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낙하산’ 타려고 학자소신 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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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택 산은지주회장 과거 발언 박근혜 정부 국정철학과 달라 논란

“금산분리 완화는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해 (과거의) 의견을 접었다.” 4월 7일 홍기택 당시 산은금융지주 회장 내정자(61)가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한 말이다. 홍 내정자는 왜 굳이 일요일에 기자간담회를 열어야 했던 걸까.

4월 7일 홍기택 산은금융지주 회장 내정자가 기자회견을 열어 언론보도 등에 대해 입장표명을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4월 7일 홍기택 산은금융지주 회장 내정자가 기자회견을 열어 언론보도 등에 대해 입장표명을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금융위원회는 4월 4일 산은금융지주 회장으로 홍기택 중앙대 교수를 임명 제청했다. 금융위는 “홍 내정자는 국제금융·거시경제 분야의 학계 전문가이며 금융회사 사외이사 및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등 다양한 경력과 능력을 보유했다”며 “정책금융체계 개편과 창조금융을 통한 실물경제의 활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금산분리 반대하고 산은 민영화 찬성
하지만 홍 내정자가 임명 제청된 지 하루 만에 자질 시비가 벌어졌다. 금융위는 홍 내정자가 박근혜 정부의 국정철학을 공유하고 있는 적임자라고 설명했지만, 홍 내정자는 대표적인 금산분리 반대론자이자 산업은행 민영화 찬성론자였다. 박근혜 정부는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보유한도(현행 9%) 축소를 위해 은행법 개정을 추진하는 등 금산분리를 강화하려는 계획을 내놓았고, 이명박 정부 당시 추진된 산업은행 민영화에 제동을 걸고 있다.

홍 내정자는 2008년 한반도선진화재단이 펴낸 <왜 금융선진화인가>라는 제목의 공동저서에서 금산분리를 “금융산업 발전의 족쇄”라고 비판했다. 그는 “금산분리는 내국인보다 외국인을 우대하는 불공평한 제도”라면서 “계속 금산분리 원칙을 고집하면 우리 금융산업의 조속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우리 산업자본(재벌)이 적당한 투자 기회를 찾지 못해 수십조원에 이르는 잉여자금을 쌓아놓은 가운데 금산분리로 인해 상당수 우리나라 은행이 외국인 소유로 넘어갔다”고 지적했다.

홍 내정자는 산업은행 민영화에 찬성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2008년 한국경제신문에 기고한 ‘산은 IB(투자은행) 육성 성공하려면’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산업은행의 민영화는 공기업의 구조조정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낙후된 우리 금융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밝혔다. 과거 저서와 기고 등만 보면 홍 회장은 금산분리, 산업은행 민영화 등과 관련해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다른 견해를 가진 셈이다.

자질 시비뿐 아니라 낙하산 논란도 불거졌다. 홍 내정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서강대 동문이며 현 정부의 싱크탱크로 여겨지고 있는 국가미래연구원에도 참여했다. 산업은행 노동조합은 홍 내정자가 임명 제청된 뒤 발표한 성명에서 “이명박 정권 때도 측근들을 금융기관에 낙하산으로 내려보내 이른바 4대 천왕을 만들어낸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는데 대한민국의 대표은행인 산업은행에 또다시 측근을 내려보낸 인사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할 뿐”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임명장 수여식에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 당선인과 홍기택 경제 1분과 위원. | 연합뉴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임명장 수여식에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 당선인과 홍기택 경제 1분과 위원. | 연합뉴스

인수위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기행도 또다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취재 중이던 기자들에게 느닷없이 귤을 나눠주다 인수위원이라는 게 알려지자 “홍기택이 누구냐”고 반문했고, 취재진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화창한 날씨에도 우산을 펴 얼굴을 가리고 출근했다. 또 기자들이 한 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팔을 잡자 “잡지 마라. 성감대다”라는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자신을 둘러싼 말과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자 홍 내정자는 불가피하게 기자간담회를 열고 ‘진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과거 금산분리에 대한 제 견해는 금산분리가 완전히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며 “산업자본이 은행지분 10% 이상을 보유하더라도 의결권이 4%에 불과해 보유의 실효성이 적고, (론스타와 같은) 사모펀드 등을 통해 투자 가능한 외국계 자본과 역차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고 밝혔다. 산업은행 민영화에 대한 입장도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8년 산은 민영화 추진 당시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으로, 돌이켜보면 거품이 끼어 있었다”며 “이후 세계 경제가 나빠지면서 민영화 여건이 악화하고 정책금융의 필요성이 확대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영화를 통해 산업은행을 대형 투자은행으로 육성하려던 구상이 장밋빛이었다는 것이다.

산업은행 노조 “측근 인사에 개탄”
홍 내정자는 낙하산 논란에 대해선 “낙하산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다른데, 전문성이 중요하다고 본다”며 “솔직히 산업은행처럼 큰 기관의 장을 해본 적은 없지만 여러 금융기관의 사외이사·운영위원으로 참여해 대학교수 중 금융 현장을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말했다.

홍 내정자의 적극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냉담했다. “산은금융 회장 자리에 앉으려고 학자로서의 소신을 버린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졌고, 산은금융 회장 임명절차도 다른 공기업과 같이 외부인사가 참여하는 추천위원회를 통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홍 내정자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4월 9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에서 취임식을 갖고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이번 산은금융 회장 인선은 “낙하산 인사를 하지 않겠다”던 박근혜 정부가 그 약속을 뒤집었다는 점 때문에 금융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은행권 관계자는 “산은금융 회장 인사는 박근혜 정부가 금융권에서의 낙하산 관행을 끊을 수 있을지 확인할 수 있는 ‘리트머스시험지’였는데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박근혜 정부가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정권의 전리품으로 여기는 관행을 끊을 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반복이 되니 안타깝다”며 “낙하산 관행이 끊기지 않으면 한국 금융산업의 발전은 요원하다”고 말했다.

<김지환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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