누스균에 필적하는 독성을 갖고 있으며, 해독제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친 액체나 결정체, 가루를 사람이 복용하거나 흡입하면 처음엔 멀쩡하다가 몇 시간 뒤 열과 구토, 기침 증세가 나타나고 폐와 간, 신장 면역체계가 무력화하면서 36~72시간 안에 죽게 된다고 한다. 1978년 9월 7일 영국 런던에서 발생한 ‘우산총 암살사건’에도 이 독이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불가리아 반체제 인사 게오르기 마르코프는 그날 저녁 무렵 행인의 우산에 오른쪽 허벅지를 찔린 뒤 다음날 새벽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는 이미 백혈구가 급속히 증가해 패혈증으로 발전해 있었다. 병원에서는 손 쓸 방법이 없었고, 그는 4일 만에 숨을 거뒀다.

우편테러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국방부 밀가루 우편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길 사안이 아니다. 국방부는 우편물을 하루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서울 용산우체국에서 가져와 근무지원단의 엑스선 검색 등을 거친 뒤 수신자와 수신부서에 전달한다. 최근에는 테러에 대비해 생화학테러검색반을 운영하고 있다. 문제의 우편물은 노란 봉투에 포장된 통상우편물로서 발신처 없이 ‘김관진 국방장관 앞’이라는 수신처만 적혀 있고, 동대문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다. 안에는 어른 주먹 크기만 한 백색 가루가 담긴 비닐봉지와 김 장관을 비방하는 유인물이 들어 있었다. 4월 19일 서울 삼각지 일대에 살포된 괴문서와 동일한 문구가 적힌 것이었다.

밀가루는 테러와 무관하고 우편금지물품도 아니다. 하지만 국방부는 이번 사건을 주요 인사에 대한 테러 시도 행위로 규정하고 발신자 추적에 나섰다. 수사에는 군과 경찰뿐 아니라 이런 방식의 테러가 확산될 가능성을 감안해 국정원까지 참여할 것이라고 한다. 아울러 우편물에 대한 검색과 청사 안팎의 경계 검문도 강화했다.

국방부가 ‘테러 시도 행위’라고 규정한 밀가루의 우편 발송이 어떤 죄에 해당할까. 형법 제136조(공무집행방해)는 직무를 집행하는 공무원에 대하여 폭행 또는 협박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다. 누가 어떤 의도로 그런 일을 했는지, 어떤 죄목이 적용될지 궁금하다.

<신동호 경향신문 논설위원 hudy@kyunghyang.com>

우정이야기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