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인문학은 지금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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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해운대구는 3월 12일 ‘인문학도시 조성 조례’를 발표했다. 인문학 진흥을 위한 행정적·재정적 지원, 인문주간 운영, 자문위원회 설치 등이 골자다. 해운대구는 ‘부산의 강남’으로 불릴 정도로 번화한 지역이다. 해운대구청 세계시민사회과 인문사회자본팀 담당자는 “하드웨어는 발전했기 때문에 소프트웨어를 키우자는 차원이다. 시민의식을 높이는 데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구청 인문사회자본팀은 지난해 7월 만들어졌다.

경기도 군포시는 좀 더 빠르다. 2010년 지방선거 이후 군포시는 ‘책 읽는 군포’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2010년 말부터 ‘밥이 되는 인문학 강좌’를 매달 열고 있다. 가을에는 북 페스티벌도 열린다.

2011년 10월 교보문고 서울 광화문점을 찾은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 관련 도서 특별코너에서 책을 살펴보고 있다. 인문학과 기술의 융합을 강조한 잡스와 애플의 전 세계적 성공 이후 한국 기업에 인문학 바람이 불었다. | 김창길 기자

2011년 10월 교보문고 서울 광화문점을 찾은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 관련 도서 특별코너에서 책을 살펴보고 있다. 인문학과 기술의 융합을 강조한 잡스와 애플의 전 세계적 성공 이후 한국 기업에 인문학 바람이 불었다. | 김창길 기자

기업을 빼놓을 수 없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하반기 채용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한 통섭형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다양한 전형방법을 도입하겠다”며 사전에 인문학분야 베스트셀러 28권의 목록을 공지했다. 지난해 12월 이 은행 면접에서 지원자들은 책 내용에 대한 면접관들의 질문에 답해야 했다. 대구은행은 지난해 임원급을 상대로 진행하던 인문학 강좌를 직원과 직원 가족들로 확대했다.

지자체에서 건설업계까지 확산일로
인문학 바람은 건설업계에도 불었다. 건설경제신문에 따르면 지난해 건설업계에서는 각종 사내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직원들의 독서토론 모임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지역사회의 인문학 교실이나 백화점 문화센터의 인문학 강좌 등을 고려하면 인문학이 지방자치단체, 기업, 시민사회 등으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2010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인문학 열풍이라는 말이 회자된 적이 있지만, 당시에는 특정 저자의 책 몇 권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 서적’ 열풍에 가까웠다. 그에 비하면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지속되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가히 전방위적이다.

지난해 한국 사회에는 힐링을 앞세운 책, TV 프로그램, 각종 강연, 여행상품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힐링 열풍은 ‘지나친 경쟁 중심 사회에 대한 반성’이라는 평가와 동시에 ‘자기계발 문화의 변종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흔히 자기계발 문화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 여겨져온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힐링 열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1월 출간된 <싸우는 인문학>에서 서동욱 서강대 교수(철학)는 “인문학은 붐을 타고 풍성해지지만, 이미 인문학과는 거리가 먼 처세나 실용 또는 사교 모임의 둥지가 된 것 같다. 인문학은 기업가에게 유혹받고 잡스처럼 아예 엉뚱한 탈을 쓰고 나타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주목할 기류는 인문학과 경영의 접목이다. 2011년부터 조짐을 드러내기 시작한 인문학 열풍의 진원지로 거론되는 인물은 ‘애플 신화’의 주인공 스티브 잡스다. 잡스는 “애플의 창의적인 제품은 애플이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김상근 연세대 교수(신학)는 2011년 한 언론 기고에서 “그의 이 말 한 마디가 인문학의 잔잔한 바다에 거센 파고를 불러일으켰다”며 잡스 이후 “많은 인문학자들이 ‘인문학과 경영’에 관한 원고 청탁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자기계발 동력으로 연계한 책 잇따라 출간

인문학 열풍 이면에서 출판시장은 빈사상태에 빠져 있다. | 레이디경향

인문학 열풍 이면에서 출판시장은 빈사상태에 빠져 있다. | 레이디경향

서동진 계원예술대학교 교수(사회학)는 지난 1월 출간된 인문학자들의 공동저서 <싸우는 인문학>에서 “(잡스가) 말하는 인문학이란 이미 인간에 관한 학문으로 변신한 경영학과 기술에 관한 지식들을 가리킨다”며 “그가 말하는 인문학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정신을 집약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애플 제품을 생산하는 폭스콘이 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조건과 산업재해로 오명을 얻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굵직한 문화적 변동을 선도하거나 반영해온 서점가에는 이미 인문학과 경영을 접목해 인문학을 경영과 자기계발의 새로운 동력으로 파악하는 관점의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인문학, 주식시장을 이기다>(2012년), <인문학으로 스펙하라>(2012년), <흔들리는 직장인을 위한 30일 인문학>(2013년) 같은 책들이 그렇다. <인문학, 주식시장을 이기다>의 부제는 ‘상위 1%만 알고 있는 투자철학의 비밀’이다.

여기서 흔히 ‘문사철’로 대변되는 인문학 고전들은 투자 비법의 통찰력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간주된다. <흔들리는 직장인을 위한 30일 인문학>은 사르트르, 하이데거, 칸트, 들뢰즈, 맹자 등 말 그대로 동서고금을 막론한 사상가들을 끌어들이는데, 실제 내용은 미래가 불안한 직장인들의 심리적 불안을 달래주는 자기계발성 조언으로 채워져 있다. <인문학으로 스펙하라>의 저자는 “숙달된 면접 기술이 회사에 입사하기 위한 ‘창’이라면, 인문학은 ‘총’이자 ‘대포’다”라고 말한다. 책 내용을 보면 최근 기업 채용에서 인문학이 강조되는 이유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모든 지원자들의 스펙이 상향평준화한 시대에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은 스펙과 면접의 ‘달인’이 된 지원자들 중에서 옥석을 가려야 하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인문학적 소양을 보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나라 굴지 기업의 CEO들이, 그리고 스티브 잡스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인재는 바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에 둔 인재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치는데 대학에서는 ‘면접의 달인’을 만드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고 말한다. 최태섭 문화평론가는 “기업이 인문학을 채용을 위한 하나의 패키지 상품으로 보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정작 인문학의 근간이 되는 출판계의 체질은 갈수록 허약해지고 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말이다. “자기계발서 분야의 베스트셀러는 판매량이 몇백만부에 달하지만 인문학 책은 몇십만부만 팔려도 엄청나게 팔린 것이다. 인문학 열풍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런가. 강연은 책보다 훨씬 더 수요가 많다. 지자체, 공공기관, 도서관 등 없는 곳이 없다. 지자체나 기관 입장에서는 생색을 낼 수 있다. 도서구입비나 독서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전반적으로 불황인데 인문서는 더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지난해 한국출판인회의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출판 유통실태 조사를 보면, 2012년 8월까지 출판사 매출은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11% 이상 줄어들었다. 2012년 상반기 신간 발행 종수는 전년도에 비해 11% 감소했다. 2012년 온라인서점 도서판매 수익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수익률 0%를 기록했던 2011년보다 더 나빠졌다. 인문학 열풍의 이면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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